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0.18 10:55

[대학원언론사 공동기획] 대학원언론의 현주소

 


 

지난 3, 서울대 학보사 대학신문은 시흥캠퍼스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본관 점거 농성에 관련한 기사의 분량을 적게 다루라는 압박을 받아온 점을 밝히고, 신문 1면을 백지로 발행했다. 학교에 관한 비판 기사를 다루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편집에 참여가 가능한 신문사 사례도 비일비재로 들려온다. 대학원보에 대한 고민을 나누기 위해 <고려대학원신문>의 주최로 서강, 경희, 고려, 동국 등 4곳의 대학원신문 편집장이 모였다. 대학 언론의 위기, 과연 이대로 괜찮은가?

 

양계영 기자(urstar2016@sogang.ac.kr)

 

  

 

1980년대 대학언론은 대안언론으로서의 역할을 맡았었다. 독재정권에 맞서 비판과 감시의 기능을 했었고, 이는 학우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하지만 시대가 변하게 됨에 따라 대학신문의 환경에도 변화가 생겼다. 대학언론에게 교내 홍보 기사만 쓰도록 부서를 개편한다거나, 예산을 줄여 발행횟수를 줄이도록 하는 움직임이 그 예시다. 이러한 변화는 대학원 신문사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도 일맥상통하게 이어진다.

 

 

대학원신문의 재정과 인력문제

 

<고려대학원신문>의 경우, 신문 운영 재정과 관련한 문제에 입을 열었다. “재정을 올리기 위해 대학원장님께 찾아간 적이 있었어요. 예산과 관련된 고민을 말씀드리니 학술적인 내용을 안 싣는데 우리가 예산을 어떻게 올려주냐는 식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대학 신문들이 학교 본부의 예산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편집권에 대한 침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게 편집장들의 공통적으로 꼽고 있는 문제점이다. 동국대학원신문의 경우, 2007년부터 교내 신문이 미디어센터 소속으로 변경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동국대학원신문> 김세연 편집장은 재정 및 편집권과 관련하여 학교와의 일어나는 갈등, 그 중에서도 2-3면 보도에 관한 언쟁에 대해 입을 떼었다. “학술을 다루는 면에는 별 말 안하는데 보도에 관해서는 학교기관과 언쟁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편집권을 주장하면 우리에게도 개입 권한이 있다고 답변이 오죠. 그러면 이야기의 흐름이 근본적인 이야기까지 할 수 밖에 없게 되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왜 이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까지 하고 있어야 되지?’

 

인력에 대한 문제도 피할 수 없다. 대학원신문에 대한 관심은 신문사 기자를 자처하는 대학원생의 수와도 연결된다. 신문사 구성원이 줄어들면서 남은 이들의 업무가 늘어가는 것은 모든 대학원언론사들이 매년 겪는 악순환이다. 현재 <서강대학원신문사><동국대학원신문사>3명의 편집위원이 모여 신문을 제작하고 있고, <고려대학원신문>5, <경희대학원신문>7명의 편집위원이 기획부터 신문 발송까지의 업무를 분담하고 있다. 편집위원이 적은 경우, 콘텐츠를 다양화하려는 시도나 적극적인 신문 홍보에 대한 어려움이 따른다. <고려대학원신문>은 기자들 또한 대학원생이다 보니, 연구와 신문 제작을 병행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했다. “꾸준한 독자 확보는 중요한 문제인데, 아무래도 공부도 병행하다 보니 새로운 시도가 어려울 때가 많아요. 그 안에서 조금씩 변화를 줘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진1 | 좌부터 고려대학원신문, 동국대학원신문, 중앙대학원신문, 서강대학원신문의 모습.

 

학술지와 비판지, 그사이에서

 

네 곳의 편집장이 모인 만큼 각 언론사가 가지고 있는 고민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신문이라는 매체적 특성이 가진 한계를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도 여러 의제중 하나였다. <서강대학원신문>의 경우 신문 인쇄 이외에도 다음 티스토리를 통해 신문 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본 홈페이지에 유입되는 검색어 통계 1위는 논문 잘 쓰는 법이다. 대학원생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인지 참고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다음 신문 기획의 방향성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동국대학원신문>의 경우, 원우들와 소통하는 수단으로 페이스북 동영상 라이브를 활발히 활용하고 있다. 작년 본관점거 사건 때 편집위원들은 동영상 촬영을 통해 해당 사건을 적극적으로 알릴 수 있었다. “대학원생에게 유익한 꿀팁을 담아달라는 요청도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정도까지 밀착형으로 써야 하는지 고민이 되기도 해요.”

<경희대학원신문> 유혜선 편집장의 경우 대학원신문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제가 신문을 만드는 기준은 파격이에요. 신문의 앞쪽에서 특정 의견을 옹호하는 글을 실었다면, 신문의 뒤에서는 반대하는 방향을 싣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기자의 생각에 맞춰서 원고청탁이 들어가게 되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문을 가로로 실어볼까?’ ‘신문의 레이아웃을 바꿔볼까?’ 각 호의 신문이 지닌 문제의식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지금도 대학원 신문 편집위원들의 고민은 계속되고 있다.

 

 

점점 사라져가는 대학원신문, 학내 구성원들의 관심 필요

 

이어 <경희대학원신문> 유혜선 편집장은 원우들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한 방안으로 매 호 신문이 발간될 때마다 설문조사를 진행하여 여론을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설문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신문을 쓰는데 결국은 원우들의 관심도에 대한 문제로 연결되는 것 같아요. 신문을 메일로 발송해도 결국 안볼 사람은 안보게 된다는 거죠.” 어떤 매체적 특성보다는 대학원 신문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문제라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다. 신문에 대한 원우들의 참여도가 낮다는 점에서 네 명의 편집장 모두 아쉬움을 표했다. “가끔 잘 만들고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어요. 가끔 외부적으로 잊혀진 신문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자발적으로 참여해주시는 원고가 없는 점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원고료도 높였는데, 그 점이 항상 아쉽죠.”

학술운동 세대의 신문과, 현재 대학원신문을 접하는 세대가 가지고 있는 관심도의 크기는 확연히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지닌 문제점을 공론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신문의 역할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네 편집장들의 공통적인 견해이다. <동국대학원신문> 김세연 편집장은 종이 신문이 지닌 권위에 대해서 말했다. “물론 종이신문이 시의성을 따라갈 수 없겠지만 확실한 것은 학교에서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신문 내용을 가지고 항의를 하는 학생의 경우도 있다는 점이에요.” 연이어 <경희대학원신문> 유혜선 편집장은 최소한의 문제의식을 대학원생에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우리마저 얘기를 안하면 아무도 대학원생에게 관심이 없어요. 수료생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도 그렇고요. 우리 학교의 경우 기숙사 입사 비율이 낮은데, 그것도 이맘때쯤 언급을 하지 않으면 다음에도 늘 같은 문젯거리로 남아있어요.”

대학원신문사에 닥친 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문 제작 구성원들이 최근 미디어의 특징에 대해서 이해할 뿐만 아니라, 대학언론이 학내에서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이 중요하다. 원우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고, 그들이 신문의 목소리에 참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도록 기사의 내용과 질질적 측면에서의 변화를 도모하는 것, 대학원신문이 나아갈 방향이 아닐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6.08 12:20

<서강대학교 대학원생 권리장전> 선포를 향하여

 

대학원생 인권유린 및 부당처우에 관한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강대학교 역시 대학원생 인권문제 개선의 필요성을 꾸준히 인식해왔다. 이에 따라 제30대 대학원 총학생회 <상상>에서는 지난해 추진되다 불발된‘대학원생 권리장전’선포를 재개했다.‘ 대학원생 권리장전’선포는 대학원생의 인권 및 노동권 보장을 위한 행보의 첫걸음이다. 본지에서는 올해 6월 중순 경 선포식을 앞둔‘대학원생 권리장전’의 수립과정을 취재했다.

취재 신윤희(shinyoonhee1@naver.com), 양계영(ozo69@naver.com), 정재원(agnes.jaewon.jung@gmail.com)

정리 및 편집 신윤희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4.08 15:36

강자성 절연체의 마이크로파 적응기억 현상에 관한 연구

 

 

 

이한주 _ 서강대학교 마이크로웨이브 포토닉스 연구원

 

 

지난 12월 게재된 논문에서 강자성 절연체의 굴절률이 마이크로파 영역의 빛에 의해 비휘발적으로 변화하는 현상과, 이 현상을 통해 마이크로파에 대해 저항기억 소자 (맴리스터; memristor) 와 같은 응답 특성을 갖는 소자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마이크로파는 전자레인지와 같은 가정용 조리 기기에서부터 군사용 레이더, 위성 통신 및 휴대폰 단말기통신 기술 전반에 널리 활용되고 있으며, 마이크로파 필터는 이러한 시스템에 가장 중요한 소자로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본 소자는 입력 마이크로파에 의해 조절되는 가변 필터소자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통신 시스템의 주요 소자로서 활용 가치가 높다 할 수 있다. 특히, 마이크로파 신경망을 통해 통신 부하 및 속도를 학습을 통해 스스로 최적화 하는 시스템의 개발은 인공 지능 분야뿐만 아니라 통신 분야에 있어 큰 기술적 진보를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시스템의 실제 구현을 위한 기본 소자인 광학 시냅스를 구현 했다는 것에 큰 의미를 갖는다.

 

 

무어 법칙 (Moore’s law) 의 종언

 

지난 2016, 이른바 반도체 혁명을 이끌어 오던 무어의 법칙 집적회로의 성능이 18개월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사실, 무어 법칙의 종언은 소자가 그것을 구성하는 원자의 크기보다 작아질 수 없다는 기본적인 물리적 사실에서 예견되어 있었고, ‘포스트 무어시대를 준비해오던 연구가 이미 50여 년 전 반도체 혁명의 여명기부터 시작되었다. 비관습적 컴퓨팅 (혹은 대체컴퓨팅) 이라 통칭되는 이 연구 분야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자연현상을 통해 정보처리 및 연산기능을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물리학 현상을 응용한 예로는, , 전자의 스핀, 그리고 양자현상을 통해 정보를 연산하고 처리하는 기술인 광학컴퓨팅, 스핀트로닉스, 그리고 양자 컴퓨팅 기술 등이 있으며, 생물학적 접근 방식으로는 뇌의 신경망 구조를 전자소자를 통해 하드웨어적으로 모사하는 신경망 컴퓨팅 기술 등이 있다. 이중 하드웨어적 신경망 컴퓨팅 기술은 생물학적 뇌의 월등한 에너지 효율성뿐만 아니라 다양한 기능을 학습을 통해 수행할 수 있는 범용성, 그리고 동시에 다양한 연산을 수행 할 수 있는 병렬성에 큰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인간 뇌의 신경망 지도가 완성된다면, 하드웨어적 신경망 기술을 통해 인간의 뇌를 하나의 전자 소자에 구현 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정보처리 기술뿐만 아니라 뇌 과학 및 인간에 대한 이해 전반에 걸쳐 큰 진보를 가져다 줄 것이다.

 

 

하드웨어적 광학 신경망

 

생물학적 신경망을 하드웨어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신경망을 이루는 뉴런간의 연결성을 조절하는 시냅스의 기능을 전자 소자를 통해 구현하는 것이 가장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시냅스 모방 전자소자인 맴리스터는 이전에 인가된 전기적 자극에 의해 소자의 전기전도도가 변하는 특성을 가지며, 이는 생물학적 시냅스가 이전 자극에 의해 뉴런간의 연결을 조절하는 기능과 유사하기 때문에 인공 신경망을 이루는 기초 소자로서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그러나 기존 멤리스터 소자를 통한 전자기반 인공 신경망은 정보를 전류 및 전압, 즉 전자의 양에 따라 부호화하여 전송하고 처리하기 때문에, 정보처리 속도는 소자를 통해 이동하는 전자의 속도에 의해 제한된다. 특히, 소자의 단위 시간당 정보 처리량 (ex: cpu 클럭)이 증가할수록 더 많은 전자의 이동이 수반되며, 이는 전자의 직접적인 이동으로 인한 에너지 손실이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학 컴퓨팅은 광자 혹은 빛을 정보의 매개체로 사용하여 중첩 및 간섭과 같은 광학적 현상을 통해 정보처리 기능을 구현하는 연구 분야이다. 광자는 빠르며(어떠한 정보도 빛보다 빠르게 전달될 수 없다), 전자의 이동을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에너지 손실이 적고, 상호간 교차할 수 있기 때문에 높은 대역폭의 병렬처리를 구현 하는데 적합하다. 따라서 신경망 기술과 광학 컴퓨팅 기술을 융합할 수 있다면 기존 전자기반 신경망보다 정보처리에 있어 더 넓은 대역폭과 빠른 처리속도, 그리고 더 높은 에너지 효율성을 갖는 연산 시스템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1]

 a. 소자의 동작원리 묘사도. b. 본 연구에 사용된 소자의 구성도. c. 실험에서 측정된 자극마이크로파에 따른 투과도 변화.

 

 

광학 시냅스 소자의 구현

 

광학 신경망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광학 신호에 대해 맴리스터와 같은 응답 특성을 갖는 광학 시냅스 소자를 구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광학 시냅스 소자는 광 신호를 선택적으로 투과 및 반사시키는 가변 필터(tunable filter)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광학 필터와 광 신호에 의해 광학적 특성 (굴절률)이 변하는 물질을 결합함으로써 구현할 수 있다. 빛은 전자기파이기 때문에 물질의 굴절률은 그 물질의 전기 및 자기적 특성에 의해 정해진다. 물질의 광학적 특성이 변화한다는 것은 물질의 전자기적 특성이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광학 시냅스를 이루는 물질은 입력 광 신호에 의해 전자기적 특성이 비휘발적으로 변화하는 독특한 성질을 가져야 한다.

지난 12월 게재된 논문에서 이러한 독특한 성질이 마이크로파 영역의 빛과 강자성체의 강한 상호작용을 통해 나타날 수 있음을 보고하였다. 그림 1a는 논문에서 제시된 소자의 동작 원리를 보여준다. 자연 상태에서 강자성체에는 자기 방향이 균일하게 정렬된 구역인 자기구역들이 존재하는데, 각 자기구역은 길이 와 같은 공간적 구조에 따라 서로 다른 고유 공진주파수를 갖는다. 입사된 마이크로파의 주파수가 자기구역의 공진 주파수와 일치할 때, 자기구역은 공명 현상을 통해 입사된 마이크로파를 강하게 흡수하게 되며, 이 흡수된 에너지로 인해 자기구역의 구조가 변화하게 된다. 강자성체의 자기적 특성은 자기구역의 구조에 의존하기 때문에, 자기구역의 구조 변화에 의해 강자성체의 자기적 특성이 변화하게 되어 강자성체의 마이크로파에 대한 굴절률이 변화하게 된다.

그림 1b-c는 실제 실험에 사용된 소자의 구조 (1b)와 실험 결과 (1c) 를 보여준다. 실험에 사용된 소자는 저주역대의 마이크로파만 투과시키는 필터인 lowpass filter 와 강자성 절연체인 자성 가넷 (yttriumiron garnet) 물질이 결합된 구조를 갖고 있다. 실험은 본 소자에 강한 마이크로파 자극을 가한 후 약한 마이크로파를 통해 소자의 마이크로파 투과도 변화를 측정하는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측정 결과 소자의 투과도가 이전에 인가된 마이크로파 자극에 의해 가역적이고 비휘발적으로 변화함을 확인하였으며, 특히 자극으로 사용된 마이크로파의 진폭뿐만 아니라 주파수에 의존하여 연속적으로 변화함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주파수 의존적 응답 변화는 광학 시스템이 정보를 빛의 진폭뿐만 아니라 주파수에 담겨 처리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입력된 정보에 따라 스스로 학습하고 진화할 수 있는 광학 신경망의 구현에 필수적인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이 결과는 본 소자가 입력된 광학 신호를 기억하고 신호의 투과를 조절한다는 점에서 전자기반 맴리스터의 기본적 특성과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따라서 하드웨어적 광학 신경망의 시냅스 소자로서 적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2.14 14:06

기생충과 전체주의-민주주의

 

 

 정준호 _ 영국 런던대학 위생열대의학대학원 기생충학 석사

 

 

1973년 성의 발생과 진화에 기생충이 중요한 원동력을 제공해왔다는 붉은여왕이론(Red Queen Hypothesis)이 제시된 이래로 외형, 성선택, 행동, 나아가 집단의 조직까지 기생충이 생물의 진화에 깊은 영향을 미쳐왔다는 다양한 이론들이 등장했다. 특히 기생충이 성선택에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이론들이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해밀턴-주크(Hamilton-Zuk) 이론은 건강한 수컷일수록 성선택에 유리한 특성들(화려한 깃털 등)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 주목했다. 즉 기생충에 저항성이 높은 수컷이 더 많은 에너지를 성선택에 투자할 수 있으며, 암컷은 이런 특성을 기준으로 짝을 고르게 된다는 이론이다. 더불어 인간적 특성들 또한 진화의 과정에서 나타났음을 지지하는 가설들이 늘어나며(진화심리학, 진화생물학 등) 인간의 문화와 사회성에도 기생충 이론과 진화적 가설을 대입해보려는 시도들이 등장했다.

기생충 압력 이론(parasite stress theory)인간 집단의 문화와 사회성이 과거의 관성으로 지속되고 전파된다는 기존의 시각을 반대하고 있다. 즉 특정 지역에서 나타난 문화는 거주 집단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진화적 전략의 일환이며, 이러한 문제해결에 있어 개인을 문화적, 사회적 특성을 선택하거나 거부, 혹은 조정할 수 있는 전략적 개별 행위자로 보고 있다. 물론 개인이 의식적으로 각각의 문화적 특성에 진화적 압력을 계량해 선택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또한 사회 전반이나 집단 내 다른 개체(부모, 형제 등)의 영향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넓게 보자면 문화와 사회성 역시 진화의 산물이며, 여전히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가설이다.

감염성 질환의 인간 종의 진화 이후 진화를 주도해온 가장 큰 동력이었으며, 최근까지도 사망과 질병의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즉 기생충은 인간의 진화에 있어 주요한 선택 압력으로 작용해 왔다는 것이다. 기생충-숙주간의 공진화(co-evolution)은 지리적으로 다르게 나타난다. 집단 내부인들 끼리는 외부인에 비해 면역학적으로 비슷한 특성을 지니게 됨을 의미한다. 기생충 압력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외부인은 감염원으로서 위험한 존재가 되어가며, 동시에 기생충의 영향을 완화하고 사회적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내부인의 중요도가 높아진다. 따라서 기생충 압력이 높은 상황에서는 보수적 가치가 선호된다. 자민족중심주의가 강해지고,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며, 안정성을 중시해 새로운 지역으로 진출하지 않고, 타민족 혐오가 심해지며 외부인을 회피하기 때문에 새로운 기생충과 접촉할 기회가 낮아진다. 이는 대체로 인간의 면역계가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기생충 위주로 면역계를 활성화시키며, 외부에서 유입된 기생충에 감염되었을 경우 치사율이나 질병 부담이 높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으로 보인다.

연구자들은 기생충 압력 이론을 정치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특히 전체주의와 민주주의에 초점을 맞추었다. 옛부터 특정 정치체제가 어떻게 나타나 뿌리 내릴 수 있었는지는 많은 학자들의 연구 주제였다. 초기 연구들은 주로 경제성장이나, 근대화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즉 경제 성장, 혹은 근대화가 일어나면서 민주주의는 자연스럽게 뿌리내렸다는 입장이었다. 기생충 압력 이론의 접근은 기생충의 유병률에 따라 달라지는 내부자와 외부자에 대한 인간의 심리적 기제, 행동, 그리고 상호작용에 기반하고 있다. ‘정치성향에 대한 기생충 압력 이론’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1. 높은 기생충 압력은 집단주의를 촉발시킨다. 즉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전체주의적, 인종혐오적, 자문화우월주의적 성향을 가지게 되며, 외부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데 도덕적 역겨움을 느끼기 까지 한다. 이런 외부인들은 권력을 가진 내부인들에게 부적절한 사회 구성원으로 여겨지게 되며,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게 된다. 앞서 언급한대로 집단주의적 이념은 외부인으로부터 유입될 수 있는 기생충을 차단하고, 내부에서 발생한 기생충 감염의 피해를 최소화 하는 전략이다.

2. 낮은 기생충 압력은 개인주의의 가치를 높이고, 이는 반-전체주의와 외부인에 대한 관용과 믿음으로 이어진다. 진보적 가치들은 외부인과의 상호작용, 교류, 교역 등을 통해 이익을 얻는 것에 높은 가치를 둔다. 또한 외부인과 사회적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지금까지의 데이터를 보면 전지구적으로 민주주의의 정도는 기생충 압력과 음의 상관관계를 가지며, 개인주의와 양의 상관관계를 가진다. 즉 기생충 압력과 집단주의는 함께 상승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곧 전체주의의 상승과도 이어진다.

3. 기생충 압력과 전체주의/민주주의는 되먹임 고리를 형성하기도 한다. 기생충 압력이 낮아지면 사람들은 개방과 평등 같은 가치들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며, 이는 경제적, 사회적 자원이 지역 내에 고르게 퍼지게 해준다. 자원의 분포가 균등해지면서 지역 내 기생충 압력은 추가로 낮아지게 되며, 이는 되먹임 고리를 형성한다. 요약하자면 기생충 압력의 감소는 민주주의의 확산으로 이어지며, 민주주의의 확산은 기생충 압력의 추가적 감소로 이어진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기생충 압력이 상승하면 보수적 가치, 방법, 편견, 불평등이 만연하게 되고, 이는 전체주의로 이어지며, 결과적으로 기생충에 의한 사망률과 질병 부담을 더욱 늘리는 쪽으로 이어진다.

기생충 압력 이론에 따르면 한국의 상황은 전체주의가 나타나기에 이상적인 사회였다. 40-60년대까지 한국의 기생충 감염률은 90%를 웃돌았으며, 말라리아, 콜레라 등 다른 감염성 질환도 만연했다. 하지만 이 때까지 ‘기생충’이 질병이 된다는 사실은 대중 사이에서 그렇게 흔한 개념이 아니었다. 회충을 예로 들면, ‘회충을 몽땅 떼어버리면 몸에 좋지 않다고 해서 몇 마리 남겨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후 60년대 한국에서 기생충 및 기타 감염성 질환은 중요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으며, 국가적 박멸 대상이 되었다. 대중들은 기생충이 ‘질병’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사회 구성원 거의 전부가 ‘감염’되어 있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면서, 감염의 위협이 인구 집단 내에 퍼져나가고,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앞서 언급한대로 보수적 가치와 집단주의를 부추기는 되먹임 고리를 형성했을 수 있다. 반면 기생충 박멸 사업이 활발해지고, 보건의료 상황이 개선되며 감염률이 크게 낮아지자 한국은 민주주의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둘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밝혀내기는 쉽지 않겠지만, 분명 흥미로운 상관관계다.

물론 지나친 생물학적 환원주의는 경계할 필요가 있지만, 기생충이 인간 사회 구조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다는 사실은 중요한 사실을 전해준다. 바로 인간의 사회와 역사는, 단순히 인간에 의해서만 구성되고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간이 살고 있는 공간은 인간으로만 구성된 닫힌계가 아니라, 수 많은 생물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는 거대한 열린 네트워크다. 우리가 먹고 있는 식량, 우리가 겪고 있는 질병,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공간을 구성 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와 사회 서술에서 무시되고 잊혀져 온 수 많은 생물들 과의 상호작용이다. 인간 중심의 시야에서 벗어난 생태적 역사와 사회의 재구성은, 그래서 우리에게 또 다른 미래를 꿈 꿀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

Thornhill, Randy, and Corey L. Fincher. The parasite-stress theory of values and sociality: Infectious disease, history and human values worldwide. Springer, 2014.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6.06.08 11:45

죄의 문제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니체와 키에르케고어의 죄 개념


윤유석 _ 철학과 석사과정

 

 

죄, 신앙과 비신앙의 갈림길에서
“죄가 무엇인가요? 다른 사람들이 이건 죄다, 죄다 하니까 그게 죄가 된 거 아닌가요?”고등학생 시절 읽은 이문열의 소설『사람의 아들』에서 내 마음을 찌른 구절들 중 하나이다. 소설 속 인물인 아하스페르츠는 바로 이 의문에 빠져 자신의 유대교 신앙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한다. 한때 그는
신에 대한 경건한 믿음이 인간을 현실의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로마의 압제 하에서 핍박받던 그의 동포 이스라엘 민중에게 신앙은 아무런 구체적인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는 공허한 관념에 불과하였다. 오히려 신앙은‘죄’라는 잣대를 통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 버린 채 병들고 나약한 삶만을 끊임없이 장려할 뿐이었다. 이 때문에 소설에서 아하스페르츠는 결국‘신의 아들’인 예수에게 대립된‘사람의 아들’을 자처하고서, 신을 비판하는 자로 등장하여 활약한다. 그는 재림의 날까지 이땅을 배회하며 예수와 싸우기를 결심하게 된다. 나는 내가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려 할 때마다 아하스페르츠가 품었던‘죄’에 대한 물음을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이 의문은 그리스도교가 약속한 구원이 과연 인간에게 실질적인 삶의 해방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와 너무나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듯 하였다. 만일‘죄’가 현실이라면, 우리에게는‘죄’로부터의 구원이 요청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그리스도교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호소할 수 있는 삶의 진실이 된다. 반면‘죄’가 허구라면, 우리에게는‘죄’로부터의 구원이 불필요해지고 만다. 이 경우 그리스도교는 단지 존재하지 않는‘죄’를 내세워 인간을 속박하는 억압적 기제가 된다. 어떠한 관점에서‘죄’를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수도, 그렇지 않을수도있다.‘ 죄’의 문제는 신앙과 비신앙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것이다.


‘죄 문제’가 지닌 철학적 함의
나는 프리드리히 니체(F. Nietzsche)와 쇠얀 키에르케고어(S. Kierkegaard)가 이 갈림길의 양쪽을 각각 대변하고 있는 철학자로서 제시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둘은 모두 헤겔 이후 서양사상의 흐름을 쇄신하여 현대철학을 위한 새로운 사유를 개창한 인물들로서 평가받는다. 하지만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인간을 옥죄어 창조적인 삶을 가로막는 약한 자들의 종교라고 비판하였던 반면, 키에르케고어는 그리스도교가 인간을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이끌어 절망으로부터 구원하는 실존의 가능성이라고 강조하였다. 둘의 입장에서 나타나는 대립적인 면모는 많은 학자들에게 오랫동안 흥미로운 비교의 주제가 되기도 하였다. 브란데스(G. Brandes)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연구의 흐름은, 칼 뢰비트(K. Lowith), 칼 야스퍼스(K. Jaspers), 질 들뢰즈(G.Deleuze) 등 현대철학의 중요한 사상가들을 거쳐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니체와 키에르케고어의‘죄’개념을 중심으로 진행된 비교는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찾기 힘들었다. ‘죄’ 라는 문제는 둘 모두에게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철학적 주제였는데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없다는 사실은 매우 의아스럽게 생각되었다. 내가 보기에, 두 철학자가 제시하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과 옹호는 모두‘죄’의
문제에 대한 고민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그리스도교가‘죄’라는 족쇄로 동시대인들을 속박한다고 비난하였지만, 키에르케고어는 동시대인들이‘죄’를 잊어버린 채 그리스도교를 싸구려 신앙으로 만들어버렸다고 지적하였던 것이다. 나는 둘의 대립적인 입장을‘죄’개념을 통해 살필 경우 독창적인 연구를 제시할 수 있을뿐더러, 내 평소의 고민 또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논문을 통해 그리스도교에서 제시된‘죄의 문제’가 지닌 철학적 함의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한편으로, 나는 죄의 문제에 대한 니체의 부정적 관점, 곧 죄의 문제는 인간의 생을 억압하고, 타자에 대해 폭력을 유발하며, 주어진 체제에 순응하도록 만든다는 관점을 살폈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키에르케고어의 긍정적 관점, 곧 죄의 문제는 인간이 자기를 극복하도록 하고, 타자에 대한 비판이 가능하도록 하며, 주어진 체제를 개혁하는 힘을 지닌다는 관점을 살폈다. 이 비교를 통해 나는 니체의 입장이 지닌 한계를 지적하고, 키에르케고어의 입장을 보다 옹호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논의는‘죄’에 대한 신화적, 교의학적 해명이 아닌, 철학적 해명을 제안함으로써 오래된 종교적 고민이 인간의 실존에 관한 통찰을 안고 있다는 점을 보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허구, 그 이상의 의미
‘죄’의 문제에 대한 연구는 내가 니체와 키에르케고어를 비교함으로써 제시한 내용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도 있을 것이다. 논문을 제출한 이후에도 나는‘죄’에 대한 사유를 어떻게 보다 확장시켜 나갈 것인지에 대해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어쩌면‘생철학’혹은‘실존철학’의 관점에
서 논의를 보다 치밀하고 세부적으로 전개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루돌프 불트만(R. Bultman), 폴 틸리히(P. Tillich) 등의‘실존주의 신학’이나, 칼 야스퍼스(K. Jaspers), 가브리엘 마르셸(G. Marcel) 등의‘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 탐구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정
신분석학’혹은‘분석심리학’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프로이트(S. Freud)가 다룬‘양심’,‘ 불안’, '죄책감’에 대한 연구나, 융(C. Jung)이 논의한‘그림자’에 대한 연구를 참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보다 사회적인 차원으로 문제를 풀어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한나 아렌트(H. Arendt), 미셸 푸코(M. Foucaul), 피에 르 부르디외(P. Bourdieu), 르네 지라르(R. Girard) 등이 집단, 권력, 폭력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탐구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든‘죄’의 문제가 신화적, 교의학적 허구 이상의 의미를 지닐 것이라고 믿는다. 상징, 신
화, 종교, 신앙, 이야기 등은 모두 인간의 현실을 드러내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폴 리쾨르(P. Ricoeur)가 지적하는 것처럼, “상징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그리스도교 신앙이 인간에 대해 고민하며 제시한‘죄’의 문제는 단순한 거짓으로 치부되기에는 우리의 생각을 너무나 많이 자극하고 있다. 비록‘죄’란 철학적 고찰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수수께끼처럼 우리에게 떠오른 상징적인 개념이지만, 이 개념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다시 반성적으로 살펴보도록 사유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상징으로부터 떠올려진 생각들 속에는 풍부한 철학적 함의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이 생각들에 진지하게 응답함으로써그리스도교 신앙을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갱신시킬 수 있으며, 철학을 위한 마르지 않는 자양분을 공급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6.06.08 11:39

장애의 사회적 쓸모 - 장애에 대한 문화구성체적 접근

 

 


 

지소연 _ 사회학 석사 졸업

 

 

장애인은감동포르노배우?

 

호주의 장애저널리스트 스텔라 영(Stella Young)TED 강연에서 선천성 희귀병을 앓아 휠체어 생활을 하는 자신의 일화를 소개하였다. 선생님이었던 그녀가 교과 수업에 들어가면 많은 학생들은 그녀의 수업 대신 역경에 가득 찬 인생담을 듣고 싶어 했다. 그녀는 이러한 장애극복담에 대한 비장애인들의 태도가 장애인을 감동 포르노(inspiration porno) 배우로 만드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장애극복담은 보통 비장애인의 규율을 장애인이 성공적으로 이행한 경험담을 의미하는데,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일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는 인식은 장애인들을 감동 포르노 배우로 대상화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장애인들은 비장애인과 동일한 신체신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그리고 장애인들은 이에 대해 한 목소리로 사회적 배려(경사로 설치나 저상버스 운행 등)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장애인에게 비장애인과 똑같은 역

할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장애가 손상과 장애, 핸디캡으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구성물이라는 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 이를 위해 스텔라 영의 장애를 예로 들어보자. 기침을 하다 뼈가 부러질 정도로 약했던 그녀는심리생리해부학적 구조나 기능의 상실 또는 비정상성인 손상(impairment)된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약한 뼈로 인해 걸을 수 없는 건 장애(disability)이다. 장애는 손상으로부터 연유하여, 인간으로서 정상이라고 간주되는 방식으로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의 결여로 정의된다. 그녀가 걸을 수 없어 엘리베이터가 없는 학교에 취직할 수 없다면 이는 핸디캡(handicap)이다. 녀는 손상이나 장애에도 불구하고 비장애인과 동일한 교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은 그녀의 정상적 역할 수행을 막는다. 이러한 개념 구분 때문에 핸디캡 극복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극복담을 반대하면서도 손상에 대한 인정이나 장애에 대한 배려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3가지 개념 구분을 통해 장애인은 신체정신적 고통과 사회적 고통 두 가지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의 복지 시스템부터 개개인의 극복담까지 모두 장애인의 신체정신적 고통에만 관심이 있다. 그로테스크하게 뒤틀린 몸은 나보다 약자라는 사실을 항상 주

지해주며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 글에서는 장애인들의선정적인몸이 아닌 사회적 고통에 관심을 갖고자 한다. 대상화, 타자화에 맞서 장애인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고통을 어떻게 합리화하는지, 부당한 핸디캡에 대해 어떠한 문화적 양식으로 대처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장애의 합리적 재구성

 

근대 이전의 종교는 사명을 감당하는 방식으로 고통을 해소하게 하는 내적 귀인을 통해 전통 지향적 인간형을 형성했으, 명백히 규정된 역할체계를 제공해주었다. 반면 현대사회에서는 종교와 같은 엄격한 규율 대신 스스로 사회적 규준을 인식하고 자아정체성을 수립해야 한다. 개인들은 자신의 일상을 스스로 성찰하며 대처방식(coping strategy)을 직접 선택하는 과정에서 귀인의 양식이 결정된다. 보통 각자가 가진 귀인의 방향에 따라 사회적 고통을 포함한 자아정체성의 설명 방식을 제공해주는 기관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인다.장애인의 경우 3가지 형식으로 자신의 장애를 합리화한다. 첫째, 정상화담론이다. 이와 같은 담론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장애 발생과 회복을 스스로의 책임으로 생각하며 재활을 통해 비장애인과 같이 정상화되려 한다. 사회적 차별과 높은 진입장벽의 원인을 자신의 의지나 능력 부족과 같은 개인 내부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내귀인자들이다. 사회가정상인이라고 규정기준에 충족하기 위하여 자신의 신체를 비장애인과 동일한 상태로 만들거나, 직업적 능력을 배양하여 사회적 존재가치 를 증명하려한다.

종교도 장애의 원인과 합리화에 기여한다. 이들은 재활담론 대신 윤리적 당위를 통해 자신의 고통을 해석하며 신이 준 특별한 사명에 치중한다. 예컨대 개신교에서는 신이 장애를 주신 이유를 생각하고 개인의 소명의식을 다지는 방식을 장려한다. 장애로 인한 고통의 해소방식이 개인 내부에 있다는 측면에서

이 방식 또한 내부귀인이다. 마지막으로 외귀인 성향일 경우 운이나 국가 정책과 같은 외부적인 상황을 고통의 이유로 본다. 장애활동가들은 사회적인 시스템의 미비나 비장애인에게 맞춰져 있는 사회적 기준이

고통을 유발한다고 보며 이에 저항하기 위해 다양한 장애해방 운동을 수행한다. 하지만 모든 외귀인자들이 장애해방운동에 뛰어들 수는 없. 운동에 헌신하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나 기관에서 제공하는 재활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하지만 장애를 갖게 된 원인을 나에게서 찾지 않는 장애인들도 존재한다. 혁명적 저항을 하기엔 좀 부담스럽거나, 복지 시스템이 미비해 스스로 문제 해결을 하지만내 탓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 이들은 장애에 대한 세상의 시선에 대해 일상적 전복 전략을 수행한다. 핸디캡에 대한 일상적 저항 장애인들은 일상적으로 쿨함, 스스로의 고통에 대한 해학적 자조, 연기력을 통해 사회상황에 대한 전복적 순응전략을 취한. 쉽게 말해 후술할 전략들은 장애로 인한 부당한 핸디캡에 대해 저항적 태도를 취하지만 직접적 항의가 아니라는 점에서 순응적 측면이 있다. 우선 쿨은 권위자에 대한 거부를 표현하기 위해 개인이나 소그룹이 선택한 대립적 태도를 의미한다. 이는 필히 반항적인 태도를 동반하며 주류문화에 저항적인 성격을 띤다. 쿨함은 공동체 전체의 움직임에 편승하는 것이 아닌 아예 차별의 원천과 개인적 거리를 둔다. 예를 들어 아스파거 증후군을 가진 루크 잭슨은 13세에 <별종, 괴짜 그리고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책을 썼다. 보통 아스파거 증후군의 경우 언어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의사소통이나 감정교환에 대해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저자는 오히려 아스파거 증후군이 아닌 사람들의 비논리적인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결핍적 관점에

서 벗어나 장애를 차이로서쿨하게인정한다. 장애에 대한 위상적 전복방식을 쿨이라고 한다면, 플라넬링

(flanneling)은 과장된 말이나 행동, 충성 등을 통해 자신의 경멸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넬링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유머나 아이러니, 회의나 냉소를 통해 자신의 반항감을 표출한. 장애인의 경우 아래의 사례처럼 스스로를 유머의 소재로 삼거나 냉소하는 경우가 있다.

 

이 교수는 시각장애인이었다학기가 거의 끝나갈 어느 날 이 친구가 저녁을 한 번 사겠다고 해서 함께 음

식점에 갔다. 이 친구가 가끔 가는 횟집에서 먹고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던 중 이 친구가 최근에 보건복지부 장관하고 같이 청와대 들어가서 대통령과 대화를 나눴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장관은 대통령 앞이라 아무 말 못하는데 자기는 할 말 다 하고 왔다고 뿌듯해했다. 그래서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이 친구가 천연덕스럽게내가 눈에 뵈는 게 있?”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듣자마자 긴장이 탁 풀리면서 나도 모르게 음식점이 떠나갈 듯이 웃었다. 이 친구는 진짜 보이는 것이 없지않은가?“ 난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어.”사실 이런 표현은 대개 눈이 보이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로 보이지 않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우스워져서 크게 웃었다편하게 웃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접시에 남은 마지막 회 한 점을 이 친구가 집어먹었다. 그래서마지막 남은 걸 왜 네가 먹냐?”그랬더니 이 친구가내가 눈치가 있냐?”고 대답을 해서 또다시 박장대소를 했다.

 

위의 글에서 장애가 하나의차이로 위상이 격상되어야 한다거나, 장애에 대한 사회 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인식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이 교수는 자신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유머의 소재로 삼고 있다. 자신에 대한 자조적 유머는 장애에 대한 저항적 순응의 전략일 수 있다. 장애인들은 보통 자신의 장애가 유머의 소재거리가 되면 불쾌해 하는 경우가 많. 그러나 이 교수는 스스로의 심리적 고통을 고통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이를 유머의 소재로 씀으로서 상대가 웃을 수 있는 편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유머는 사회적 상황에 대한 고민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수용과정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쿨함, 유머와 같은 일상의 전략들을 장애인을 대상화하려는 사회적 인식에 대해 정면으로 항의하지는 않는 다는 점에서 장애해방운동과는 다르다. 오히려 장애가 있다는 상황이 비정상적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기 때문에 쿨함과 유머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들은 장애의 책임을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면으로 항의하기엔 개인적 소모가 크고, 정상화담론은 마뜩찮다. 때문에 장애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다칠 수 있는 자존감과 품위를 최대한 지키기 위해 전복적 순응전략을 사용한다.

 

장애의 사회적 쓸모

앞서 우리는 장애인들이 사회적 인식에 대해 대응하는 전략들을 살펴보았다. 장애인에게 장애로 인한 사회적 고통은 최대한 합리화해야 하는 대상이자 어떤 방식으로든 방어해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사회적 인식으로 인한 타자화, 소외와 같은 고통도 나름의 쓸모가 있다. 장애인들의 수기를 읽어보면 장애로 인해 스스로에 대해  성찰했다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비장애인에게는 이러한 태도가 뭔가 나와는 다른 어떤 걸 깨달은 사람 같아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신체적인 고통만

이 스스로의 성찰의 도구로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같은 종류의 장애가 아니고서야 서로의 신체적 고통에 대해 완벽히 공감하지 못한다. 절름발이인 필자도 눈이 보이지 않는 고통을 잘 이해하기 힘들다. 그리고 장애 유형에 따라 신체로 체감하는 고통보다 장애인이라서 당하는 사회적 고통이 더 클 때도 있다. 때문에 정신이나 신체가 불편하니 서로의 장애로 인한 고통을 잘 공감하는 것 같고, 잘 뭉치는 것 같다는 생각은 오산이다. 장애인들은 모두 포르노 배우로 내몰리는 상황을 공감하기에 서로의 사회적 고통을 이해한다. 고통에 대한 공감이 사회적 집단으로서장애인이라는 범주가 생존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통을 통한 공감과 연대가 바로 장애의 사회적 쓸모다. 이 논의는 이들의 신체적 고통이 당연하다거나 쓸모 있다는 이야기와는 다르다. 쓸모를 취하기 위해 장애인들이 계속 타자화된 상태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다만 핸디캡에 대한 문화적 해소방식을 통한 성찰, 상대에 대한 공감을 통해 서로의 고통에 한 층 다가가고 연대하는 모습은 돈 없음, 빽 없음과 같은 다른 사회적 고통에도 적용 가능하지 않을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6.06.08 10:52

 

중독과 행복

 

김봉규 _ 미래행복인재연구원 대표

 

 

 

키스는 기호이다. 사랑은 황홀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하지만 사랑 뒤엔 욕망이 은폐되어 있다. 그 끝은 죽음이다. 결국 사랑하는 것은 죽는 것이다. 욕망의 자유도 죽음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가, 아니면 완성하는가? 기호는 언제나 잔인하다. (그림: 구스타프 클림트의‘키스’)

 

 

 

클림트의 <키스>엔 남녀의 황홀한 사랑이 보인다. 꽃으로 만발한 정원, 별들이 빛나는 밤에 둘이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보이는 대로의 모습일 뿐이다. 색을 잊어버리고, 여인의 표정도 삭제하고 둘의 모습을 바깥 선으로만 따라가 보면 예상치 못한 모습이 보인다. 성적으로 흥분한 남성의 성징이다.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의 핵심개념인‘남근’, 인간 욕망의 궁극적 지향점이다. 잡을 수 없는 ‘파랑새’, 도착할 수 없는‘무지개’! 그림을 그냥 보지 않고 이리저리 뜯어 본 결과는 사랑 아닌 욕망이다. 하지만 메시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가려진 여인의 몸에서 유일하게 삐져나온 부분이 있다. 발의 형상이 화살표 같다. 오른쪽 아래로 드리워져 한 곳을 가리키고 있다. 절벽! 죽음의 상징! 보아야 할 것! <키스>가 전하는 종국적 메시지는 죽음이다. 처음엔 사랑인줄 알았지만 시간이 흐르니 그저 욕망에 중독된 것뿐이었다. 그리고 끝은 죽음이다. 아무것도 없는 지구를 상상해 보자! 대지 위에 있는 것이
라고는 작은 바늘 하나뿐이다. 어디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런데 또 어디선가, 수십만 피트 상공에서 누군가가 실 하나를 떨어뜨린다. 실은 방향도 목적도 없이 살랑살랑 떨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무심하게 떨어진 단 하나의 실이, 지구위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바늘귀에 꽂힐 확률! 바로 당신이 태어날 확률, 기적이다! 인간은 한 번 태어나, 한 번 살고, 한 번 죽는다. 두 번 사는 인간은 없고 두 번 죽는 인간도 없다. 절대적 일회성, 대체 불가능성의 존재이다. 인간은 어쩌면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소중하다. 피노키오는 완전한 인형에서 완전한 인간이 된다. 그럼 인형일까, 인간일까? 정답은“둘 다 아니다”이다. 인형도 많고, 인간도 많다. 피노키오라는 존재는 하나뿐이다. 피노키오는 피노키오이다. 그래서 사실 당신은 인간도 아니고, 학생도, 군인도 아니며, 어떻게 부르든 집합명사는 아니다. 한번 사는 기적의 존재가 바로 나라는 생각을 한다면 쇼펜하우어처럼‘불행이 잠깐 멈추는 것이 행복이다’라고 식언하면 안 된다.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불행이 잠깐 멈추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행복이 잠시 멈추는 것이 불행이다. 그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소중한 많은 존재들이 다양한 중독에 빠져, 귀중한 삶을 낭비하고 있다. 10대만 해도 100만 명 이상 게임중독에 빠져 있다. 중독에는 알코올 중독, 마약중독, 도박중독 등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뿐만 아니라 약물중독, 섹스중독, 포르노 중독 등 다양한 것들이 존재한다. 정상처럼 보이는 생활에도 중독은 있다. 쇼핑중독, 드라마중독 일중독 등 자아를 잃어버리고 노예상태와 같은 상실의 삶을 보내도록 만드는 요소는 많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 인간은 누구나 자존심에 중독되어 있다.
학술적 정의보다 중요한 것이 존재론적 이해이다. 무엇엔가 중독된다는 것은 그것 안에 내가 용해되어버림을 뜻한다. 단순히‘몰입’으로 치부할 수 없다. 노예의 삶과 같기 때문이다. 처음엔 내가 술을 마시지만 어느 순간부터 술이 나를 마시듯, 모든 중독은 어느 지점을 경계로 행위주체가 바뀐다. 처음엔 내가 쇼핑을 해도 결국 쇼핑이 날 쇼핑하고, 드라마를 내가 본다고 생각하지만 후엔 드라마가 날 보게 된다. 안 보면 일주일을 산 것 같지 않다.

 

중독 밑의 중독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정상처럼 보이는 중독이 있다. 전혀 중독 같지 않은 중독이 사실은 더 무섭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그리고 누구나 행복을 아는 것처럼 매일 바쁘게 움직인다. 하지만 행복이 무엇인가 질문하면 머뭇거린다. 그리고 사실 별로 행복하지 않다. 신기한 것은 대부분 그것을 정상으로 알고 살아간다. 행복을 측정하는 기준을 행복지수라 한다. 그런데 행복지수는 가난한 나라일수록 높은 경향이 있다. 돈과 행복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실 방글라데시인들은 행복지수가 높은 것이 아니라 불행지수가 낮다. 욕망 지수가 낮기 때문인데, 눈에 보이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기는 젖만 주면 행복하다. 행복지수는 인간은 단순히 욕망하며, 욕망이 충족되는 것에 비례해서 행복하다는 느낌, 즉 행복감을 갖는다는 사실을 말할 뿐이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행복이 아닌 행복감을 위해 산다.을 위해 산다. 행복감의 대상은 다양하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세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생존과 관련한 몸의 욕망이고, 하나는 쾌락과 향유, 즐김과 관련한 자극의 욕망이며 마지막은 명예, 성공 등과 같은 비교의 욕망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돈이 한 번에 해결해준다. 그래서 자본주의, 자본이 주인인 사회이다. 그런데 행복감을 위해 사람들이 기대하는 인생행로는 늘 계단식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안착하면 행복의 첫 번째 계단이다. 취직하면 두 번째, 승진하면 세 번째, 차를 사고, 연애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낳고, 집을 사고, 집 넓히고… 그렇게 계속 가면 저 높은 곳 어딘 가에 행복의 거대한 태양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이렇게 계단식의 길을 올라 실제 행복을 만난 사람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명도 없다. 물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런 길이 없기 때문이다. 허상이다. 실제 길은 이렇다. 명문대에 진학하게 되면 행복감이 충만해진다. 하지만 한 학기가 지나면, 그 많던 행복감이 다 사라진다. 졸업하고 좋은 곳에 취직하면 행복감은 다시 충천된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식어버린다. 동일한 행복감을 지니려면 승진해야 하고, 또 식고, 연애, 결혼, 출산, 집짓고 넓히기 etc. 그러다 이제는 흰머리가 늘어난다. 그렇게 살다 그 어느 날도 행복하기 위해 뭔가를 하다‘돌아가신다.’해 아래 새 것이 없다. 삶은 다양해 보이지만 사실 죽을 때까지 리포트만 쓰다 죽는 것과 같다.


자유
혹자는 행복감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라고 한다. 무소유의 삶이라고,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멈추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생각 멈추기’를 위해 엄청나게 생각한 다. 마음은 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사 비워졌다 해도, “아 마음이 비워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온다. 무념무상의 경지는 뇌의 작동이 멈출 때에만 가능하다. 사실 행복감의 대상들이 그 자체로 나쁜 것도 아니다. 돈도 나쁜 것이아니다. 그냥 교환가치일 뿐이다. 돈이 불행이 되는 이유는 돈을 소유한 이가 불행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바뀌어진다. 갤럭시 1을 향한 마음이 2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차가운 욕조의 물을 다 비운다고 따뜻해지지 않는다. 온수를 틀어 욕조 안에 부어야 한다. 물론 좋은 것을 넣어야 한다. 저녁에 방이 캄캄하다고 그 어두움을 비워낼 수는 없다. 어두움을 비우겠다고 머리를 두드리지 말고 그냥 스위치를 켜면 된다.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은 사라진다. 따라서 중독은 행복이 들어와야 치유된다.


행복
베를린에서 서울까지 경주를 한다고 하자. A에겐 KTX를 타고가라 하고, B에겐 람보지니 스포츠카를 주고, C에겐 제트비행기를 준다. 그런데 나에겐 기어도 없는 짐자전거를 타고 가란다. 공정경쟁이랍시고 너무 한다. 그래도 내가 먼저 도착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타고 가면 된다. 시선이 자유로워진다. 마음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자유는 무관심이다. 어떤 것도 더 이상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 사랑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중독은 중독으로만 치유된다. 그 행복한 중독은 누군가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받을 때, 이해받을 때, 공감 받을 때 발생한다. 그렇게 사랑을 받아야 사랑도 할 수 있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만 줄 수 있다. 그래서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사실 더 어렵다. 사랑은 내가 죽어 너를 살리는 것이다. 그 사랑은 처음 자궁 안에서 경험했다. 임신 전의 여성은 모든 삶이 자신의 행복감 중심이다. 하지만 임신하는 순간 그 전의 행복감을 따랐던 자신은 죽는다. 부정된다. 머리로 하는 모든 생각이 부정되고, 손으로 하는 모든 행위가 부정되며, 두 발로 가던 모든 길이 부정된다. 그리고 자신의 자존심을 모두 부정한다. 그래서 출산 때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 완전한 죽음, 그 때 생명이 나온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오체투지와 같다. 십자가의 형상이다. 사랑을 받은 아기만 엄마 품에서 천국에서와 같은 잠을 잔다. 사랑을 받은 아기는 평화이며, 자유하고, 안식하며 행복하다. 우리가 그 사랑을 그리워하는 이유이다. 실제 모든 사랑은 제한적이라도 그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종교인이든 아니든 그 사랑을 그리워한다. 행복감의 대상들로 아무리 바꾸고 채우려 해도 그 길은 이카루스의 길일뿐이다. 영혼이 그리워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이다. 그 사랑을 과연 누가 나에게 줄 수 있을까? 인간의 사랑은 제한적이다. 사실 모성애도 본능이다. 그래서 자녀를 위해 희생하지만 동일한 강도로 집착한다. 이론적으로 완전한 사랑의 존재는 하나밖에 없다. 신이라 부르든 예수라 부르든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기호는 우리의 기호일 뿐이다. 하지만 그 사랑은 믿음을 전제하니, 보편적이긴 어렵다. 결국 선택이다.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몸은 흥분과 욕망 그리고 소유로만 살 수 있다. 마음은 평안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당신의 영혼에겐 사랑이 필요하다. 그러니 선택하고, 감사하라.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는 감사이다. 하루 24시간 당신 안에 있는 감사의 양을 재보면 당신이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지 알 수 있다. 상대가 나에게 얼마의 사랑을 주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것을 얼마의 감사로 받아들이는 가가 본질이다. 스스로 응아를 닦을 때까지 천 번 이상 정성스레 닦아준 엄마를 생각해보라. 공기가 없으면 인간은 3분이면 죽는다. 자연을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모두 누군가가 당신에게 준 선물이다. 사실 찾지 않아서, 잊고 싶어서 그렇지 세상엔 감사할 것 밖에 없다. 삶은 어차피 선택이다. 그 선택은 내가 원한 것이고, 난 내가 원한 삶을 산다. 행복감을 선택하면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을 살다 가는 것이고, 행복을 선택하면, 난 그 사랑을 받아 감사가 되어 행복을 흘려줄 수 있다. 사실 진리는 간단하다. 빛을 향해 서있는 자에게 그림자는 항상 뒤에 있고, 빛을 등지고 서 있는 자에게 그림자는 항상 앞에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6.04.21 12:21

별없는 밤의 무도회 

-<누구세요?>가 제시하는 정체성에 대한 물음- 




장서란 _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부유하는 정체성

물질적 풍요로움과 가치판단의 기준이 부재하는 현대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부조리극은 불합리속에서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제시한다. 루카치의 말처럼 현대는 길잡이별을 잃은 사람들의 시대지만, 두 다리를 가진 우리는 여전히 걷고 또 걸어야 한다. 부조리극 또한 이러한 시대에 속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현화의 <누구세요?>는 언어의 해체, 등장인물간의 의사 소통 불가능, 극의 시작부에서 나타나는 불가해한 상황이 결 말에서 반복되는 양상을 보임으로써 전형적인 부조리극의 틀을 지닌다. <누구세요?>는 비 내리는 날 같은 집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부부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들은 서로를 이방인으로 인지하고 서로를 추방하려 한다. 남자와 여자는 자신을 입증하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며, 이웃인 남자A와 여자A의 등장은 상황을 더욱 불가해하게 만든다. 남자와 여자는 극의 절정에서 가학적∙피학적인 성행위 이후에 잠시 서로를 부부로 인식한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서는 갑작스런 여자A의 등장과 함께 남자가 여자A를 아내로 인식하고 여자A또한 남자를 남편으로 인식함으로써 등장인물 중 누구의 정체도 밝혀지지 않은 채 끝이 난다.

극의 중심 갈등은 남자와 여자의 갈등인데, 남자와 여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려는 방편으로 전화기와 꽃병이라는 오브제와 극적 공간인 집을 택한다.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기 위하여 오브제와 극적 공간을 독점하려 하며, 이는 곧 서로를 정체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관객이 판단하기로 남자와 여자는 부부 사이로 보이며, 그들은 집 안에서 그들만의 행동양식과 오브제에 얽힌 기억을 공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서로를 부부로 인식 하지 못하는 상황은 관객에게 있어서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키며, 두 사람은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고 확실한 증거인 이름을 끝내 밝히지 않는다. 이들의 논쟁은 1경 (극 안에서의 장)에서부터 쭉 이어지다가 남자A의 등장으로 전환을 맞는다.

남자A는 맥락상 여자의 내연남으로 보이는데, 막상 여자와 마주하고 나서는 여자를 알아보지 못하며, 이는 여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남자A는 남자와 여자를 폭력적으로 위협할 뿐만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공통적으로 지니는 정체성의 상실을 건 드림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 동질감을 자극한다. 이후 4경 말미에서 등장하는 여자A로 인하여 남자A의 정체성은 보다 확실해진다. 남자A는 남자처럼 자신의 직업을 밝히는 데에 그치 지 않는다. 남자A는 여자A의 남편이며, 그것은 여자A의 진술로 설득력을 얻는다. 여자A 또한 남자A의 존재로 인하여 남자 A의 아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남자A와 여자A가 서로를 통해 확립하는 정체성은 집과 물건을 통하여 정체성을 획득하려는 남자와 여자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즉 남자A와 여자A의 존재는 남자와 여자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의 부유하는 정체성을 되돌아보게 하는 대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제 5경

<누구세요?>에서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5경이다. 5경은 1경에서부터 시작되는 남자와 여자의 갈등이 극으로 치달으면서 일시적으로 해소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날씨를 암시하는 빗소리와 함께 사뭇 진정된 두 사람의 대화에서는 1경에 서부터 비효율적일 정도로 늘어지던 논쟁의 이유가 암시된다.


여자 ....... (반짝 물기를 띠는 눈)

남자 ....... (그녀를 보는 시선이 안쓰럽다. 천천히 일어

나 다가가며) 옆에 앉으면 실례가 될까요? 여자 실례가 된다면 안 앉으시겠어요?

남자 ......아뇨.
여자 그럼 대답할 필요가 없잖아요?
남자 가까이 하고 싶어서.
여자 고의적인 실례는 악의로밖에 해석할 수가 없는데 요?
남자 이해를 바라고 싶은 악의죠.
여자 이해란 강요하는 게 아녜요.
남자 전 강요당하고 싶은데요?
여자 미안하지만 난 이해를 강요해야 될 만한 일이라면

애초부터 하지도 않아요.
남자 내 이름을 한번쯤 물어보는 덴 이해를 강요할 필요

도 없을 텐데?
여자 ......? (비로소 남자를 쳐다본다.)
남자 (그녀의 시선을 반기며) 그런 화제라도 없는 것보

다는 낫잖아요?
여자 물으면 대답해주겠어요? 남자 대답하면 믿어주시겠습니까? 

여자 ......아뇨.
남자 .......
여자 어차피 가짜일 테니까.


여자의 마지막 말,“어차피 가짜일 테니까”는 남자에 대한 여자의 불신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극 전체를 흐르는 불합 리와 논리에 대한 불신에서 생겼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조차 논리와 대화로 입증할 수 없었고, 오히려 대화와 논리를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에 대한 좌절을 경험했다. 즉 여자의 말은 두 사람의 갈등은 이성에 기반을 둔 언어로 풀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를 뒤집는다면 남자와 여자의 갈등이 풀리는 지점은 행위(몸)와 감정의 선에서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5경의 말미에서 나타나는 남자와 여자의 사디즘적∙마조히즘적 성행위는 이전 논의에서 극의 잔혹성을 보이기 위한 하나의 시도, 자기 응집력을 회복하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 등 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어디까지나 남자에게만 초점을 맞춘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가 설명하는 아내의 악어 핸드백은 부유함을 나타내는 오브제일 뿐만 아니라 남 자에게 있어서 아내와 동일시되는 공포의 대상이다. 악어 핸드 백이 삼키는 물건은 손거울, 크림, 화장지, 피임약, 묵직한 곗돈이다.이때 피임약과 곗돈을 통해서 남자는 아내에게 성적∙경제적 위축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남자는 깨진술잔으로 다친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희열을 느끼며, 그 피를 자신의 몸에 묻힐 뿐만 아니라 여자에게 묻히며 여자를 욕망한다고 말한다. 피는 온전히 자신에게 속한 것으로 상징되며, 이성과 논리를 통하여서는 찾을 수 없었던 정체성을 남자는 자기 자신이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피-를 통해 발견한다. 여자에게 피를 묻힘으로써 남자에게 아내는 공포의 대상에서 욕망의 대상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디즘 적∙마조히즘적 성행위로 인하여 극은 절정을 향한다.

마조히즘적 주체는 자신의 욕망이 다른 누군가의 욕망에 의해 완전히 부정되고 사라지는 것을 경험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타인의 욕망의 자율성 또한 부정되어 사라져야만 한다. 마조히스트는 동일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파괴하면서 동시에 성취한다. 즉 마조히즘적 주체와 타자 사이에서는 권력과 권력의 부재가 동시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마조히즘은 욕망의 파괴와 그로 인한 권력의 획득, 이항대립의 차이 거부, 차이의 부재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5경에서의 사디즘적∙마조히즘적 성행위로 인하여 6경에서는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부부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관객들은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말다툼 끝에 여자가 밖으로 나간 사이 여자A가 집안으로 들어오는데, 남자는 여자A를 아내로 인식하고 여자A 또한 남자를 자신의 남편으로 인식한다. 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간 후 밖에서는 여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차임벨을 울리지만 문은 열리지 않고 극은 막을 내린다.

결국 어떠한 관계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으며, 모순되고 혼란스러운 상황만이 남는다. 누가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나타나지 않으며, 일대다의 관계가 순차적이고 인과적인 극의 순서와는 달리 근거도 인과관계도 없이 마구잡이로 나타난다. <누구세요?>에서는 극에서 가장 넓은 범위의 기능을 갖는 언어로 인하여 역설적으로 언어에 대한 믿음이 축소됨을 보여준다. 언어는 모든 다른 기호 체계를 대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배우의 언어는 관객의 상상에 인지 가능한 것을 전달하는데, 대사를 통한 맥락으로 추측할 수 있는 정보중 가장 기본적인 정보인 인물에 대한 정체성이 고정되지 않고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다른 작품보다 언어 기호-대사에 대한 믿음은 줄어들고, 준언어적 기호와 몸짓 기호, 배경과 오브제 등과 같은 다른 기호들에 대한 믿음이 중요시된다고 할 수있다. 6경에서 잠시나마 논리적인 상황이 전개되는 이유 또한 대화가 아니라 5경에서 나타나는 두 사람의 성행위, 몸짓 기호에 의한 것이라는 점 또한 이러한 논의를 뒷받침한다.



별 없는 밤의 무도회

앞에서 <누구세요?>는 불합리하기에 부조리극을 전형을 보인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극에 나타나는 불합리와 언어에 대한 불신, 정체성의 혼란은 무대밖의 관객에게 있어서 오히려 현실로 다가온다. 내가 누구인지 말하려 할 때,이름과 말은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꾸만 주변의물체-오브제에 기대어 나를 증명하려고 하나 오브제는 유일하지 않으므로 결국 나는 나 스스로를 정의하지 못하며, 마찬가 지로 타인 또한 나를, 타인을, 또 다른 타인을 정의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유일한 관계 또한 성립하지 못한다. 나 자신을 규명하지 못하기에 타인과의 의미있는 관계 또한 시작할 수 없는 것이다. 타인은 타인이어도 좋고, 또 다른 타인이어도 좋은, 그러므로 아무래도 좋은 관계가 지루한 왈츠처럼 계속해서 반복됨을 이미 현실에서 관객들은 느끼고 있다.

그러나 정체성의 표류에 휩쓸린다 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걸어갈 것이다. 집 안에서는 사람들이 서로는커녕 자기 자신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아도 집 밖에서는 빗줄기가 내리고 천둥이 치고 해가 뜬다. 남자와 여자A가 애써 획득한 정체성을 다시 무너뜨려도 문밖에 서는 여자가 차임벨을 울리며, 정체성과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이성과 언어 반대편에 있는 감성과 행위의 극한까지 달려가는 투쟁이 치열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누구세요?>는 별 없는 밤의 무도회이다. 끊임없이 짝을 바꾸어 가면서 나와 타인의 바닥을 더듬는 이야기인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6.04.21 11:55




프리 제돌: 수족관 돌고래의 생명정치 



남종영_한겨레신문 환경 기자, 영국 브리스톨대학교 인문지리학 석사



미국 플로리다 주의 시월드는 세계적인 범고래쇼로 유명한 곳이다. 동물학대 논란이 제기되어지난 3월 범고래 공연과 번식의 단계적 중단을 선언해 뉴스 전파를 탔다. 이곳에는 ‘돌핀 코브’라는 먹이주기 체험 시설이 있는데, 돌고래를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늘 줄이 길게 선다. 2014년 이곳에 갔을 때 죽은 생선이 올려진 하얀 접시를 나눠주며 가이드가 신신당부한 말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자, 이렇게 세 단계의 동작을 해주시면 됩니다. 돌고래가 오면 턱을 한번 만져주고, 하얀 접시위의 생선을 집어 떨어뜨리고, 다시 머리를 쓰다듬어주세요. 그리고 절대로 하얀 접시를 난간 위로 들지 마세요. 돌고래 눈에 띄면 안 됩니다!”

돌고래는 이 하얀 접시를 절대로 보아선 안 된다. 하얀 접시는 인간이 원치 않는 돌고래의 행동을 ‘격발’하는 하나의 물체다. 하얀 접시를 난간 위로 들어 올리면, 돌고래는 점프해 생선이 담긴 하얀 접시를 낚아챈다. 이 과정에서 관람객이 돌고래에게 손목을 물리는 사고가 몇 번 발생했다. 

재밌는 점은 돌핀 코브의 돌고래들이 굳이 힘써 점프를 하지 않아도 관광객들 가까이 가면 생선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그들에겐 절박하지 않다. 그러나 돌고래들은 인간들이 주는 생선을 ‘수동적으로’ 받아먹지 않고,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방식으로도 배를 채우려고 한다. 동물지리학자 트레이시 워켄틴(Tracy Warkentin)은 이를 ‘동의의 균열’(cracks in consent)혹은 ‘동물의 저항’(animal resistance)로 해석했다. 




“박쥐가 되는 건 어떤 기분일까”

돌핀 코브의 돌고래들은 ‘어포던스’의 예를 잘 보여준다. 어포던스는 이론생물학자 제임스 깁슨(James Gibson)이 정리한 개념이다. 

텅빈 방에 축구공 하나가 덜렁 놓여 있다고 상상해보자. 방문을 열고 들어간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대부분은 공을 들고 두리번거릴 것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공을 통통 튀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공을 던져 ‘벽치기’를 할 것이다. 

‘어포던스’는 동물과 환경 사이에 작용하는 행동 유발성이다. 좁게는 행동을 유발하는 ‘격발 장치’로서의 본능을 우리가 가졌다는 뜻이지만, 넓게는 동물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해 반응하고 상호작용하는 잠재력을 말한다. 

여기서 환경이란 물질적인 모든 것이다. 지구가 만들어놓은 자연적인 모든 것들 - 바다, 하늘, 물, 불, 바람, 바위, 동식물, 인간 등 -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동물이 생산한 모든 것들 – 공, 책, 스마트폰, 배설물 등-로, 쉽게 말하자면 ‘나 이외의 모든 것’이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으로 우리는 환경을 만난다. 반응하고 학습하여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감각기관이 진화해 오늘에 이르렀다. 감각기관은 불균등한 진화는 다양한 종의 진화로 귀결됐다. 동물 사이의 차이로 이어졌다. 개는 냄새만 맡고 자신의 집으로 찾아올 수 있지만, 인간의 후각은 맛있는 음식 앞에서나 가동되는 사치스러운 감각이다. 후각이 발달한 개가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인간과 다르다. 당연히 개의 감각 세계와 그로부터 유래된 인지 체계는 인간과 천양지차다. 어떻게 다르냐고? 경험을 할 수 없으니 알 수 없다. 시각 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인간이 개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언젠가 철학자 토머스 나이젤이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박쥐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박쥐는 어두움 속에서 음파로 세계를 인식한다. 그의 정신작용을 인간이 어떻게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수족관과 어포던스

2013년 남방큰돌고래 제돌이를 시작으로 한국에서는 다섯 마리의 돌고래가 제주 앞바다로 돌아갔다. 이들 돌고래는 바다에서 불법포획돼 수족관에서 돌고래쇼를 벌이던 동물들이었다. 자, 그럼 ‘어폰던스’라는 개념을 붙잡은 채, 야생에서 갓 잡혀온 제돌이가 수족관에 적응하는 몇 날들을 상상해보자. 

제돌이의 감각기관은 야생바다에 맞게 진화되어 왔다. 주된 감각기관은 청각이다. 어두운 바다 밑에서 천리안은 필요없다. 그래서 돌고래는 귀로 본다. 음파를 쏜 뒤 되돌아오는 반송파를 이용해 물체의 모양, 크기, 거리, 질감을 파악한다. 메아리를 이용해 위치를 추적하는 기술, 즉 ‘반향정위’(echolocation)라는 것이다. 시각의 경우 인간과 거의 비슷한 시력을 가졌지만 보조적이다. 돌고래가 눈을 완전하게 쓸 때는 수면 위로 도약했다가 철퍽 하고 수면 아래로 잠수하는 찰나의 순간이다. 돌고래에게 바다 위의 세계는 그래서 전혀 다른 감각기관을 사용하는 외계인의 행성과 진배없다.  

지금 수족관에 잡혀온 남방큰돌고래 제돌이는 자기 생애에서 가장 좁은 공간에 처했다. 무한의 바다를 누비던 몸이 기껏해야 초등학교 교실 한 칸 정도의 크기에 갇혔다. 소독약 냄새가 가득하고 호루라기 소리가 귀를 찌른다. 바다에서 먹던 활어를 먹지 못한다. 인간이라는 외계종이 ‘죽은 생선’을 내던진다. 넓은 바다를 누빌 때 쓰던 근육의 사용을 멈춰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음파 기관이다. 음파를 쏘면 몇 미터 못 가서 콘크리트 벽에 튕겨 나온다. 돌고래 보호운동가인 릭 오배리가 말했듯 “수족관에 있는 돌고래는 마치 사방이 거울로 만들어진 집에 사는 것과 같다”. 반향정위를 위한 신체기관은 꺼두어야 한다. 새로운 환경에서 돌고래가 적응하려면 자신의 감각기관을 좁은 수족관 환경과 동조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야생의 몸’에서 ‘돌고래쇼의 몸’으로

돌고래 수족관은 기본적으로 이윤의 공간이다. 그러나 사회의 감시와 대중의 여론 때문에 동물복지에도 신경써야 한다. 수족관 조련사들은 돌고래가 제값을 지닐 수 있도록 건강하게 관리하면서 아울러 돈을 벌 수 있도록 쇼를 가르친다. 미셸 푸코가 말한 ‘생명정치’(biopolitics)가 수족관에서 행해진다. 인간 정치가 그러한 것처럼 개체 수준과 집단 수준에서 돌고래 몸을 관리하고 개조한다. 

나는 다수의 현장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돌고래 몸의 개조를 개념화해보았다. 수족관에 잡혀 온 야생 돌고래는 ‘야생의 몸’(wild body)에서 ‘수족관의 몸’(captive body)으로 다시 ‘돌고래쇼의 몸’(show body)으로 변환된다. 이 세 단계에서 ‘먹이 지배’(feed control)와 ‘긍정적 강화’(positive reinforcement)라는 두 가지 기술이 돌고래 몸에 투과된다. 둘은 인간이 수족관 돌고래를 다스리는 가장 기본적인 통치기술이다. 다음은 돌고래 몸의 개조 단계를 정리한 것이다. 

1단계__돌고래가 가장 먼저 배우는 게 ‘죽은 생선’(dead fish)을 먹는 것이다. 배고플 때까지 돌고래를 굶긴다. 남방큰돌고래는 대개 이주일 동안 굶으며 저항하다가, 살기위해 죽은 생선을 받아들인다.

2단계__돌고래는 좁은 수족관에 갇힌 충격에서 천천히 헤어나오기 시작한다. 좁은 공간에서 운동하는 법을 익히고 소나를 끄고 소리의 눈을 닫는다. 돌고래는 ‘수족관의 몸’이 된다. 

3단계__돌고래가 죽은 생선을 허락하면, 사육사들은 먹이 지배를 통해 묘기를 가르친다. 원칙적으로 돌고래는 연습이나 공연 중에만 보상용으로 생선을 먹을 수 있다. 수족관에서는 간단한 법칙이 통용된다. “배고플수록 많이 배운다”. ‘돌고래쇼의 몸’이 완성된다.



감금의 아상블라주

돌고래쇼가 벌어지는 수족관을 상상해보라. 공연장과 좁은 내실, 두 공간 사이를 가르는 철문, 시멘트 바닥, 인공 해수, 타깃, 호루라기, 훌라후프, 소독약 냄새, 어두침침한 조명, 웅웅거리는 소음, 죽은 생선을 던져주는 사육사, 왁자지껄한 관중 등이 수족관의 행위자들(actors)이다. 야생에서 잡혀온 돌고래는 감각기관으로 인지하면서 물체들과의 관계를 설정한다. 밥줄을 쥐고 있는 조련사와의 사회적 위계도 확인한다. 어포던스가 발현되어 새로운 몸이 된다. ‘수족관 돌고래’로서 새 삶을 출발한다. ‘돌고래쇼의 몸’이 되기까지 제돌이는 6개월이 걸렸다. 다른 남방큰돌고래도 그 정도의 기간을 거쳐 무대에 선다. 

그러나 수족관은 인간의 전일적인 지배가 이뤄지는 생명정치 공간은 아니다. 그보다는 수족관이라는 공간을 형성하는 물질적, 비물질적 요소로 구성된 네트워크 속에 돌고래가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감금의 아상블라주’(assemblage of captivity)에서는 끊임없이 인간과 돌고래의 ‘밀당’(negotiation)이 이뤄지고 때때로 ‘돌고래의 저항’이 발생한다. 토라진 돌고래가 특정 조련사를 거부하기도 하고, 리더 돌고래의 주도로 일부 묘기를 빠뜨려 쇼를 빨리 끝내기도 한다. 

제돌이는 2013년 다시 바다로 돌아갔다. 거기서 제돌이는 다른 행위자들과 다른 양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바닷물, 해류, 햇빛, 차가운 바람 그리고 최근에는 돌고래 관광을 하러 찾아오는 인간들과 요트들도 있다. 그러면, 두 공간-수족관과 야생-에서 돌고래와 인간이 맺는 관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둘을 비교해본다면 돌고래를 대상으로 한 생명정치의 작동 양식이 더 뚜렷하게 부상할 것이다. 






사진설명 = 서울대공원 수족관 내실에서 ‘스테이셔닝’을 하고 있는 제돌이. 스테이셔닝은 사람이 오면 물가로 다가오는 행동으로, 돌고래가 수족관에 들어와 맨 먼저 학습하는 동작이다.  사진=남종영 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5.12.07 14:43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2015년 공동학술대회 <현대사회에서의 치유와 행복>

 

 

영성과 치유

 

 

 

박병준 _ 국제인문학부 철학전공 교수/철학연구소장


 

인간 본성으로서의 ‘영성’

 

 오늘날‘영성’만큼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는 상징어도 없을 것이다. 영성은 어원적으로‘초월’과‘내재’를 포괄하는 중층적 의미를 지닌 매우 심오한 개념으로서 대체로 신화나 종교학의 상징적 전유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제 영성은 종교에 국한된 상징어로 이해되기보다는 철학적 통찰이 요구되는 인간 본성의 주요개념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심연’으로서의 인간은 본성적으로 끊임없이 자기규정을 넘어서는‘초월의 존재’이며, 이러한 심연과 초월성을 포섭하는 전인적 이해의 단초를 제공하는 핵심 개념이 바로‘영성’이다. 이러한 영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배타적인 신비 속으로 자기를 감추는 비현실적 개념이 아니라 자신과 관계하며, 또한 자기를 타자와 관계시키는 정신의 본질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성은 부정이 아닌 긍정, 절망이 아닌 희망, 불행이 아닌 행복에로 끊임없이 자기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철학상담에서 요구하는‘치유’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철학상담에서 상정하는 내담자의 자기치유의 가능성에 대한 이론적 근거와 정당성을 초월로서의 영성에서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치유와 연관된 영성, 즉‘영성 치유’는 인격의 성숙과 의식의 확장을 지향하며, 정서적 체험을 불러일으키는 데 관심을 두며, 대상과의 관계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현재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인‘인문 치유’와‘마음 치유’를 포섭하는 상위의 심화된 형태의 치유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영성은 정신적 존재인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근본 본성인 초월성에 근거하여 자연적이면서도 동시에 초자연적인 실재에 대한 갈망을 배재하지 않으면서 궁극적인 의미와 가치를 지향하고 추구하게 함으로써 통합적이며 전인적인 삶에로 나아가도록 돕는‘힘’으로 작용한다. 영성은 어원적으로 영혼과 관련하여 생명의 원리로서, 특히‘지성혼’과 관련하여 사물의 이치를 분별하는 로고스의 원리로서 이해되지만, 내용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정신의 초월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영성의 본질을‘생명’, ‘로고스’, ‘초월’의 원리로 규정하고, 이를 현대적 사유 안에서 이해 가능한 방법으로 모색해 보는 것이 이 글의 주된 핵심이다.

 

실존적‘물음’으로 향하는 감성, 이성, 그리고 ‘영성’


 초월로서의 영성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게 하는 지속적인 힘이며, 자신이 마주한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자 삶의 부정적인 경험들을 극복하게 함으로써 통합적이며 전인적인 삶에로 나아가도록 돕는 치유의 힘이다. 물음은 근본적으로 존재에로 향해 있으면서 우리를 절대적인 존재 의미에로 이끌어주며, ‘허무’가 아닌‘존재’에로, ‘존재 부정’이 아닌‘존재 긍정’에로, 그리고‘무의미’가 아닌‘의미’에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제 물음 속에 있는 인간의 영성 자체가 바로 인간에 대한 전인적 이해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감성, 이성 그리고 영성을‘물음’과 연결시켜 논의를 확장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영성의 차원에서 감성은 인간의 삶에 의미 있는 물음을 던지는 주요한 단초가 된다. 실존철학에서 보듯이 인간의 영성적 물음은 사실 감성적인 것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죽음과 허무, 무의미와 부조리, 불안과 두려움 등 실존적 상황에서 느끼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들은 단지 지양되고 제거되어야할 부정적 요소이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을 근본적인 영성적 물음에로 이끌어주는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한다. 우리는 고통과 불안이 가져오는 실존적 물음의 긍정적 의미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이 실제로 실존적 물음을 던지는 순간은 고통과 상처 그리고 좌절과 두려움에로 내몰린 한계 상황이라는 점에서 감성은 물음을 촉발하는 주요 계기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감성이 물음을 촉발하고는 있으나, 감성에서 촉발된 물음은 아직 그 의미가 분명하고 명확하게 주제화 되어있지 않다. 물음의 방향 설정은 감성 보다는 오히려 이성에 의해 주도되어야 할 필요성이 여기서 제기된다. 감정에 내몰린 마음의 상태를 이해하고 그것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감성 자체가 아닌 이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적 사유는 항상 말 혹은 언어를 매개로 물음의 수행 원리로서 작용하지만, 물음의 수행 원리로서의 이성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이성의 한계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비로소 이성을 넘어선 영성의 단계로 도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파스칼은『팡세』에서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고, 진리 인식의 길이 오로지 이성에만 있지 않고 인간의 영적 직감에 있다는 사실을 통찰한 바 있다. 인간의 삶에는 무조건적인 헌신과 희생, 봉헌과 사랑과 같은, 영성 없이 오로지 이성의 합리성만으로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는 숭고한 절대적 가치와 의미들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 절대적 의미를 갖고 다가오는 이런 숭고한 가치들에 대한 물음은 이성의 차원을 넘어선 영성적 물음을 통해서만 그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물음의 무한성이 제시하는 존재 의미 - 전인적 치유로서의 ‘영성’

 

 

 

 인간의 물음이 끊임없이 수행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물음의 초월적 성격을 규정해 주고 있으며, 그 초월성 안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성적인 것에로 정향되어 있다. 물음의 무한한 지평 안에서 인간은 절대적이고 궁극적이며 최종적인 것과 조우하게 되며, 바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영성인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영성은 중단 없는 물음과 함께 하는 ‘정신’에 있다. 인간의 정신의 초월성은 인간이 물음의 실행을 통해 유한한 존재로서 자기를 인식하는 가운데 그런 유한성을 넘어 묻게 되는 물음의 무한한 가능성에서 주어진다. 이성을 압도해 오는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인간은 불안하여 자주 절망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의 실존적 본래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이와 정면으로 대면해야만 한다. 이성을 압도해 오는 사태 앞에서 인간의 정신이 전체 의미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포착하는 그 순간 영성은 드러난다. 인간의 이런 영성은 무엇보다도 무한성과 절대성을 자기 안에 함축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물음 자체에서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인간은 정신의 끊임없는 물음 실행을 통해 내적으로 초월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것과 조우하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이며 무제약적인 절대적인 존재 지평에서 수행되는 물음으로부터 궁극적으로 존재 의미가 밝혀지며, 바로 여기서 인간의 삶에 활력과 생명을 불어넣는‘치유’를 가능케 하는‘존재 긍정’과‘존재 강화’로서의 존재 이해가 일어난다.


 여기서 인간의 정신의 근본 작용인 감성과 이성과 영성이 인간의 치유의 통합적인 내적 원리로 작용하는 철학상담의 방법론을 감성, 이성, 영성의 차원의 ‘3단계 영성 치유’ 방법으로서 ‘전인적 영성 치유’로 명명한다. 이 방법은 인간 본성의 세 원리, 즉 감성, 이성, 영성의 통합적 적용을 통한 인격의 전인적 치유를 목표로 한다. 이는 문제에 직면한 인간이 감성적 물음을 통해 문제의식을 촉발하고, 이를 분별하는 이성적 통찰의 물음 수행과 궁극적인 의미를 좇아 끊임없는 자기 초월을 통해 물음을 지속시키는 영성의 도움 없이는 온전한 치유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겪는 마음의 상처는 정서적 차원의 공감만으로 혹은 사물의 이치를 분별하고 인식하는 이성의 힘만으로 온전한 치유가 이루어질 수 없다. 나의 경험 일체는 그것이 내 영혼에 생채기를 내는 부정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엄연히 나의 일부요 내가 평생 감당해야할 몫이다. 이런 부정적인 경험들로부터 오는 마음의 깊은 상처들은 단순한 감정의 순화나 이성적 통찰의 대화만으로는 온전한 치유가 이루어지기 힘들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를 전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존재 긍정으로서의 영적인 힘이 요구된다.


전인적 영성 치유로의 초대 - 영성 치유의 3단계


 영성 치유의 첫 단계는 감성을 통한 영성적 물음의 촉발 단계로서 이 단계에서는 감정이 어디로 흐르는지 살펴서 왜 그런 감정에 처해 있는지 그 물음을 촉발하고, 또 감정의 순화를 거쳐 이성적 사유에로 나갈 수 있는 내적인 역량을 키우는 단계이다. 이는 상처받는 자가 자신의 감정에 함몰되기보다 감정으로부터 빠져나와 감정과 대면함으로써 자신의 내적 상태를 살필 수 있는 용기를 얻는 단계이다. 그래서 이 단계는 궁극적으로 의미 발견과 의미 부여에로 이끌어주는 실존적 상황과 직결된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유한한 자신의 한계 앞에서 감성이 자극하는 물음은 한계 상황에 맞선 지극히 실존적인 물음일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런 물음 자체가 내담자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 될 수도 있지만, 이를 통해 내담자는 자기 치유를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된다. 영성 치유의 두 번째 단계는 감성에 의해 촉발된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물음의 수행 단계이다. ‘이해’없는치유는 불가능하다. 인간이 뜻하지 않은 불행 앞에서 이를 이해하고자 부단히 몸부림치는 것은 불행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노력의 일환이다. 철학상담의 철학적 대화는 기본적으로 이런 이성적인 물음에 기초한다. 물론 이 단계가 감성을 전혀 배제한 채 이성만으로 이끌어진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철학상담의 진정한 철학적 대화는 감성과 이성이 상보적으로 작용하는‘공감적 대화’가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영성 치유의 세 번째 단계는 궁극적이며 최종적인 의미를 좇아 지속적으로 물음을 던지는 영성단계이다. 영성 치유의 본질은 인간의‘초월성’과 인간의 ‘근본 물음’의 수행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인간을 치유에로 이끄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 안에서 인간의 자기 긍정을 가능하게 하는 절대적인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신적 존재인 인간은 그 본성상 끊임없는 물음 실행 속에 있는‘묻는 존재’이다. 이 물음은 근본적으로‘존재 물음’을 향해 있다. 존재 물음에는 절대적인 존재 긍정을 통해 모든
부정을 넘어섬으로써 자기 안에 일체의 허무를 이기는 영성이 내재되어 있다. 철학상담의 방법으로서의‘전인적 영성 치유’의 핵심은 감성에서 촉발되고 이성에 의해 주도적으로 물어지는 문제 제기와 문제의식을 존재 긍정의 영성적 물음에로 포섭하는데 있다. 바로 이를 통해 내담자는 자신의 삶의 궁극적 의미에 도달하게 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문제를 의미 전체 안에서 발견할 때 자기 치유적인 이해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철학상담의 모든 철학적 대화가 기본적으로 지향해야할 핵심 요소이자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내적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영성은 종교를 떠나서도 이해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삶의 요소가 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