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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호] <서강논문상> 우수 논문 소개- 장애의 사회적 쓸모 - 장애에 대한 문화구성체적 접근 본문
장애의 사회적 쓸모 - 장애에 대한 문화구성체적 접근
지소연 _ 사회학 석사 졸업
장애인은‘감동포르노’배우?
호주의 장애저널리스트 스텔라 영(Stella Young)은 TED 강연에서 선천성 희귀병을 앓아 휠체어 생활을 하는 자신의 일화를 소개하였다. 선생님이었던 그녀가 교과 수업에 들어가면 많은 학생들은 그녀의 수업 대신 역경에 가득 찬 인생담을 듣고 싶어 했다. 그녀는 이러한 장애극복담에 대한 비장애인들의 태도가 장애인을 감동 포르노(inspiration porno) 배우로 만드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장애극복담은 보통 비장애인의 규율을 장애인이 성공적으로 이행한 경험담을 의미하는데,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일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는 인식은 장애인들을 감동 포르노 배우로 대상화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장애인들은 비장애인과 동일한 신체∙정신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그리고 장애인들은 이에 대해 한 목소리로 사회적 배려(경사로 설치나 저상버스 운행 등)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장애인에게 비장애인과 똑같은 역
할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장애가 손상과 장애, 핸디캡으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구성물이라는 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스텔라 영의 장애를 예로 들어보자. 기침을 하다 뼈가 부러질 정도로 약했던 그녀는‘심리∙생리∙해부학적 구조나 기능의 상실 또는 비정상성’인 손상(impairment)된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약한 뼈로 인해 걸을 수 없는 건 장애(disability)이다. 장애는 손상으로부터 연유하여, 인간으로서 정상이라고 간주되는 방식으로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의 결여로 정의된다. 그녀가 걸을 수 없어 엘리베이터가 없는 학교에 취직할 수 없다면 이는 핸디캡(handicap)이다. 그녀는 손상이나 장애에도 불구하고 비장애인과 동일한 교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은 그녀의 정상적 역할 수행을 막는다. 이러한 개념 구분 때문에 핸디캡 극복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극복담’을 반대하면서도 손상에 대한 인정이나 장애에 대한 배려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3가지 개념 구분을 통해 장애인은 신체∙정신적 고통과 사회적 고통 두 가지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의 복지 시스템부터 개개인의 극복담까지 모두 장애인의 신체∙정신적 고통에만 관심이 있다. 그로테스크하게 뒤틀린 몸은 나보다 약자라는 사실을 항상 주
지해주며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 글에서는 장애인들의‘선정적인’몸이 아닌 사회적 고통에 관심을 갖고자 한다. 대상화, 타자화에 맞서 장애인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고통을 어떻게 합리화하는지, 부당한 핸디캡에 대해 어떠한 문화적 양식으로 대처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장애의 합리적 재구성
근대 이전의 종교는 사명을 감당하는 방식으로 고통을 해소하게 하는 내적 귀인을 통해 전통 지향적 인간형을 형성했으며, 명백히 규정된 역할체계를 제공해주었다. 반면 현대사회에서는 종교와 같은 엄격한 규율 대신 스스로 사회적 규준을 인식하고 자아정체성을 수립해야 한다. 개인들은 자신의 일상을 스스로 성찰하며 대처방식(coping strategy)을 직접 선택하는 과정에서 귀인의 양식이 결정된다. 보통 각자가 가진 귀인의 방향에 따라 사회적 고통을 포함한 자아정체성의 설명 방식을 제공해주는 기관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인다.장애인의 경우 3가지 형식으로 자신의 장애를 합리화한다. 첫째, 정상화담론이다. 이와 같은 담론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장애 발생과 회복을 스스로의 책임으로 생각하며 재활을 통해 비장애인과 같이 정상화되려 한다. 사회적 차별과 높은 진입장벽의 원인을 자신의 의지나 능력 부족과 같은 개인 내부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내귀인자들이다. 사회가‘정상인이라고 규정한’기준에 충족하기 위하여 자신의 신체를 비장애인과 동일한 상태로 만들거나, 직업적 능력을 배양하여 사회적 존재가치 를 증명하려한다.
종교도 장애의 원인과 합리화에 기여한다. 이들은 재활담론 대신 윤리적 당위를 통해 자신의 고통을 해석하며 신이 준 특별한 사명에 치중한다. 예컨대 개신교에서는 신이 장애를 주신 이유를 생각하고 개인의 소명의식을 다지는 방식을 장려한다. 장애로 인한 고통의 해소방식이 개인 내부에 있다는 측면에서
이 방식 또한 내부귀인이다. 마지막으로 외귀인 성향일 경우 운이나 국가 정책과 같은 외부적인 상황을 고통의 이유로 본다. 장애활동가들은 사회적인 시스템의 미비나 비장애인에게 맞춰져 있는 사회적 기준이
고통을 유발한다고 보며 이에 저항하기 위해 다양한 장애해방 운동을 수행한다. 하지만 모든 외귀인자들이 장애해방운동에 뛰어들 수는 없다. 운동에 헌신하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나 기관에서 제공하는 재활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하지만 장애를 갖게 된 원인을 나에게서 찾지 않는 장애인들도 존재한다. 혁명적 저항을 하기엔 좀 부담스럽거나, 복지 시스템이 미비해 스스로 문제 해결을 하지만‘내 탓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 이들은 장애에 대한 세상의 시선에 대해 일상적 전복 전략을 수행한다. 핸디캡에 대한 일상적 저항 장애인들은 일상적으로 쿨함, 스스로의 고통에 대한 해학적 자조, 연기력을 통해 사회상황에 대한 전복적 순응전략을 취한다. 쉽게 말해 후술할 전략들은 장애로 인한 부당한 핸디캡에 대해 저항적 태도를 취하지만 직접적 항의가 아니라는 점에서 순응적 측면이 있다. 우선 쿨은 권위자에 대한 거부를 표현하기 위해 개인이나 소그룹이 선택한 대립적 태도를 의미한다. 이는 필히 반항적인 태도를 동반하며 주류문화에 저항적인 성격을 띤다. 쿨함은 공동체 전체의 움직임에 편승하는 것이 아닌 아예 차별의 원천과 개인적 거리를 둔다. 예를 들어 아스파거 증후군을 가진 루크 잭슨은 13세에 <별종, 괴짜 그리고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책을 썼다. 보통 아스파거 증후군의 경우 언어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의사소통이나 감정교환에 대해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저자는 오히려 아스파거 증후군이 아닌 사람들의 비논리적인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결핍적 관점에
서 벗어나 장애를 차이로서‘쿨하게’인정한다. 장애에 대한 위상적 전복방식을 쿨이라고 한다면, 플라넬링
(flanneling)은 과장된 말이나 행동, 충성 등을 통해 자신의 경멸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넬링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유머나 아이러니, 회의나 냉소를 통해 자신의 반항감을 표출한다. 장애인의 경우 아래의 사례처럼 스스로를 유머의 소재로 삼거나 냉소하는 경우가 있다.
이 교수는 시각장애인이었다… 학기가 거의 끝나갈 어느 날 이 친구가 저녁을 한 번 사겠다고 해서 함께 음
식점에 갔다. 이 친구가 가끔 가는 횟집에서 먹고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던 중 이 친구가 최근에 보건복지부 장관하고 같이 청와대 들어가서 대통령과 대화를 나눴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장관은 대통령 앞이라 아무 말 못하는데 자기는 할 말 다 하고 왔다고 뿌듯해했다. 그래서“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이 친구가 천연덕스럽게“내가 눈에 뵈는 게 있냐?”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듣자마자 긴장이 탁 풀리면서 나도 모르게 음식점이 떠나갈 듯이 웃었다. 이 친구는 진짜 보이는 것이 없지않은가?“ 난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어.”사실 이런 표현은 대개 눈이 보이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로 보이지 않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우스워져서 크게 웃었다…편하게 웃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접시에 남은 마지막 회 한 점을 이 친구가 집어먹었다. 그래서“마지막 남은 걸 왜 네가 먹냐?”그랬더니 이 친구가“내가 눈치가 있냐?”고 대답을 해서 또다시 박장대소를 했다.
위의 글에서 장애가 하나의‘차이’로 위상이 격상되어야 한다거나, 장애에 대한 사회 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인식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이 교수는 자신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유머의 소재로 삼고 있다. 자신에 대한 자조적 유머는 장애에 대한 저항적 순응의 전략일 수 있다. 장애인들은 보통 자신의 장애가 유머의 소재거리가 되면 불쾌해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교수는 스스로의 심리적 고통을 고통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이를 유머의 소재로 씀으로서 상대가 웃을 수 있는 편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유머는 사회적 상황에 대한 고민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수용과정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쿨함, 유머와 같은 일상의 전략들을 장애인을 대상화하려는 사회적 인식에 대해 정면으로 항의하지는 않는 다는 점에서 장애해방운동과는 다르다. 오히려 장애가 있다는 상황이 비정상적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기 때문에 쿨함과 유머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들은 장애의 책임을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면으로 항의하기엔 개인적 소모가 크고, 정상화담론은 마뜩찮다. 때문에 장애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다칠 수 있는 자존감과 품위를 최대한 지키기 위해 전복적 순응전략을 사용한다.
장애의 사회적 쓸모
앞서 우리는 장애인들이 사회적 인식에 대해 대응하는 전략들을 살펴보았다. 장애인에게 장애로 인한 사회적 고통은 최대한 합리화해야 하는 대상이자 어떤 방식으로든 방어해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사회적 인식으로 인한 타자화, 소외와 같은 고통도 나름의 쓸모가 있다. 장애인들의 수기를 읽어보면 장애로 인해 스스로에 대해 성찰했다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비장애인에게는 이러한 태도가 뭔가 나와는 다른 어떤 걸 깨달은 사람 같아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신체적인 고통만
이 스스로의 성찰의 도구로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같은 종류의 장애가 아니고서야 서로의 신체적 고통에 대해 완벽히 공감하지 못한다. 절름발이인 필자도 눈이 보이지 않는 고통을 잘 이해하기 힘들다. 그리고 장애 유형에 따라 신체로 체감하는 고통보다 장애인이라서 당하는 사회적 고통이 더 클 때도 있다. 때문에 정신이나 신체가 불편하니 서로의 장애로 인한 고통을 잘 공감하는 것 같고, 잘 뭉치는 것 같다는 생각은 오산이다. 장애인들은 모두 포르노 배우로 내몰리는 상황을 공감하기에 서로의 사회적 고통을 이해한다. 고통에 대한 공감이 사회적 집단으로서‘장애인’이라는 범주가 생존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통을 통한 공감과 연대가 바로 장애의 사회적 쓸모다. 이 논의는 이들의 신체적 고통이 당연하다거나 쓸모 있다는 이야기와는 다르다. 쓸모를 취하기 위해 장애인들이 계속 타자화된 상태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다만 핸디캡에 대한 문화적 해소방식을 통한 성찰, 상대에 대한 공감을 통해 서로의 고통에 한 층 다가가고 연대하는 모습은 돈 없음, 빽 없음과 같은 다른 사회적 고통에도 적용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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