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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대학원 신문사
[163호] 따옴표가 아닌 물음표 본문
유지연 기자
지난 9월 대통령의 해외순방 중 방송 카메라에 포착된 비속어 논란 때문으로 전 국민이 카오스 상황에 빠졌다. 해당 영상 속 발언이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으로 들리지 않았느냐는 대통령 홍보수석의 말로 인해 전 국민은 ‘바이든 날리면’ 수수께끼를 풀어야 했다. 적절한 시기에 던져진 수수께끼 질문에 언론은 가장 안전한 방식을 택했다. 다수 언론이 ‘바이든’과 ‘날리면’을 병기하거나, ‘날리면’으로 쓰거나, 양측의 입장이 대립하는 상황 자체를 뉴스로 전했다. 대통령실은 ‘미끼’를 던져분 것이고, 언론은 고것을 확 ‘물어’분 것이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언론은 거대 세력이 띄운 장기판의 말로 쓰였다. 홍원식 동덕여대 교양학부 교수는 “정당 대변인, 기업 홍보담당자 또는 정치패널 등은 사실 자체보다는 사실에 대한 주장이 있었다는 것 을 곧 사실로 간주해 보도하는 우리 언론의 객관주의 보도 관행을 능숙하게 자신의 전략적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주장이나 상황 자체를 객관적으로 전하는 언론의 객관주의 보도 관행을 잘 알고 있는 정부 측에서 보도 양상의 변화를 노리고 이 같은 대응을 했다는 취지이다(박서연, 2022).
또한 언론이 대통령실의 요청을 수용한 상황에 관해 “진보 보수의 갈등 구도라기보다는 언론의 효율적 정파성이 관료적 사실 체계의 일부로 작용한다”라고도 분석했다. 언론이 정치적 목적 못지않게 취재 비용을 최소화하는 상황에서 취재에 나서기보다는 반박 입장을 전하는 것이 효율적이었기에 이같은 선택을 했다는 지적이다. 이는 언론 스스로 전문적이고, 독립적이고, 스스로 책임지는 존재이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이때 언론이 할 수 있는 일은 공정한 ‘척’이다. 기계적 중립이라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이유이다.
이러한 현상의 중심에는 한국 언론의 객관주의 관행이있다. 객관주의는 저널리즘의 주요 원칙이나 전문직으로서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객관주의 개념은 왜곡되거나 치우치기 쉬운 기자들의 인식이나 경험을 뛰어넘어 심층적인 취재와 판단을 통해 객관적인 사실을 추구해야 한다는 책임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언론 현장에서는 이것이 스스로의 판단을 유보하고 서로 다른 의견과 주장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형식적 객관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언제부터 한국 언론에 객관주의 저널리즘이 반영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언론학계에서는 한국 언론의 객관주의 저널리즘은 진실의 전달과는 무관하게 형식주의를 따르는 데에 머물렀다는 비판이 지속되어 왔다(유선영, 1995). 또한 화제가 되는 이슈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고, 이에 따른 위험을 줄이기 위해 형식적 객관주의를 이용해왔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받아쓰기 기사, 이른바 ‘따옴표 저널리즘’은 언론의 대표적인 부정적 관행이다.
언론은 사실을 전달해야 한다. 하지만 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일은 어렵다. 사실의 대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고, 사실로 판단할 수 있는 증거들을 수집해 사실의 윤곽을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쉽게 전달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사실에 대한 주장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이다. 따옴표라는 무기를 사용해, 사실을 확인했음이라는 명분을 전달하는 행위가 이른바 받아쓰기 보도로 불리는 ‘따옴표 저널리즘’이다. 정치인이나 유명인의 말이나 SNS 등에 올라온 글은 현실적으로 존재했기에, 그 내용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언론은 이를 전달하고 책임은 지지 않는다. 심지어 요즘엔 이 따옴표 안에 들어간 내용이 기사의 제목으로 그대로 등장하는 실정이다.
기사에서 취재원의 발언을 제목으로 사행하는 것은 언론의 판단을 배제한 기사 내용의 일부를 제목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객관주의를 실현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언론사의 경향성을 드러내는 한 방법이라는 비판을 받는다(이준웅, 2007). 제목은 기사 전체의 내용을 모두 아우를 수 있어야 하지만 특정인의 발언을 인용할 경우 기사를 왜곡할 수 있다. 이럴 경우 언론사가 강조하고 싶은 내용을 두드러지게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언론사의 경향성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따옴표 발언을 활용한 제목은 객관적 사실을 보도하면서 언론사의 주관을 반영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따옴표 저널리즘은 객관적인 사실을 보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의견을 감추는 표현이다. 현실의 진실한 모습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자나 언론이 특정 대상을 비난하거나 혹은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싶을 때, 자신의 의도를 감추려는 하나의 전략에 불과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언론의 ‘공정성’을 해치는 행위다.
무수히 많은 객관적 사실들이 체계적이고 촘촘히 쌓여야 정확하고 진실한 보도가 가능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단편적이고 맥락을 이탈한 발언을 ‘사실’로 간주하고 이를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언론의 객관성, 공정성을 해치는 행위다. 외국의 언론이 취재원으로부터 얻은 정보들을 가능한 따옴표로 인용해 처리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누군가가 그러한 주장을 했다는 사실’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 발언에 따옴표를 붙여 보도해주기 위해서는 기자와 데스크에 의한 고민과 판단이 요구된다. 그가 하필 이 시점에서 그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유는 무얼까? 그의 주장이 대중에게 노출되고 전달될 가치가 있는 걸까? 나는 그 주장이 뉴스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흥미와 시선을 끌 소재가 된다고 판단하는 걸까? 이와 같은 고민을 거치지 않은 따옴표 속 발화는, 사실과 주장을 분별하고, 세상의 정보에 뉴스 가치를 부여하여, 사회적으로 상관성 높은 정보를 전달하는 저널리즘 행위의 결과물이 아니다(정준희, 2019).
미국 언론에는 ‘기계적 중립’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50대 50의 무비판적 중립을 ‘거짓 동등성’ 또는 ‘거짓 균형성’으로 규정하고 이를 경계한다. 겉보기에는 그럴듯하게 균형을 맞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런 행위 자체가 거짓이고 사기라는 말이다. 이런 행위는 시청자를 속이고, 기자 자신을 속이기 쉽다. 사실보도에 충실하고 있다는 자기 정당화에 빠져들 수 있고, 이는 기자 스스로 최소한의 윤리적 양심을 지키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온다. 사실을 검증하지 않으니 정치인이나 정부 관료들은 거짓을 되풀이하게 된다. 토머스 패터슨 하버드대 교수는 그의 저서 <뉴스 생태학>에서 “정치인의 거짓말을 전달함으로써 기자는 사기에 연루된다. 그 주장은 공론화되고 뉴스에 나옴으로써 신뢰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들이 사실 확인이나 교차 검증, 더 나아가 언론인으로서의 해석과 판단을 회피할 경우, 언론은 그저 권력자의 주장을 반복하는 확성기로 전락한다. 이로 인한 책임은 정치인, 관료, 언론인 그 누구도 지지 않는다. 결국 피해는 오롯이 시민의 몫이 될 뿐이다. 언론은 따옴표가 아닌 사실 확인을 위한 물음표를 찍어야 한다. 그래야만 ‘바이든 날리면’과 같은 촌극이 되풀이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박서연(2022). 언론학자가 바라본 ‘바이든’ ‘날리면’ 보도의 진짜 문제는. <미디어 오늘>
유선영(1995). 객관주의 100년의 형식화 과정. <언론과 사회>, 10권, 86-128.
이준웅(2010).한국 언론의 경향성과 이른바 사실과 의견의 분리 문제. <한국언론학보>, 54권 2호, 187-209.
정준희(2019) 관행이란 이름의 범속함, 그 악의 평범성. <방송기자> 47권,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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