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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대학원 신문사
[157호] 용산기지가 국가공원이 되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다? 본문
하 태 현 서강대 신문방송학 석사
용산기지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서울시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는 용산기지는 ‘금단의 땅’으로 소개된다. 용산기지는 그간 높은 돌담에 둘러싸여 서울 시민들에게 수십 년간 공개되지 않던 미지의 땅이었다. 한편, 용산기지가 서울 시내의 빈 공간처럼 사유되는 가운데서도 아무 기표가 없는 부지는 아니었다. 그곳에 대해 알지 못하는 만큼 사람들의 상상은 불어났다. 그렇게 용산기지는 각종 담론들이 각축을 벌이는 이데올로기적 공간이자 이미지의 공간이 되었다. 용산기지에 대한 남다른 관심은 단연 부지의 규모에서도 기인한다.
남산 아래의 둔지산 자락에 위치한 용산기지는 무려 291만m²(약 90만평)에 이를 정도로 그 규모가 방대하다. 용산기지의 규모는 여의도만 한 면적이자, 축구장 400개가 들어갈 정도로 크고, 넓다. 용산기지 외부에서 바라보는 기지의 모습은 벽돌장벽뿐이다. 이 장벽을 지하철역 4호선이 지나는 이촌역, 신용산역, 숙대입구역이나 6호선이 지나는 삼각지역과 녹사평역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은 그 규모를 가늠케한다. 심지어 녹사평대로나 이태원로, 전쟁기념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전경에서도 용산기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용산에서 용산기지를 발견하기란 크게 어렵지 않다. 어쩌면 이와 같은 일상적인 발견 속에서도 익숙함과 별개로 용산기지는 미국의 땅으로 타자화되면서 더욱 더 '우리'의 공간이 아닌 것으로 구별지어졌는지도 모른다. 동시에 미국의 군기지라는 특수한 성격은 용산기지가 서울 시민의 공간으로 사유되기 어려웠던 맥락이기도 하다.
용산기지에 대한 관심이 불붙기 시작한 것은 2020년 8월에 용산기지 동남쪽에 위치한 미군 장교숙소 부지가 전면 개방되면서부터이다. 당시 정세균 국무총리는 기지 개방 행사에서 용산기지가 ‘우리 땅이지만 우리 땅이 아닌 곳’이었다며 이제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미래의 용산을 상상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이는 “용산기지가 공원이 되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다”는 기대를 증폭시켰다. 언론은 용산기지에 생길 공원이 서울의 지친 현대인을 휴식하게 하고, 나아가 용산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며 희망찬 메시지를 전달했다. 특히 정부 산하의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은 용산기지가 116년이라는 세월(2020년 기준)속에서 식민과 냉전의 아픈 역사를 지나 마침내 용산기지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라 소개했다. 이는 얼핏 보면 맞는 말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전쟁을 거치며 일본군과 미군이 주둔했던 용산기지의 역사는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떠올리게 한다. 용산기지의 역사가 어떠하기에 아픈 역사를 지녔다고 하는가. 또한 용산기지는 정말 일본과 미국의 기억만을 간직한 공간인가. 그리고 용산기지는 어떻게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다고 말하는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곱씹어보는 것이 이 글의 주된 목적이다.
용산병영과 용산 개리슨
먼저, 용산기지 역사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필요하다. 현재 용산기지 터가 군부대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군이 용산에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을 설치하면서부터다.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용산에 총 두 차례에 걸쳐 기지를 건설했다. 제1차 병영공사(1906~1913) 시기에는 용산기지 안에 군사령부부터 보병 연대본부, 병원, 위수감옥 등 주요 시설들이 구축되었다. 이전까지 용산은 한강 인근의 항구에 불과했지만, 일본군의 공사 이후로 용산은 군사 주둔지로 거듭났다. 제2차 병영공사(1915~1922) 시기에는 1차 공사 규모에 비해 두 배 이상으로 기지 공간을 확장했다. <용산기지의 역사>를 펴낸 신주백과 김천수는 일본군이 용산을 기지화하게 된 데에는 대륙침략을 위한 전진기지이자,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한다는 것을 과시하며 전시공간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라 분석한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때 용산기지에 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와 용산총독관저(現 121병원 부지)가 있었다는 점은 용산이 일본군의 지휘소이자 상징적 공간임을 뒷받침한다. 2차 공사 때까지 지어진 용산병영의 건축물과 공간은 1945년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1945년에 일본군의 항복 이후에 용산기지를 점거한 미군은 용산병영을 캠프서빙고(Camp Seobinggo)라 불렀다. 미군은 일본군의 목적과 달리 용산에 잠시 주둔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본군의 시설을 철거하기보다는 일부 개조해 사용했고, 이에 따라 용산기지의 경계도 크게 바꾸지 않았다. 이와 같은 미군의 기지 활용 방식은 현재 용산기지 안에 일본의 근대건축물들이 남겨진 배경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미군이 용산기지를 전혀 신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용산기지 안에 주거용 퀸셋과 세탁실을 여러 동 건설하고, 문화생활을 위한 극장과 클럽, 예배당 등을 건설했다. 심지어 1946년에는 미군 자녀를 위한 미국인 학교가 세워지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미군은 한국을 철수하고자 하였으나, 1950년에 일어난 6.25 한국전쟁은 미군이 용산에 주둔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전쟁 이후 미국은 미8군 사령부를 서울에 남겼고, 이른바 ‘용산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용산기지를 재건 및 재배치하였다. 미군이 용산기지를 ‘용산 개리슨(U.S Army Garrison-Yongsan)’으로 부른 것도 이 시기부터이다. 기존의 명칭인 캠프에서 개리슨으로 불리게 된 것은 다름 아닌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의 최고사령부의 지휘소가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1953년에 완성된 용산기지에는 식당과 체육시설, 도서관과 이발소, 볼링장과 수영장 등 문화복합시설들이 들어섰고, 이로써 서울 안에 작은 미국이 만들어졌다. 미군은 용산을 두고 미국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는 집(home away from home)이라 부르며, 용산에 대한 애착을 보이기도 했다. 이들에게 용산기지는 하나의 작은 미국 마을과 다름없었다. 1953년부터 2021년까지 약 68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용산기지는 병영과 마을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하나의 거대한 도시로 기능했다. 용산기지에서 태어난 미군 자녀에게 이 장소가 자신의 고향(Hometown)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점은 용산기지가 군사기지에서 생활 주거지역으로 성격이 변모했음을 지시한다.
용산기지는 타자의 공간인가
용산기지의 역사를 짚어보면, 한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용산기지에는 한국과 서울 시민의 이야기가 아닌 일본과 미국의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용산기지는 정말 일본과 미국의 기억만을 간직한 공간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앞서 설명했듯 한국전쟁 이후 기지가 재건될 때, 용산기지 시설을 보수했던 한국 근로단(KSC: Korean Service Corps)의 역할도 컸기 때문이다. 당시 미8군 사령관은 “만일 한국 근로단이 없었다면 최소한 10만 명 정도의 미군 병력을 추가로 파병하여야만 했을 것”이라 말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해방 이후의 용산기지 공간에는 한국인들의 경험이 묻어있다.
또한 지금까지의 용산기지 시설의 유지와 문화복합시설의 운영은 한국인 근무자들이 맡고 있다는 사실 역시 주목할 만하다. 미군기지의 한국인 노동자들은 미국 땅에서 묵묵히 일해 왔지만, 종종 보이지 않은 존재로 여겨졌다. 한국인 군무원뿐만 아니라 매점 및 식당종업원, 택시운전사, 재단사, 은행원, 소방관, 초등학교 선생님 등 용산기지에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근무하고 있다. 용산기지를 포함해 주한미군 기지에 근무하는 한국인 노동자의 수가 총 1만 2500명이라는 점은 용산기지가 결코 미군만의 공간은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2017년에 용산 미군기지의 역사문화 유산을 보존하려는 취지에서 등장한 ‘용산 레거시(Yongsan Legacy)’라는 전문가 그룹은 용산기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군부대로만 보이는 용산기지가 누군가에겐 삶의 터전이자 고향일 수 있음을 드러냈다. 특히 용산기지 캠프 킴(Camp Kim)에서 33년 동안 일한 김원식 씨의 이야기는 용산기지 내부의 한국인들이 그곳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드러내는 사례다.
용산공원에 새로운 상상을 더하자
용산기지가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다. 언론과 전문가들은 기지 부지 반환과 관련해 여러 관심사를 표출했다. 기지 내 환경오염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부터 건축물은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에 대한 방안 언급은 1990년에 한·미간 용산기지를 이전하기로 각서를 체결하면서부터 줄곧 이어오던 논의였다. 최근 서울시장으로 당선된 오세훈 시장은 용산기지 지하에 도로를 건설하자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내 집 마련의 꿈이 점차 커지는 형국에서 공공주택을 짓자는 논의도 피어오르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논의 속에서도 구체성을 얻고 있는 흐름은 단연 공원화 논의다. 대한민국 정부는 국가주도로 용산기지를 공원으로 조성하겠다고 2005년부터 준비해왔다. 지난 10여 년간,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시행되고, 정비계획을 세우는 등의 노력 끝에 2019년에는 용산공원조성추진위원회가 구성돼 용산기지 공원화에 속도를 가하고 있다. 이들은 용산공원이 역사문화생태공원이자 최초의 국가공원으로 구성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목표를 구체화하기 위해 국토교통부와 서울시, 그리고 한국주택공사는 ‘용산공원 국민참여단’ 300명을 모집해 올해 6월까지 용산공원 기본설계(안)에 대한 의견을 개진한 뒤 국민 권고안을 마련하도록 요청했다. 용산공원은 서울이 받아들일 가까운 미래다.
그러나 역사문화생태공원을 조성하는 것이 정말 시민을 위한 최선의 선택일지는 점검이 필요하다. 역사의 보존과 생태 복원, 그리고 문화적 공간과 휴식 공간을 확보하는 것은 시민과 국가 차원에서 분명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다만, 최초의 국가공원을 조성한다는 명목 하에 공원이 전시적 성과주의에 매몰되거나, 숙고가 아닌 속도에 의해 공원이 조성된다면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자칫 파편에 대한 이해를 갖고 용산기지를 공원으로 조성한다면 생태주의를 앞세운 난개발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용산기지 건축물의 이해, 기지 안 개인의 생활사, 미국과 한국의 경계에서 나타난 혼종적인 문화와 부산물, 그리고 서울 지리와의 연결과 분리 구조 등은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용산기지 공간을 이해하기 위해선 조경과 도시계획의 관점에 함몰되지 않고, 다양한 학제의 연구와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며, 다층적인 시민 사회의 끈질긴 논의 역시 요청된다. 사실, 기지의 공원화가 한국 사회에서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이미 한국사회는 부산의 하야리아부대를 부산시민공원으로 서둘러 조성하는 바람에 오염된 공원을 가지게 된 안타까운 과거가 있다. 그렇기에 더욱더 시민 참여와 소통은 중요성을 가진다. 시민을 위한 공원이라면 그 공원은 어떠해야 할지 고민이 필요하다. 용산뿐만 아니라 일본군 주요 부대가 머물렀던 인천, 대구, 대전, 부산의 기지를 사용했던 미군은 일본군이 사용했던 공간과 건축물을 재활용해 지금까지 그 역사를 전해왔다. 단지 근현대의 역사를 담지하기 때문에 그 공간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만은 아니다. 어제의 이야기를 오늘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의 논의다. 이제 한국 사회는 미군기지가 전달하는 역사적 유산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선택할 기로에 놓여있다. 그간 한국의 도시 역사에서 재건축과 도시계획으로 인해 사라진 역사를 기억한다면, 이젠 용산공원에 새로운 상상을 더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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