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07.05 20:25

게임중독 논란에 대한 놀이학(Ludology) 연구자의 소심한 목소리

 

전 석 _ 숭실대학교 글로벌미디어학부 겸임교수

 

2019년 5월 25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된 72차 세계보건기구(WTO) 총회에서 ‘게임중독(게임 과몰입, 게임 이용 장애)’에 대한 질병분류가 통과되었고, ‘6C51’이라는 코드로 정신, 행동, 신경발달 장애의 하위 질병으로 분류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에 대한 논쟁이 뜨겁게 이루어지고 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대한민국은 게임중독에 대해서 민감하고 강렬하게 반응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 우리나라는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게임의 열정적인 이용자인 동시에 높은 교육열과 더불어 치열한 경쟁을 요구하는 교육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진 않은 현실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교육과 게임은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위치에 있다. 불행하게도 최근에는 사회적, 정치적, 철학적으로 세대 갈등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런 극한 상황에 게임중독은 세대 간의 대립과 갈등을 쉽게 치환할 수 있는 포괄적인 주제이기 때문이다.

현재 사회 전반에서 게임중독에 대한 해석과 주장이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게임 이용자들이 왜 그렇게 몰입하게 되는지 또는 도대체 게임이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먼저 이해해야 한다. 당신은 ‘게임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너구리’나 ‘갤러그’와 같은 예전 오락실 게임이나 우리나라에 선풍적인 인기였던 ‘스타크래프트’ 정도가 떠오르거나 게임이 다 비슷한 것들이라고 생각된다면, 이 논의는 한발짝도 나갈 수 없다. 결국엔 끊임없이 다른 주장을 반복하며 소비적인 논쟁만 하면서 아무런 성과도 없이 마치게 될 것이다. 이제는 열린 마음으로 게임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할 시점이다.

현재의 디지털 게임은 인류학, 역사, 문학, 디자인, 수학, 정보통신기술, 경영, 마케팅, 등을 비롯한 모든 학문의 성과가 매우 복합적으로 구성된 총체적인 창작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불어 게임은 단독으로 콘텐츠이자 작품인 동시에 미디어로써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예술 장르로 치면 다원 예술로 해석할 수 있고 콘텐츠로서는 전형적인 융합형 문화 콘텐츠로 분류할 수 있다. 모든 게임이 그럴 수는 없지만 단 하나의 게임으로 거대한 규모의 산업과 문화를 순식간에 만들어낼 수 있는 파괴적인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빌보드 차트나 해외 유명 콘서트장에서 공연하는 BTS를 보고 자랑스럽다고 느끼면서도 ‘LOL 월드챔피언십’이나 ‘오버워치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한국 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면 조금은 넓은 시각으로 콘텐츠 산업을 살펴보아야 한다. 2018년 상반기 국내 콘텐츠 산업의 수출에서 전체 콘텐츠 중의 62.1%가 게임 콘텐츠이다. 우리가 세계를 놀라게 만들고 있는 자랑스러운 ‘K-POP 신드롬’은 대단하지만 음악은 5.9% 정도이며, 최근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수상의 영광과 함께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한국영화는 아쉽게도 0.8%에 불과하다. 오랫동안 게임 산업은 우리나라 콘텐츠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해외시장에서 높은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문화 콘텐츠 강국이 되고자 했고 몇십년 전부터 제조업과 지식산업의 특성을 비교하면서 ‘굴뚝 없는 공장’이라고 극찬했던 대표적인 콘텐츠 산업 분야에서 가장 화려하고 경쟁력 있는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어떤 지표로도 게임 콘텐츠 산업이다.

앞서 언급한 산업으로서 부가가치 창출 이외의 학문적 측면을 살펴보자. 초기 보드게임이나 카드 게임들이 컴퓨터의 등장 이후로 디지털 게임으로 발전하면서, 곧 게임은 회화, 문학, 연극과 같이 이미지와 텍스트를 중심으로 스토리텔링을 제공하는 새로운 콘텐츠 형식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게임이 가진 상호작용성(interactivity)은 기존의 서사(Narrative) 방식이 가진 대부분의 한계와 범주를 너무 쉽게 무너뜨려 버린다. 게임은 선행되는 막(Act)이나 챕터(chapter)의 구분에 크게 한정되지 않고 스토리의 선형 구조에 의한 제한이 전혀 없었다. 게임의 서사는 이용자 선택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하고 선택에 따라 같은 반복되기도 한다. 이용자가 내용의 일부가 흥미롭지 않거나 또는 필요 없다고 판단되면 생략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게임은 이용자 요구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도록 제작된다. 선형 스토리텔링을 가진 모든 콘텐츠가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한계점을 버튼 하나로 간단히 날려버린 것이다. 이처럼 전통적인 서사와의 짧지만 강렬한 경쟁과 갈등을 거치고 난 후 2000년대에 들어서 게임은 점차 대형화되고 음악, 영화, 방송과 같이 엔터테인먼트 분야로 확장된다. 이 시기에 게임은 쟁쟁한 경쟁자인 방송, 영화, 음악이 가진 대부분의 특성을 흡수한다. 카메라 연출 및 편집 기법을 게임 내에서 긴장감 넘치는 장면을 차용하고 심지어 영화감독이 직접 게임 진행 영상을 연출한다. 그리고 가수, 작곡가, 연주자들과 기획한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게임이 제작하기도 한다. 흑백화면과 환경 사운드만으로 연출되는 공포 게임부터 디바이스 진동으로 촉각적 피드백을 제공하고 카메라 추적기술을 활용해 사용자 행동에 따라 반응하는 상호작용을 제공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몇몇 콘솔 게임기는 최근 등장한 4D 영화관의 효과들을 교묘하고 강렬하게 활용하고 있다. 다른 미디어에서는 몇 십년동안 고민하던 한계점이나 문제점을 간단히 해결하고 오히려 사용자에게 더 다양한 인터랙션과 피드백을 제공하고 공감각적으로 조작하기를 요구하는 게임의 진화는 사용자에게는 너무도 달콤한 유혹이다. 그리고 게임 자체로 소셜미디어 역할을 수행하며 커뮤니케이션 기능이 더해지면서 사용자들은 게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순식간에 몰입하게 했다.

이러한 게임의 특성은 다양한 분야에 독특한 영향을 끼친다. 예술 장르로서 비디오아트를 계승하여 등장한 미디어아트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부흥하면서 매우 깊은 인상을 주었다. 많은 작가(창작자)가 공학자나 기술전문가와 함께 협업하여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을 창작하였고, 예술 분야의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고 보다 다양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관객들은 미디어아트가 보여주는 상호작용성이나 멀티미디어적 표현을 통해 많은 흥미를 느꼈고 그와 더불어 다양한 창작을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국제적인 펀딩과 프로젝트도 쉽게 추진되었다. 하지만 2000년 중반 이후로는 기술적 흥미로움과 창조적인 미디어의 역할을 대부분 디지털 게임에 빼앗기게 된다. 잔인하게 표현하자면 후기에 등장하는 미디어아트 작품들이 보여주는 표현 방식, 인터페이스, 창의적 연출, 몰입도, 재미, 등의 요소들이 게임상에서 더 기술적으로 유려하고 제공되었고, 표현과 연출은 더 창조적이었고 결과물의 퀄리티조차 더 높았다. 또한 상호작용성이나 사용자 인터페이스 편의성은 비교하기조차 민망한 수준으로 격차가 켜졌다. 이제 미디어아트는 새롭거나 놀라운 것을 보여주지 못하게 되었다. 물론 예술작품과 디지털 게임을 1대1로 개념적 가치 비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서로 다른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런 비교는 무의미하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결과물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게임은 모든 측면에서 비교 우위에 있었다. 더 많은 기술과 자본이 투자되었으며, 사용자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다양한 연구개발을 통해서 제작된 것이니 당연한 것이었다. 이처럼 게임은 모든 예술, 콘텐츠,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포함해서 강력한 경쟁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단지 부가가치 창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기술적, 예술적, 디자인적 역량이 집약되어 제작되고, 기존 장르적 특장점과 미디어 확장성을 포괄적으로 융합되며 발전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세대를 뛰어넘어 진화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게임으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시대의 흐름에 따라 디지털 게임은 전통적인 게임들을 대체하고 있다. 하지만 원래 게임은 더 다양하고 풍부한 역사와 범주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게임은 ‘놀이’라는 인간의 문화적, 사회적 성질을 가진 행위이다. 일정 시간을 되돌려 기성세대들이 어린 시절에 운동장에서 술래잡기하면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여기저기 친구를 찾아다니는 행위나 놀이터에서 소꿉놀이하면서 아빠, 엄마의 역할을 각자 맡아서 어설프지만 열정적으로 연기를 하는 모습을 떠올리고 난 후에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아이들이 거실에 앉아서 콘솔 게임기로 잠입 액션 장르의 게임에서 주어진 인질 구출미션을 수행하면서 인상을 찌푸리고 패드를 열심히 조작하는 모습이나,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 내에서 자신이 만든 캐릭터 직업인 치유전문가의 역할을 그룹 내에서 수행하면서 집중하는 모습이 서로 다른 행위인가?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디지털 게임은 점차 모든 미디어가 가진 특성을 통합하고 완성형 콘텐츠에 가까워지면서 기존의 전통적인 놀이까지 대체하고 있다.

  

아이들의 소꿉놀이와 심즈 게임플레이 화면

 

아무런 편견 없이 앞서 언급된 두 시대의 행위를 바라보면, 전자는 현실 공간에서 신체를 중심으로 하는 놀이이고, 후자는 증강현실 공간이나 또는 가상공간에서 사고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놀이이다. 본질적으로 두 활동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단지 차이점은 기술 발달과 시대 변화에 따라서 형식이 변한 것으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부모 세대가 학창시절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서 공중전화 앞에서 수첩에서 번호를 찾던 행동과 지금 우리가 스마트폰의 터치스크린에서 외우지 못하는 친구의 전화번호 11자리 숫자를 알아서 연결해주는 행동으로 그냥 형식만 변한 것이다. 시대는 변화했고 그에 따라 놀이도 변화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만약 누군가 수십 년 전 아이들이 온종일 운동장에서 공놀이하거나 마당에서 고무줄놀이를 한다고 해서 그것을 중독으로 생각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순순히 수긍할 수 있을까?

극단적인 사건들을 언급하면서 게임중독이 사용자들에게 광범위하게 발생할 수 있으며, 그것이 폭력의 주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의 학술적 근거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해외 유수의 연구(심리학, 의학 분야) 결과와 비교하면 국내에서는 게임의 중독성과 폭력적 성향의 상관관계를 기정사실로 전제하는 연구가 다수이다. 대부분의 지표가 게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체로 설정되고 설문조사나 임상실험도 전제부터 불명확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공정성이나 객관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앞으로도 게임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게임중독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거나 지표를 분류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단 게임중독에 대한 연구는 그렇게 명료하게 결론 내릴 수 없다. 일단 중독을 유발하는 물질이나 행위와 달리 게임은 아무리 재미있어도 계속하면 스스로 질려서 그만두게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게임이 제공하는 재미에 비해서 게임으로 인해 발생하는 스트레스가 역전하는 시점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임제작사는 끊임없이 콘텐츠를 업데이트하고, 적당한 시기에는 결국 후속 작품을 출시하기에 이른다. 어떤 중독 원인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루해져서 자발적으로 그 행위를 그만두게 만드는가? 대부분의 게임은 사용자의 몰입을 철저히 유도하도록 기획된다. 그로 인해서 실제 과몰입 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러한 과몰입 시기도 일정 시간 동안 고도로 집중하고 난 후에 피로감과 권태감에 의해 자연스럽게 게임을 현실로부터 분리하게 된다. 물론 개인에 따라서 시간차는 발생하겠지만 진지하게 게임에 집중해본 경험이 있다면 이후 발생하는 지루함도 쉽게 이해할 것이다. 기존의 중독이란 금단 증상과 내성 증세를 기반으로 기준을 삼을 수 있지만, 게임은 금단과 내성에 대한 사례가 일정하지도 명확하지도 않다. 솔직히 어떤 중독 현상이 본인이 지루해서 자발적으로 멈출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그것이 어떤 차이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게임은 유전적인 특성을 ‘순수하게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한 놀이’로부터 물려받았다. 인간에게 있어서 놀이란 일상에 쉽게 녹아들 수 있으며, 인간의 모든 행위와 공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노래를 부르면서 특정 음절을 생략하는 규칙을 지키면서 놀 수 있다. 심지어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순간에도 놀이를 할 수 있다. 식사 시간에 ‘누가 빵을 얼마나 빨리 먹을 수 있는가?’ 라는 간단한 규칙을 정하고 참여자 간의 세부적인 규칙(제한 시간, 빵의 개수, 등)을 정하면 그때부터는 놀이(게임)가 바로 시작된다. 이처럼 인간에게 놀이는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고, 실제 생활에서 놀이란 심리적 선택이나 사고적 설정에서 장소와 시간을 제한하는 방법만으로도 즉발적으로 이루어진다. 과연 이런 놀이인 게임을 중독방지와 치료가 필요하다고 논의해야 한다면 일상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놀이에 대해서 접근을 시작해야 한다. 결국 이 문제는 ‘왜 인간은 즐거움을 추구하는가?’에 대한 어려운 논의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놀이학 관점에서는 당연히 인간에게 있어 놀이는 일상으로부터 구분될 수 없다. 누구든지 한 번쯤은 ‘길을 걸으면서 나는 보도블록의 선을 밟지 않는다!’라든가, ‘상대방과 같은 단어를 동시에 이야기하면 어떤 행동을 한다!’ 등과 같은 일상 속에서 쉽게 규칙들을 세울 수 있고 그 안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며 만족감을 경험한다. 그것이 놀이가 습관적이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이유이다.

만약 이러한 놀이가 과도하고 중독 상태라고 가정한다면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치유하고 통제할 것인가? 게임중독의 문제점과 질병으로 해석하고 치료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지금보다는 명확한 답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지금 제시되고 있는 게임중독의 기준은 너무 빈약하다. 누구나 특정 활동으로 생활에 지장을 받는다면 스스로 또는 외부에서 일정 정도의 제한과 권고는 필요하겠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행동들을 비정상적이거나 질병이라고 규정하고 전문가를 통해서나 법과 제도를 통해 바로잡겠다는 결정을 쉽게 내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런 단순 명료한 결정이 얼마나 많은 부작용을 가져왔는지는 역사를 통해서 분명하게 알고 있다. 고대에는 희극과 연극이 젊은이를 망치는 몹쓸 존재였고, 어떤 시대에서는 바둑과 장기였다. 멀지 않은 시대에는 TV, 만화, 인터넷, 등이 모두 동일한 절차를 밟아왔다. 만약 어떤 인간의 행동이 객관적으로 비정상적이고 범죄 발생의 인과관계가 명확하다면, 그것이 쇼핑, 야식, 운동, 독서, 일, 취미, 기호식품, 등이 모두 의학적, 제도적 통제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 기준을 누가 어떻게 정할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게임에 부작용이 전혀 없거나 중독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기준이 존재하는지 여전히 의심스럽다. 자신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대상을 빈약한 근거만으로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손쉽게 내린 판단과 성급한 결정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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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07.05 17:57

아현동의 어제와 오늘을 예술로 되짚다

―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의 예술목욕

 

김미교 _ 독립큐레이터

 

 

  오래된 공간들은 한 지역의 기억과 오늘을 마주하게 한다. 아현동에 위치한 행화탕의 어제는 동네의 현대식 목욕탕이었고, 오늘은 시민을 위한 복합문화예술공간이다. 과거 행화탕에서 목욕을 즐기던 동네 주민들의 노랫소리가 남탕과 여탕을 나누던 벽을 넘나들었다면, 현재 행화탕에서 동시대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선사하는 ‘예술목욕’으로 세대와 세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을 넘어서는 문화교류를 시도한다. 이 글을 통해 행화탕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역사적, 장소적 맥락이 주민과 시민들의 인식에서 변모하는 과정을 문화 예술 플랫폼의 역할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행화탕이 위치한 아현동의 어제와 오늘, 주민들이 교류하는 사랑방으로써 행화탕, 복합문화공간에서 즐기는 예술목욕이라는 세 가지 흐름으로 글을 이어갈 것이다.

 

 

아현동의 어제와 오늘

 

1956년(왼)/1963년(오) 서울 마포구 아현동 김장시장 전경 모습(출처: 국가기록원)

 

  1950년대 마포종점이 위치하고, 서울역이 가까워 60년대 상경민들의 주요 터전이었던 아현동은 작은 고개 혹은 아이고개로 불리던 곳으로 광복 이후 대표적인 저층 주택지였다.  강변북로를 끼고 2호선 아현역과 5호선 애오개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울교통의 요충지로써의 가능성은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아현동의 일부 주거 건물들이 재건축을 진행하게 하는 주요한 지리적 요건이다.

 

2019년 6월에도 활발히 포스팅되고 있는 아현시장(네이버 포털 검색화면 캡처)


  현재 새로운 고층 아파트 단지와 함께 아현동에 등장한 새로운 이주민 가정들과 오랜 세월 아현동에 삶의 터전을 닦아온 원주민들이 아현시장, 아현초등학교와 같은 생활권을 함께하며 서로 부대끼고 공존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아현동 주민들은 아동 및 청소년 인구와 중장년, 노년층 인구가 고르게 분포하며, 지역적 연고보단 인간관계 중심으로 시작된 다양한 커뮤니티가 조성되어 있다.

 

 

주민들이 교류하던 사랑방-행화탕


  현재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을 운영 중인 “축제행성”의 서상혁 디렉터가 아현동 주민의 행화탕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할 때 단적인 사례로 주로 언급하는 노래가 있다. 바로 스윗소로우의 ‘아현동’이다. 그들이 데뷔전 아현동 반지하연습실의 생활을 추억하는 노래의 한구절에  “그때도 손님이 없던 행화탕에 가면 우린 수영을 했지”라며 행화탕을 언급하는 가사가 있다. 이처럼 아현동에 살았던 이들이 추억하는 공간, 행화탕은 건축된 1958년부터 현대식 대중목욕탕으로 지역민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던 사랑방 역할을 해왔다.

  행화탕에서 아현동 주민들은 청결을 유지하기 위한 ‘목욕’이라는 행위를 함께하는 공공의 장소, 대중목욕탕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서로의 삶을 내려놓는 동시에 일상을 마주하였다. 아현동 주민들에게는 행화탕이 과거 탈의실 평상에서 마주하며 담소를 나누던 동네 사람들, 목욕탕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들과 같은 기억들이 녹아있는 공간이다.
  서울의 근대화 역사를 함께해온 아현동에서 현대식 대중목욕탕으로 건축된 행화탕은 시설이나 위생 상태, 수질이 좋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욕탕으로 자리매김해왔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찜질방이나 스파 등 목욕문화가 다양하게 변모함에 따라 과거에 하루 100여명도 수용했던 행화탕을 찾는 이들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결국 2010년(2007년부터 2011년까지 사이로 추정)을 즈음하여 아현동의 재개발계획이 수립되며 목욕탕도 문을 닫게 되었다. 그 뒤 개인 임대인들에 의해 사무실, 창고 등 그동안과 다른 활용으로 행화탕의 사랑방 역할은 그저 추억 속에만 머무는 듯했다.

 

2016년 5월 15일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 개관 당시 전경(촬영_채드박(Chad Park), 사진 제공: 축제행성)

 

  그리고 문화예술을 기획하는 ‘축제행성’이 행화탕을 임차하며 2016년 5월 행화탕은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이후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은 아현동 주민을 포함해 서울시민들에게 문화예술을 매개로 한 다양한 교류의 장을 기획해오고 있다. 또한 자체 기획프로젝트뿐만 아니라 대관을 통해 동시대 문화예술을 실험적으로 선보이는 장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오늘날 행화탕은 단순히 물리적인 그 장소와 건물이 유지됨을 넘어서 사랑방이라는 지역 커뮤니티 내에 고유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새로운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이어가고 있다.

 

 

“예술목욕”하는 사람들

 

  2016년 행화탕이 문화공간으로 변모한 이후 수많은 문화예술 프로젝트들이 행화탕을 거쳐 가며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 특히 필자가 2년간 직접 기획에 참여한 “축제행성” 의 “예술로 목욕하는 날”을 중심으로 “예술 목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역과 사람을 되짚어보았는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은 개관한 2016년 5월부터 지금까지 개별적인 자체 기획프로그램과 대관 프로그램, 서울문화재단의 ‘복작복작예술로 사업’ 등 다양한 문화 예술 프로젝트들을 운영하며 지역주민들이 예술로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왔다. 과거 행화탕이 목욕문화를 통해 지역 커뮤니티에 기여했다면, 현재의 행화탕은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서 다양한 “예술목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교류하는 시간을 만들고자 한다. 특히 단발적인 이벤트이기보다 지속해서 지역과 연계할 수 있는 문화예술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받아오며, 이와 관련한 기획을 하게 되었다.  아현동 주민들의 지속적인 예술교류를 위해 기획한 ‘예술로 목욕합니다’라는 컨셉은 기존 행화탕이 가지고 있던 정체성을 담아보고자 한 시도로써, 2017-18년에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함께 “예술로 목욕하는 날’을 만들었다. 그리고 일련의 “예술로 목욕하는 날”들은 개별 주제들을 엮어 1년 동안 하나의 큰 이야기를 담을 수 있도록 기획했다.

 

2017년 예술로 목욕하는 날 전체 페이스북 커버

(참고 : 2017년 10월 예술로 목욕하는 날 아카이브 및 인터뷰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ymUjigRJRvk)

 

2017년의 “예술로 목욕하는 날”은 특히 장소를 의인화해 1958년 건축된 이후 환갑을 맞이한 행화탕이 아현동을 되돌아보고 그 안에  삶과 이야기를 모티브로 잡아 일련의 소주제들을 잡아보았다. ‘에술목욕개업’. ‘자연소풍목욕’, ‘노천휴가목욕’, ‘가족추석목욕’, ‘환갑잔치목욕’까지 5회에 걸친 행화탕의 ‘예술목욕’을 다각도로 구성하였다. 특히 마지막 10월은 아현동에 평생을 살아온 실제 환갑을 맞이한 원주민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다양한 공연과 전시 작품들을 선보이며, 아현동의 이야기를 행화탕으로 되짚어보는 시간이었다.

 

2018년 예술로 목욕하는 날 전체 페이스북 커버

 

2017년이 아현동에 대한 세월과 이야기에 집중했다면, 2018년은 ‘목욕’이라는 행위에 집중해 자신을 돌보고 가꾸는 행위로써 다양한 개인의 ‘감각’들을 깨우고 확장해 서로 교류 가능한 커뮤니티로 연결될 수 있도록 기획구성을 잡아보았다. 이렇듯 2017-18년의 ‘예술로 목욕하는 날’은 주민들의 이야기를 예술로 되짚어보고 발굴하는 과정에 지역과 장소를 넘어 특히 사람에 더욱 집중했다.

 

이러한 일련의 문화예술기획이 주민들의 지속적인 예술교류로 이어질 수 있도록 ‘예술로 목욕합니다’라는 기본 모토로 돌아가면서도, 젠트리피케이션과 같은 상호 이해의 부재에서 오는 지역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소하고 지역문화의 기반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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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07.05 17:34

신분제와 신인종주의

 

서도원 _ 연세대 미디어문화연구학과 석사과정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근대와 근대를 나누는 시기적 구분은 뚜렷하지 않다. 각 사회의 지역적, 정치적 특성으로 인해 근대화의 양상이 다르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상적으로는 시기가 아닌 사회 구조와 정치질서의 차이로 전근대와 근대를 나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개인적으로는 인권 존중 사회가 근대 사회의 특징이라 볼 수 있다. 특히 그중에서도 정치적 차원에서 신분과 계급의 구분은 대표적인 시대적 경계로 인식되어 왔다. 백광렬(서울대, 박사)은 신분제의 특성을 특권의 위계, 사회적 강제, 세습이라고 이야기했다. 이 특성들이 근대에 들어오며 계약을 골자로 한 사회 체계로 대체된 것이다.

 

그러나 근대를 넘어 오늘날에도 우리는 사회에서 특권의 위계와 세습이 일어나는 현상을 보고 있다. 최근 언론 매체와 포털사이트를 점령한 마약과 YG 성 접대 의혹에서 남양유업 3세 황하나의 태도는 특권의 위계를 잘 보여준다. 헌법에 인간의 평등 지향성이 명시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청장과의 친분을 언급하며 법을 우습게 보는 태도는 황하나의 신분적 특권 의식을 드러낸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태도나 박찬주 대장의 인터뷰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재벌그룹의 경영권 세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심지어 근래에는 교회를 세습하는 문제까지 논쟁이 되고 있다. 대한항공 일가의 ‘땅콩 회항’ 사건은 특권의 위계와 세습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사례이다. 이들의 생각에는 절대적으로 평등해야 할 인간의 권리보다 계층적으로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는 신분제적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오늘날의 사회는 전근대의 모습과 상이하지 않다. 근대적 차원에서 본래의 자본주의적 노동계약 관계는 인격이 인격을 지배하지 않는 상품거래 관계이다. 하지만 돈으로 인격을 산다는 인식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팽배하게 퍼져있다. 매년 공정거래위원회에는 ‘갑질’에 대한 조사 요구가 수백 건씩 올라오며 학계에도 ‘갑질’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는 것은 구조 안에서 같은 문제들이 재생산되고 있는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태도이다. 드러나는 사건들 외에도 인격이 거래되고 있는 현상은 현실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으며 심지어 노동자가 이를 당연하게 묵과하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통계조사 결과, 직장인 89.1%갑질을 당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동아일보<직장인 10명 중 9갑질  당한 경험...가장 빈번한 갑질은?>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 진지한 자성의 결과를 찾기 어렵다며 징역 3년이 구형되었다.

출처: 연합뉴스 <검찰 ‘땅콩회항’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에 징역 3년 구형>

 

그렇다면 현대의 사회는 전근대의 신분제로 돌아간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오늘날 사회적 지위에 따른 위계질서는 정치적 제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 정체성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특권의 위계와 세습, 후기 자본주의의 인격 거래 현상은 내가 ‘일반인’과 다르다는 ‘구별짓기’에서 시작한다. 사람은 돈이 많다고 ‘갑질’을 하지 않는다. 내가 타자와 어떻게 관계할 것인지 정하는 사회화의 과정에서 문화적 차이를 상정하고 스스로 합리화해야 ‘갑질’이 나온다. 그리고 이 구별짓기는 인종주의의 특성이다. 창원대학교 신동규 교수에 따르면 인종주의는 문화적 정체성에서 타자를 배제하며 형성되었다. 따라서 오늘 한국 사회는 문화적 정체성을 토대로 타자를 배제하는 ‘인종 없는 인종주의의 사회’. 즉 신인종주의의 사회인 것이다.

 

전통적인 인종주의가 인종을 매개로 했다면 신인종주의는 노동과 자본을 매개로 한다. 처음 신인종주의 담론이 활성화된 곳은 1970년대 프랑스이다. 프랑스 사회에서는 유럽인과 북아프리카 출신 노동자들의 문화적 차이에서 신인종주의가 대두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신인종주의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차이가 크지 않은 국민적 정체성 안에서 노동과 관계해서 문화적 차이를 만든다. 일용직 노동자를 위생적으로 깨끗하지 않고 성격이 거칠다고 인식하는 태도나 간호조무사의 전문성 없음을 비난하는 태도도 이런 문화적 구별짓기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오늘날 신인종주의적 의식은 사회 전반에 퍼져있다.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에서 나오는 오염의 메타포 역시 이런 신인종주의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은 고객용 엘리베이터를 사용해선 안 된다거나 청소노동자 휴게실은 건물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비가시적 노동자의 현황은 흑인이 병균을 옮기므로 화장실을 따로 써야 한다는 1960년대 미국 남부인들의 태도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혹은 이렇게 적극적이지 않더라도 노동의 질적 차이를 두고 인식하는 모든 태도, 대기업을 간 친구를 능력 있다고 칭찬한다거나 대학원생으로서 은연중에 대중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모든 자세가 신인종주의의 여파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박찬주나 재벌가를 비난하기는 쉽지만, ‘갑질’과 특권의 위계 같은 신분제적 행태에 우리 모두는 무관하지 않다. 거칠게 말하자면 신분 상승 욕구가 충족될 수 없었기에 비난하는 입장에서 뉴스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사법부를 개혁하고 적법절차를 실현한다고 한들 문화적 정체성에서 구별 짓는 모든 인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제2의, 제3의 박찬주가 생성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이에 기사를 접할 때 관심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연구자로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스스로와 사회를 되짚고 돌아볼 필요가 있다.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 진지한 자성의 결과를 찾기 어렵다며 징역 3년이 구형되었다. 출처: 연합뉴스 <검찰 ‘땅콩회항’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에 징역 3년 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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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07.05 17:29

한국인의 대표 감정

 

박권일 _ 사회비평가

 

노동조합이나 정당의 대표성이 약하다 보니, 시민들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바꿔나갈 희망을 품지 못한다. 사람들은 결국 내 몫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를 배제하거나, 내 노력을 ‘무효처리’하는 세계에 좌절해 무력감에 빠지고 만다.

 

오늘 한국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감정을 둘 꼽는다면 뭐가 있을까? 하나는 ‘혐오’, 또 하나는 ‘울분’이 아닐까 한다. 혐오는 많은 이들이 어느 정도 알게 된 반면, 울분은 좀 생소할 수 있겠다. 물론 ‘답답하고 분한 마음’이라는, 울분의 사전적 의미를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런데 이것이 공중보건의 테마로 부상한 건 그리 오래지 않았다.

 

통일 후 동독 사람들이 겪은 심리 문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울분’(embitterment)과 ‘외상 후 울분장애’(PTED) 등의 개념이 정립됐다. 이후 세월호 참사 직후 집중상담을 진행한 고려대 한창수 교수, 2018년 ‘한국인의 울분’ 조사를 기획한 서울대 유명순 교수 등의 연구를 통해 울분은 한국 사회에도 점차 알려졌다. 유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54%가 울분 상태에 있고, 중증도 이상의 울분을 겪는 이들이 독일보다 6배 정도 높다고 한다. 혐오 못지않게 울분 또한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울분은 단순한 분노와 다르다. 울분은 ‘이런 처사는 부당하다’ 혹은 ‘나의 노력과 기여가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지속되면서 감정적 고통이 격화한 상태다. 요컨대 공정성에 대한 인식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반복되는 실직, 직장의 부당한 대우 등이 울분을 일으키는 흔한 사례다. 한창수 교수는 ‘울분을 통해 본 한국인의 정신건강 세미나’에서 “우울증은 약으로 상당한 효과를 보지만, 울분장애는 약으로 치료가 잘 안된다”고 밝히고 있다.

 

혐오와 울분은 표출 양상이 다르지만 사회적 배경은 같다. 비유하자면 ‘의자놀이’다. 엄청난 특권을 보장하는 ‘소파’가 있고, 최저한의 존엄을 보장하는 ‘의자’가 있다. 소파에 앉지 못하면 적어도 의자에라도 앉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오물을 뒤집어쓰며 평생 바닥을 기어 다녀야 한다. 문제는 소파와 의자의 수가 너무 적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무리 단속하고 감시해도, 소파·의자를 차지하기 위한 반칙은 필연적으로 양산된다. 시스템에 대한 신뢰는 바닥을 친다. 연대와 협력은 예외 상태가 된 반면, 각자도생의 지옥이 정상 상태가 된다. ‘성장’이나 ‘진보’는 한가한 소리로 치부되었다. 오직 생존이 지상목표이기에 사람들은 남을 깎아내리거나 자신의 피해자성을 증명하는 데 몰두한다. 노동조합이나 정당의 대표성이 약하다 보니, 시민들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바꿔나갈 희망을 품지 못한다. 자기계발에 몰두해 보기도 했지만 자기계발서가 설파하는 성공에서 나는 늘 예외다. 집단해법도 개별해법도 모두 실패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결국 내 몫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를 배제하거나(혐오), 내 노력을 ‘무효처리’하는 세계에 좌절해 무력감에 빠지고 만다(울분).

 

한국은 오래전부터 ‘소용돌이’ 사회라 불릴 정도로 중앙 쏠림 현상이 심했다. 위계서열에 대한 집착과 우열비교 문화도 어떤 나라보다 강했다. 설상가상으로 외환위기 이후의 격변은 사회 전체의 경쟁 압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만연한 혐오와 울분은 그 과정이 오랜 기간 축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혐오와 울분에는 또 하나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인지부조화, 쉽게 말해 기대와 현실의 괴리다. 이를테면 혐오는 ‘내가 저들보다 우월하다’는 기대와 ‘인간은 평등하다’는 근대적 상식 사이의 괴리에서 발생한다. 한편 울분은 ‘세상은 공정해야 한다’는 기대와 ‘실제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는 경험 사이의 괴리에서 발생한다.

 

인지부조화를 해소하는 하나의 방법은 기대를 현실에 부합하게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을 기대에 부합하게 바꾸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소위 ‘태극기 부대’는 ‘박근혜 무죄’라는 기대와 ‘박근혜 탄핵 및 수감’이라는 현실 사이의 인지부조화를 엉뚱한 방식으로 해결했다. ‘박근혜 무죄’라는 기대에 맞춰 현실을 재구성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박근혜의 범죄는 모두 ‘촛불 든 빨갱이들의 사악한 음모’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고 혐오와 울분이라는 인지부조화를 해결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혐오의 경우, 기대를 바꿔야 한다. 즉, 내가 우월하다는 근거 없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울분의 경우, 기대에 부합하도록 현실을 바꿔야 한다. 즉, 지금보다 더 공정한 세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지 막막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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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07.05 17:26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는 이 문장으로 역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짚곤 합니다.

역사뿐만 아니라 추억을, 불과 며칠 전 지나간 일도 되짚어 보죠.

서강대학원신문도 지난해를 되짚어보니, 무심코 지나쳐버리고 놓친 것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기존의 알찼던 신문 구성을 잊지 않고,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정신으로 올 한해 이끌어나가고자 합니다.

 

‘되짚다’의 사전적 의미처럼

거듭 곰곰이 따져보고, 다시 살피거나 반성하는 모습은 어디에나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149호의 기획은 그래서 ‘되짚다’입니다.

사회의 현상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발상, 게임중독의 질병 코드화 이슈,

인간 삶의 목적과 목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작가와의 인터뷰 등

여러 주제를 이야기해보고, 되짚어보고자 합니다.

 

이번 기획을 통해 자신의 삶을, 우리 사회를 되짚어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편집장 박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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