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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48호] “이미 늦었어요.”라는 말이 싫지만 느려지고 싶은 당신에게

“이미 늦었어요.”라는 말이 싫지만 느려지고 싶은 당신에게

 

송혜현 _ 건국대 중국어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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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지하철에서 봤다. 어느 지역의 슬로라이프 국제대회 광고. 이 대회에서 소개하는 슬로라이프는 ‘제 속도의 생활미학’이라고 한다. ‘슬로’는 느리고, 오래된 것, 특히 사라져가는 음식, 환경, 전통의 가치를 대변하지만 일상에서의 생활은 느림과 빠름이 공존하므로 슬로라이프는 그러한 일상을 직시하고 빠름과 느림의 공존을 지향하는 사회라며, 대립이 아닌 균형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그들은 ‘슬로’에 해당하는 가치들로 분야를 나누어 대결을 펼친다. 누가 가장 슬로라이프에 적합한지 겨룬다. 아마 이런 것이 균형인가. 참된 공존?

괜한 이질감에 사로잡혔다. 내가 알던 슬로라이프는 과연 무엇이었길래 ‘슬로라이프’로 대회를 열어 경쟁을 한다는 것이 이토록 어색하게 다가온 걸까.

‘슬로라이프’와 ‘대회’가 양립가능한 개념이었던가? 대회라는 단어는 경쟁, 속도, 순위와 그것에 따른 물질적 보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슬로라이프는? 그 반대의 개념이 떠오른다. 일본의 문화인류학자이자 환경운동가 쓰지 신이치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1]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비판하며” 슬로라이프 운동을 주창하였다. 시간적 개념에 대한 느림을 선언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반발하고, 인간성을 회복하려 한다. 현대사회에서 느림과 빠름, 슬로라이프와 자본주의. 이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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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존을 짚어보기 위해 먼저 슬로라이프가 제어하고자 하는 시간을 살펴보기로 한다. 자본주의 시대에 도래하여 파생된 다양한 문제점들이 그 속도감에서 기인했으며, 슬로라이프는 이것에 중점을 맞추고, 현대의 시간 개념을 거스르려 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시간은 금이다. 곧 시간은 돈인 것이다. 19세기 초 영국 소설가 리턴 남작의 <돈>에서 처음 언급된 이 말은, 당시 영국의 초기 산업자본주의를 반영한다. 얼마나 많은 시간 일하느냐, 얼마나 빠른 속도로 일하는가에 따라 노동자들이 손에 쥐는 돈의 양도 달라졌다.[2] 정보자본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 현재, 시간은 그 영향력이 더욱 커져 자본시장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전제 조건이다. 이른바 표준시간 체제는 국제 금융 거래의 대부분이 데이터베이스화된 화폐로 처리되는 현실에서 상호 환산 불가능한 복수의 시간 체계가 이 시스템에 동시에 공존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자본은 초코드화된 거대한 단일 시간 체제를 유지한다.[3] 이러한 시간 체제 안에서 슬로라이프의 느림은 모순적일 수 밖에 없다.

슬로라이프를 대표하는 지역인 슬로시티는 하나의 관광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해당 지역은 관광수입으로 그 명맥을 이어간다. 끊임없이 관리 되어야만 하는 조경, 만들어진 도보여행 코스, 특정한 테마로 조성된 마을. 그리고 이런 것들을 체험하는 도중 휴대폰 어플로 길을 찾고, 신용카드로 그곳에서 무엇인가를 결제하는 당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슬로시티에서 ‘느림’을 체험하고, 또 다른 체험을 위해 다시 돈벌이에 나선다. 결국 이곳의 ‘느림’은 외지에서 찾아올 관광객들을 위해 애써 조율된 느림이며, 오늘날의 시간을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자본이 허락한 속도와 리듬에 구속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느림이 슬로라이프가 추구하는 본연의 느림이 맞는지 의문이 남는다.

앞서 언급한 시간뿐 아니라 city, 즉 도시라는 공간도 자본주의와 뗄 수 없는 개념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의 생산에 바탕을 둔 도시 산업경제를 전제로 발달했다. 막스 베버의 설명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도시들이 있었지만, 중세 말기 서구의 도시가 없었다면 자본주의는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산업구조의 고도화 및 인구의 급속한 증가를 가능하게 하면서 자본주의 발전의 장 또는 자본 축적을 위한 건조환경을 제공했던 도시의 발달이 없었다면, 자본주의는 존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4] 따라서 슬로시티라는 개념은 애초에 형용모순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 개념을 받아들이려면, 슬로시티를 도시성이 완전히 관여하지 않는 공간이 아니라 도시이지만 다른 층위의 공간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공간이 과연 슬로라이프를 온전히 담아 낼 수 있는가? 또한 기존의 도시화라는 개념아래 도시와 도시가 아닌 곳으로 구분되던 공간이 슬로시티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은 물리적 거리나 행정 구획에 영향을 받지 않는 정보자본주의의 그물망 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것은 결국 슬로시티가 이러한 질서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뜻은 아닌가?

이러한 현대의 시공간 속에서 슬로라이프의 주창자 쓰지 신이치는 세가지 차원의 슬로무브먼트를 통해 슬로라이프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개인에서 시작해 공동체를 거쳐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어 글로벌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시적, 제도적 차원에서의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슬로무브먼트는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추구되어야 하는 개념이다. 동시에 일어날 ‘글로벌’한 변화를 위해서 오늘날의 인터넷과 기술로 인한 네트워크의 수혜를 받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결국 현대사회가 마련해두고 있는 여러 문명의 이기들, 즉 휴대폰이나 컴퓨터, 인터넷처럼 견제해야만 하는 문명의 장치들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5] 슬로라이프가 거부해야 하는 것들을, 슬로라이프 유지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미국의 여성 인구학자인 도넬라 메도우즈는 쓰지 신이치에게 보낸 글에서 천천히 산다는 것(슬로라이프)은 최신 기술개발을 위해 쏟아 붓는 막대한 에너지나 원료 등을 소비하지 않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글로벌 네트워크 차원의 슬로라이프 운동을 하자면서 이러한 기술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가.

 물론 이윤과 성과, 그것에 따른 계층화의 모순도 발견할 수 있다. 슬로시티가 관광수입을 얻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목할 점은 슬로시티는 5년마다 진행되는 자격검증을 통해 슬로시티의 지위를 유지하거나, 박탈 당한다는 것이다. 슬로라이프는 평가 당하고 있으며, 자격 유지를 목적으로 해당 지역은 타지역과 ‘슬로라이프’ 경쟁을 하고 성과를 보여주어야 한다. <2018 국제 슬로시티 어워드>수상의 영광은 전주시에 돌아갔다. 올해 우리나라의 1등 슬로라이프 도시는 전주인 것이다.

 

<3>

이렇듯 자본주의 안에서 슬로라이프는 모순을 껴안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슬로라이프는 이미 현대사회의 문화로 자리 잡았으며, 이러한 이유로 그 자체가 가진 모순을 정당화할 수 있다. 슬로라이프를 문화산업의 일환으로 바라본다면 공존을 인정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1999년 시애틀 시위를 취재한 핼 헤밀턴은 말한다. “시장 교환의 논리에 [6]지배 받게 된 문화 속에서 모든 것은 상품화된다. 우리의 시간도, 지식도, 바라보는 경치도, 물과 음식물도 마찬가지다.”[7]

20세기 초중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의해 ‘문화산업’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그들은 대중문화 생산자들이 그 수용자들을 기만해 문화산업의 지배 논리에 수동적으로 복종시키며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비판력을 상실하도록 유도한다고 주장하였다.[8] 아도르노는 문화 산업이라는 용어를 통해 오늘날의 문화가 철저하게 이윤을 추구하는 비즈니스가 되었음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9] 이때까지만 해도 문화와 산업이라는 모순적 상생을 비판하는 측면이 강했다.

문화와 산업, 문화산업이라는 단어 자체부터 모순적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의 문화는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그것을 구분하려는 것은 서양 중심적인 사고이며 야만적 사고라고 말했다. 결국 문화란 정신적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의 총체적 활동의 결과이기에 동양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반면, 산업은 우열을 가릴 수 있다. 문화라는 정신적 가치와 산업이라는 물질적 가치는 서로 조화하기보다는 대립적이고 분리된 기표로 인식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산업 구조가 고도화하고 대중의 소비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문화적 욕구는 확대되고, 문화를 경제활동의 대상으로 삼아 산업화되었다[10]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문화산업은 초기의 부정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상품성을 인정하는 측면이 강하다. 문화의 산업화가 예술과 문화자체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느냐의 논의에서 벗어나 21세기 현재에는 문화 산업의 흐름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이동연 문화자본의 시대-한국 문화자본의 형성 원리에 따르면 “문화산업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정의했던 범주를 훨씬 넘어서 대중매체, 엔터테인먼트, 여가, 라이프스타일, 관광, 정보, 커뮤니케이션 분야로 확대” 되어 왔기에 문화산업 자체를 부정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시대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이렇게 문화 혹은 예술과 자본과의 관계는 21세기에 들어서서 다각도에서 고찰될 필요가 있다. [11]

슬로라이프는 이미 문화적 가치를 갖고 문화산업에 활용되는 문화상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미디어의 발전으로 문화상품은 멀티미디어라는 기능을 통해 소비자에게 전달되기 시작했다. 미디어에서는 다른 종류의 삶을 보여주며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도록 돕는 비상탈출 버튼의 역할[12]을 하는 콘텐츠로 슬로라이프를 소개한다. 삶을 옥죄는 성장 압박과 과도한 속도 경쟁에 대한 일종의 반발심리로,[13] 각박한 삶에서 잠시나마 숨 돌릴 틈을 주는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문화의 확장으로 등장한 슬로시티는 결국 슬로라이프라고 불리는 느림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생활문화가 실현될 수 있는 공간 중 하나이다. 고도 산업사회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도시 생활에 있어 새로운 창조적인 문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구가 나타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도시 개념이 바로 슬로시티인 것이다[14]

슬로라이프의 개념 역시 이에 따라 재해석해봄직하다. 현재 대다수의 사람들이 중요시 하는 속도의 경제를 무시한 채 느림의 생활문화로 모든 것을 대체 하자는 것이 아니라 빠름과 느림, 농촌과 도시, 로컬과 글로벌, 아날로그와 디지털 간의 조화로운 삶의 리듬을 지키자는 의미[15]로서의 슬로라이프라면, 어느 정도의 아이러니 또한 좋지 아니한가? ‘슬로’라는 단어 자체의 원 의미에 매몰되기 보다는 ‘빠르다’는 이유로 생성되는 다양한 문제점들을 조화롭게 상쇄하자는 의미로 확장시켜 생각해야 하며 ‘느리다’는 것은 ‘빠르다’의 반의어로써, 상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4>

 자본주의사회에서 목적과 속도를 잃어버리면 금세 도태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로라이프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조금 잃어도 되는 사람들, 조금 뒤쳐져도 되는 사람들, 즉 대개는 기득권자들이다. ‘느림’은 현대 문명에 대한 명백한 대안이라기보다는 배부른 자유주의자들의 자족적인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16]

 시장조사전문기업 마크로밀엠브레인의 트렌드모니터가 전국 만 19~59세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슬로시티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 73.7%가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현대인들에게 슬로시티가 좋은 대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슬로시티에 가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될 것 같다는 의견도 55.7%로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전체 74.1%가 방문객이 많아지면, 결국 본래의 의미가 많이 변질 될 것이라고 응답했으며,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할 것 같아 우려된다(67%)는 지적과 40.5%는 결국 지역 홍보 및 마케팅 수단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 인식도 가지고 있었다.[17] 슬로라이프를 원하는 사람들도 슬로라이프가 지속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 지를 걱정한다. 슬로라이프가 자본주의와 공존하는 방법은 이렇듯 기대와 우려를 낳는다.

그러나 쓰지 신이치는 말한다. “인생은 모순덩어리 아닙니까! 우리는 어차피 이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님이 좌선을 하며 깊은 성찰에 심취해 있는 동안에도 그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모순을 안고 있으면서도 이 세계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조그만 것이라도 발견해서 실천하려는 노력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릅니다.”[18]

 


 

[1] 이때 말하는 자본주의 논리는 자본주의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한다. 이를테면 경쟁, 성과, 경제, 계급, 이윤 등. 쓰지 신이치는 자신의 책에서 이것들과 대응하는 슬로라이프 운동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2] 변현단, <소박한 미래: 자급자족을 위한 農 철학 이야기>, 들녘, 2014,

[3] 임태훈, <검색되지 않을 자유>, 알마, 2014

[4] 최병두, 아시아 자본주의 발달과 도시, 2005

[5] EBS 지식채널, <지식e season5>, 북하우스, 2009

[6] 자본주의의 경제 논리

[7] 쓰지 신이치, <슬로 이즈 뷰티풀>, p65

[8] 이동연 외 공저, <누가 문화자본을 지배하는가? 한국 문화산업의 독점구조>, 문화과학사, 2015,

[9] 김평수, <문화산업의 기초이론>,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10] 9와 동일

[11] 9와 동일

[12] 김교석, [세상 속 컬처랜드]비상 탈출을 꿈꾸는 사람들, 욜로를 로망하다, 경향신문, 2017.04.21.

[13] 장원석, 우리는 왜 삼시세끼에 열광했을까?, 중앙시사매거진, 2015.05.25.

[14] 손대현 장희정 <슬로 시티에 취하다>, 2012, 조선앤북

[15] 손대현 장희정, <슬로매니지먼트>, 2012, 조선매거진

[16] 8과 동일

[17] 트렌드모니터, 2014 슬로시티 관련 인식 조사

[18] 5와 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