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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호]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 인류의 숙명에 대하여

dreaming marionette 2021. 6. 29. 09:00

Kristina Akimova 서강대 일반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몇백 년 후, 천년 후, 우리 세상의 모습은 어떨까? <헝거 게임>의 저자 수잰 콜린스는 파넴이라는 나라의 모습을 그리면서 부, 편의와 테크놀로지를 즐기면서 사는 수도와 가난과 멸망의 고통 속에서 사는 제12의 구역의 극한 차이를 보여준다.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는 세계적 핵전쟁 후에 낙진과 방사능 때문에 지구의 대부분 지역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 사람들이 행성으로 이민을 떠나는 세상을 보여준다. <멋진 신세계>의 배경은 서기 2496년인데, 저자인 올더스 헉슬리는 인간들이 자연적으로 출생을 하지 않고 컨베이어 시스템을 통해 제조돼서 태어날 정도로 발전한 극한 포드주의적인 문명을 묘사한다. 이러한 디스토피아적인 작품들을 짧게 요약한다면, 많은 작가들의 미래에 대한 상상은 ‘절망’과 ‘놀라울 정도로 발전된 테크놀로지’라는 두 가지 특징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월터 M. 밀러 Jr.의 26세기 (나아가 32세기, 38세기)에 대한 상상은 다르다.

 

  핵전쟁 이후의 지구.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 모래 밑에, 아주 깊숙이 누워 있는 고층 빌딩들과 기계들의 유적들. 그리고 거의 모든 책이 불에 타버려 읽는 법도, 쓰는 법도 모르는 인간들, 모든 기술을 잃어버려 다시 중세시대로 돌아온 인류. “책이 어떻게 다 불에 타버릴 수 있었을까? 그리고 책이 다 없어져도 인간은 자기가 만들거나 배운 기술을 다 알고 있는데, 기억으로 다시 만들면 되지! 책도 다시 쓰면 되고...”라고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의 개요를 읽고 나서 먼저 든 나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소설 자체를 읽어 보니 책이 전쟁 때 우연히 타버린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일부러 태워버린 것이었다. 핵전쟁이 일어나서 대부분 사람이 죽었다는 것, 환경이 완전히 파괴됐다는 것이 인간의 탓이라고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책의 탓을 해서 태워버렸다. 

 

"날카로운 방전음이 들렸다. 갑자기 눈멀 정도로 밝은 빛이 지하실 안을 홍수처럼 휩쓸었다. 지난 천이백 년 동안 볼 수 없었던 놀라운 빛이었다.

 

내려오던 사람들이 계단 가에 멈춰섰다. 톤 따데오는 자기 모국어로 탄성을 지르며 헐떡였다. 그는 한 걸음 물러섰다. 수도원장은 지하실 실험을 본 적이 없었고, 실험결과를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믿지도 않고 있었다. 그는 얼굴이 창백해졌고 하던 말을 맺지 못하고 말은 잊은 채 멍하니 있었다. 톤 따데오의 비서는 순간적으로 경악하여 몸이 얼어붙었다가 갑자기 "불이야!" 라고 외치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1)

 

  이 장면은 소설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이 일반 램프를 보고 엄청난 충격으로 반응하는 장면이다.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 이제 신기하지도 않은 단순한 램프가 충격의 대상이 되는 미래는 밀러가 그린 몇백 년 후의 풍경이다. 너무나 익숙해진 램프인 만큼 이러한 미래를 믿기가 쉽지 않다. 물론 밀러는 독자를 더 끔찍해 하고 두렵게 만들기 위해 미래의 절망에 대한 자신의 상상을 극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묘사에 진실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인간에게 자신의 탓을 인정하는 것보다 남의 탓을 하는 것이 더 편하기 마련이다. 불편한 진실보다 거짓된 마음의 평화를 택하고 받아들이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다행히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실수를 고쳐주는 사람도 존재하는 법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타지 않은 책을 찾아 보전하는 수도사들이다. 인류의 희망인 지식을 살려주기 위해 그들은 외워서 다시 써서라도 책을 살리는 작업을 한다. 인류를 살려주는 사람들이 수도사라는 것이, 즉 종교적인 사람들은 결국 구원자라는 디테일이 이 책의 강조점이 아니다. 어둠 속에도 불이 생길 수 있다는 점, 즉 절망 속에도 희망이 항상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 포인트다. 희망이 안 보일 때도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 책에서 가져갈 수 있는 교훈이다. 밀러의 작문 스타일 자체도 어둠 속에 빛나는 램프 같다. 전쟁, 절망, 아포칼립스, 무지... 이러한 무거운 주제에 관해 씀에도 불구하고 그는 코미디적인 요소를 글에 추가한다. 등장인물인 수도사들의 행동은 때로는 어리석고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매우 이상하다. 그러한 비극에 대한 희극적인 서사가 독자들에게 꼭 무겁지 않고 오히려 가벼운 독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특히 포도 나뭇가지와 케루빔으로 장식된 회로도들과 엄청나게 귀한 유물이라 불리는 쇼핑리스트가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리보위치를 위한 찬송>을 읽고 나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가끔 시간이 없어서 친구들과 놀러 갈 수 없을 때 슬프고 시험을 잘 못 봐서 슬프기도 하다. 그런 소소한 일들 때문에 우울하거나 불안할 때 꼭 <리보위치를 위한 찬송>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편한 옷을 입고 편안한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이동하며 마음껏 공부도 할 수 있고 원하는 것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래서 슬플 때나 힘들 때 “이렇게나 편한 세상에서 사는 것도 큰 행복이고 큰 축복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는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나서 사는데, 나는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한다. 다른 사람들도 이 책을 읽고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에 관한 생각을 좀 해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같은 끔찍한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인류의 숙명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운명이라는 것을 늘 기억했으면 좋겠다. 

 

  전쟁에 참여한 밀러는 인류에 대한 희망을 잃은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소설을 해피엔딩으로 끝내지 않는다. <리보위치를 위한 찬송>의 시작은 핵전쟁 후로 어두움과 무지로 빠진 26세기의 배경이지만 마지막 화의 배경은 기적적으로 차근차근 모든 지식을 다시 회복시켜 21세기보다 더 발전한 38세기의 문명이다. 핵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이미 알고 있는 그 문명은 다시 핵전쟁을 시작한다. 살아남아서 다른 행선에서 새롭게 삶을 시작하기 위해 수도사 몇 명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우주선으로 올라간다. 그들이 지구를 떠나고 배경에서 죽은 새우들이 해변으로 씻겨진다. 그리고 매우 배고픈 상어 한 마리가 아주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 유일하게 살아남게 된다. 이러한 피날레로 밀러는 1차 세계 대전 이후 2차 세계 대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까지 일어났기 때문에 전쟁이라는 용서할 수 없는 실수가 인간의 숙명이라고 보여주고 싶어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희망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1차 세계 대전, 2차 세계 대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가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잊어버리지 않고 꼭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리보위치를 위한 찬송>은 우리에게 상기가 될 것이다.

 

 

 

1) Miller, Walter M.,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 박태섭 옮김, 서울: 시공사(2000), p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