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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1호] K선생의 어머니, 드디어 역사에 우뚝 서다

K선생의 어머니와 일본에서 온 서류들

 

전 MBC라디오 PD 조 정 선

 

K선생과 나는 SNS 친구 사이다. 문사철(文史哲) 다방면에 독서 이력을 가진 K선생은 나의 온라인 공간의 스승이기도 하다. 일주 일에 평균 4~5차례 올라오는 그의 서평(書評)을 보고, 난 언제나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무엇보다 하루이틀만에 어찌 책 한권을 뚝딱 읽어낼 수 있으며, 그 내용을 머릿속에서 편집하여 적지 않은 분량의 글로 녹여낼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어딘가에 썼듯이 자신은 읽고 쓰고, 음악 듣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이해된다. 아무튼 내게는 그의 독서 감상문을 읽는 것이, 하루 일과 중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 중 하나가 됐다.

 

그런데 작년 가을에, K선생에게 제대로 신세를 진 일이 생겼다. 내가 37년간 지상파 방송사에서 PD로 일하다 정년퇴직을 하고, 동해안 해파랑길 770km를 걸은 여행기 <퇴직 일단 걸었습니다>를 책으로 출간했는데, 홍보에 도움을 받기 위해, 슈퍼 인플루언서인 K선생에게 리뷰를 의뢰한 거다. K선생은 이렇게 부탁받은 책이 워낙 밀려있어서, 금방은 어려울 것이라며 미안해했다. 하지만 어쩐 이유에서인지 책을 보내주고, 불과 열흘 남짓 지났을 때, 그의 매력적인 독후감을 접할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개수의 ‘좋아요’가 달렸고, 책을 사보겠다는 이도 많았다. 이번에는 내 쪽에서 갚아야 했다. 그렇다고 선물 따위로 환심을 살 수는 없는 노릇. 어느 순간 K선생이 페이스북에 올린 K선생의 어머니 에 관한 글 하나에 시선이 꽂혔다.

 

(중략) 일본 출장을 갈 때 엄마가 비뚤비뚤 주소를 적어줬다. 엄마는 오사카부 나카가와지쿠에 살았고, 자신은 유게 국민학교에 다녔다고 했다. 그러나 오사카에 나카가와지쿠는 없었다. 그녀가 다녔다는 유게 국민학교는 후쿠오카에 있었다. 나는 오사카를 허깨비처럼 걸어 다녔다. 나카가와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현역 시절 K선생이 일본으로 출장을 갈 때마다, 재일한국인으로 태어난 모친은 딸에게 태평양전쟁 전에 당신이 다니던 학교를 찾아보라면서 채근했다. 아마 이런 속내를 전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너희들이 날 무시할지 몰라도, 내가 일본에서 초등교육만큼은 확실히 받은 사람이야!” 상상이 여기까지 미치니, 갑자기 내 안에서 K선생 어머니의 어린 시절 흔적을 찾아드리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치는 거다. 그것은 흔적이라기보다는 실은, 그녀의 프라이드이며 남은 삶을 위한 원동력이 될 수 있을거란 생각까지 들었다. 대학 때 일본어를 배웠고, 연구원으로 또 주재원으로 여러 해를 경험해서, 일본 전문가를 자처하는 내가 아니면 누가 하랴! 게다가 다행인 것은, 어머니가 95세이시지만 정신이 또렷하고 정정하시다. 이렇게 모녀에게 뜻밖의 기쁨을 드리며 신세를 갚는 것도 좋지 하며, 바로 착수에 돌입했다.

 

먼저 일본인이 가장 즐겨 쓰는 포털 Yahoo Japan에 들어가 오사카에 ‘나카가와지쿠’란 곳이 있는지 찾아봤다. 과연 그런 지명은 없었다. 뭔가 잘못 기억하고 계신 게 분명했다. 일단 연음(軟音)과 격음(激音)을 헷갈려 하셨을 수 있으니, ‘나카카와치쿠’란 곳이 있나 다시 검색. 그랬더니 ‘나카카와치쿤’이란 옛 지명이 나타났다. 한자로 쓰면 中河内郡으로, 패전 이후에 행정구역 및 명칭 개편으로 현재는 그런 이름은 쓰고 있지 않으며, 동오사카(東大阪)와 야오시(八尾市) 지역을 말한다는 설명이 곁들여졌다. 그러니 K선생이 출장 때 수소문했어도, 허탕을 칠 수밖에. 이번에는 ‘유게 초등학교(소학교)’를 찾을 차례. 유게(ゆうげ)라고 쓰고 ‘학교’로 검색어를 쳐 넣으니, 엉뚱한 수산고등학교가 나오는 거다. 이게 아닌데? 하다가, 우리처럼 두음(頭音)법칙을 적용하지 않는 일본어 발음상, 어머니가 혹시 ‘류게’를 ‘유게’로 잘못 기억 하고 계신 게 아닌가 추리해 보았다. 그리고 ‘류게 초등학교(りゅ うげしょうがっこう)’ 로 검색해 보니 찾으려는 게 나오는 거다! 한자로 쓰면 龍華(용화)다. 이 이름을 보면 어딘가 불교와 관계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는데, 자료를 찾아보니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에도 등장하지만, 7세기 일본을 이끌던 성덕태자(太子)가 지은 대성승군사(大聖勝軍寺)라는 절터에 세워진 학교였던 거다. 그런 뼈대 있는 학교를 K선생 모친이 다니셨다니! 뿌듯함을 느끼며, 포털사이트에서 현재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와 학교의 사진 등을 다운 받아 두었다. 그리고 K선생에게 어머님이 원하시던 학교의 면면이 담긴 자료를 보내드렸더니, 예상대로 놀라워하며 감동해 한다. 그걸 인쇄해서 주말에 어머니께 전해드리기로 했다니 나 역시 얼마나 기쁜지!

 

여기서 얘기가 끝나면 재미없다. 방송PD 일을 37년이나 했던 사람으로서 흥미진진한 후속편을 어떻게 준비 안 하겠는가 말이다. 즉시 K선생에게 ‘끝날 때까지 끝난 건 아니다(It’s ain’t over, ’til it’s over)’라고 메일을 보내며, 본 게임으로 들어가 보자고 제안했다. 류게 초등학교에 정식으로 요청해서, ‘졸업증명서’ ‘학적부’, 거기에 가능하다면 ‘졸업사진’까지 받아보겠다는 심산이었다. 학교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외부인의 문의를 받는 메뉴가 눈에 띄었다. 그저 다짜고짜 ‘여기 95세의 재일한국인 출신 할머니가 계신데, 돌아가시기 전에 당신 삶의 궤적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이 학교에 다니셨다고 하니, 그것을 증명할 자료를 받을 수 있겠나’하고 요청서를 올릴까도 생각해 봤으나, 아무래도 망설여졌다. 일단 일본인들의 타고난 외국인에 대한 배타성(실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에 더 가깝다)과 최근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한일관 계를 고려하면, 직접적이고 공식적인 교섭이 안이한 접근이 아닐까 하고 느껴졌던 거다. 좀 더 주도면밀하게 하자! 마침 일본 환경성(우리나라의 환경부)에서 고위직으로 은퇴한 지인이 있으니, 그를 통해 일을 추진하는 편이 나을 듯 싶었다. 그에게 그간의 과정을 설명하고,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노인의 절절한 사연을 이메일로 보내니, 이 일본인도 흔쾌히 돕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일을 추진함에 있어 힘든 난관은 여전했다. 첫째는 엄격한 개인정보 보호법이다. 누구든 함부로 공공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개개인의 인적 사항에 접근할 수 없으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본인이 신분증을 지참하고 관계기관을 직접 방문해야 열람이나 서류 발급이 가능하다. 그런데 95세 노인이 오사카 현지를 방문한다? 코로나가 창궐해 출입국까지 막혀있는 이때에? 둘째는 학교의 정보관리는 교장 이하 교직원의 독자적인 책임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각 지방교육위원회의 협조를 반드시 얻도록 돼 있었다. 모르면 돌아가라 했던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을 도와주겠다는 일본인 친구를 대리인으로 세워 위임장을 만들기로 했다. 이렇게 위임장을 한글과 일본어로 작성해서, 학교와 교육위원회 양쪽에 모두 보냄으로써 일단의 수속을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현지와의 협의를 통해 개인의 역사를 찾아주려는 계획은 점점 구체화돼 갔다. 다만 결정적인 확인이 필요했던 것은 어머님의 이름과 생년월일이었다. 먼저 성함의 경우, “자기 이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하며 혹자는 고개를 갸우뚱할지 모른다. 하지만 K선생의 어머니는 지금부터 80년 훨씬 전에 한시적으로 일본 이름을 썼고, 전쟁이 끝나 귀국한 이후로는 한 번도 불러지지 않았으니 잊힐 만하지 않았을까. 그러니 어머니가 ‘다카미네 미츠코’라고 썼던 것 같다고 기억하고 계신 것만으로도 참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중에서 성씨(姓氏) 인 ‘다카미네’는 한자(漢字)를 모른다고 했고, ‘미츠코’만 ‘光子’였다고 했는데, 이것만 해도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란 느낌이 오는 거다. 여기에 더욱 다행인 것은 ‘다카미네’라는 성씨(姓 氏)가 한자로 딱 두 가지(高嶺, 高峰)로만 표현될 수 있는 것이라서, 찾기가 수월해진 거다. 요컨대 그분의 기억이 맞는다고 가정할 때, 성함을 한자로 표기하면, 高嶺光子 혹은 高峰光子 중 하나가 되는 셈이다. 다음으로 생년월일은 현재 주민등록상에 올라 있는 대로, 27052X로 기재해서, 현지 학교와 교육위원회 측에 통보해 줬다. 이제는 기다리는 일만 남은 거다.

 

이후 열흘쯤 지났을까? 류게 초등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과연 1940년 초의 학적부에 그런 이름의 학생이 있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이름 아래 기재된 생년월일이 자기들이 한국에서 통보받은 것과는 달리, 5월생이 아닌 9월생이라며, 날짜를 특정해 주지 않은 채, 다시 한 번 확인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한 어머니의 답은 ‘한국과 일본 생일이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귀국 전에 뭘 썼는지는 생각 안 남’이었다. 내가 의견을 덧붙이길, 90대 중반이 된 연로한 분에게, 80년이 훨씬 지난 당시의 일본 초등학교 학적부에 기록된 생일을 기억해 보라고 어떻게 요구할 수 있나? 그것은 무리한 행동이 아니라 무례한 일이라 했다. 성별이 맞고 1927년이란 해가 딱 맞아떨어지며, ‘다카미네 (高峰)’라는 흔치 않은 성을 가진 인물이 본인이라는데, 이쯤에서 인정하고 증명서를 발급해주는 게 도리가 아니냐고 덧붙였다. 그리고 또 2개월쯤 기다렸을까? 지난 3월 말에 대리인으로 지정한 일본 지인에게서 드디어 고대하던 뉴스가 도착했다. 학교 측과 교육위원회가 회의를 거듭한 끝에, 의뢰인의 요청을 들어주기로 했으며, 졸업증명서, 졸업증명대장의 복사본, 졸업앨범에 기재돼 있던 학교의 사진 등을 보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에는 졸업앨범을 만들지 않아서, 어머니의 개인 사진에 대한 기대는 아쉽게도 무산되고 말았지만, 지난 5개월 공들인게 큰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가끔 나는 일본에서 도착한 K선생 어머니의 80년 전 개인 역사 3점을 보고 이러저러한 상상에 빠진다. 환갑이 지난 나이에 성큼성큼 다가오는 삶의 종착지에서, 난 무엇을 그리워하며, 어떤 기억을 마지막까지 간직하고자 할까? 뮤지컬 “캣츠(Cats)’에 나오는 고양이들은 모두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손에 쥐려고 저마다 이승에서 자기가 얼마나 멋진 생을 살았는지 뽐내지만, 구원을 얻은 이는 유흥가 출신의 늙은 캐릭터 ‘그리자벨라’였다. 그 이유는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심에 대한 보상이랄까. K선생의 얘기로는, 95세의 어머니가 졸업 증명 서류를 받아들자 사납고 거칠은 표정이 양처럼 순해지셨다고한다. 마치 구원의 길을 열어드린 것 같은 즐거운 착각에 빠진다. 더 오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