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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0호] 어른이 되어 가는 것에 대하여: 영화 ‘틱, 틱…붐! (Tick, Tick…Boom!)’

정찬미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

 

서른의 기표에 담긴 ‘진짜’ 어른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서른 살은 어떠한 의미일까. 서적, 드라마, 영화, 노랫말까지, 서른 살을 묘사하는 대중문화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서른 즈음에>, <서른이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생각이 너무 많은 서른 살에게> 등 과장을 보태, 서른 살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글들이 넘쳐난다. 다양한 이미지와 글에 담긴 서른 살은 저마다 다른 모양을 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릴 적 여러 색으로 칠했던 상상의 이미지들과 전혀 다른 색으로 뒤덮인 사뭇 낯선 자신의 모습에 위로를 건네거나, 어쩌면 익숙해져 버린 자신의 꼴에 대해 수긍하고 타협한다. 대중 문화 안에 담긴 서른의 기표 안에는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과 사회적으로 추구해야 할 이상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까. 따라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위로와 타협을 앞다투어 전하였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서른 살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상상 속 서른 살은 꿈꾸던 일을 통해 성공을 한 모습, 멋들어진 자동차를 타고 안락한 자신의 집으로 귀가하는 모습, 경제적, 사회적 성공을 성취한 ‘진짜’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을 심산이 크다. 서른 살이라는 기표 안에는 단지 개인적 차원의 상상만을 담고 있지 않다. 이 안에는 다양한 층위의 사회적 상상이 담겨있다. ‘진짜’ 어른이라면 응당 이래야 한다는 상징적인 무게가 담긴다. 따라서 청춘을 경유하여 도달한 서른 살은 어떤 노력을 했는지보다 어떤 수확을 얻었는지 답을 요구받는다. 다가오는 마감일에 맞춰 자신의 청춘의 결과물을 제출해야 하는 서른 살은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진짜’ 어른을 포기한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에 쫓기어 오롯이 어른의 외형만을 갖춘 나이만이 남는다. 

 

출처 : 씨네21

 

서른, 틱(tick), 틱(tick) 공명하는 시계초침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것이라곤

 

  서른 즈음에 놓이니,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마감일에 쫓기어 무언가 제출해야 하는 사람처럼 초조해지곤 한다. 도대체 누구에게, 무엇을 제출해야 하는 것인지 응당 답을 내릴 순 없다. 그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앞에 두고, 더 빠르게 해야 할 일을 정신없이 해낼 뿐이다. 이런 상태에 놓이게 되면, 낯설고 폐부를 찌르는 문제 제기에 둘러싸여 나의 꼴은 한껏 납작해진다. 따라서 나아가야 할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다. 이즈음, 영화 <틱틱붐>을 만 났다. 평소 보고 싶었지만, 학기 중 시간의 여유가 없어 보지 못했던 영화였다. 방학이 막 시작될 무렵, 해야 할 일은 잠시 제쳐두고 미뤄왔던 영화를 볼 심산이었다. 

 

  영화 <틱틱붐>은 동명 뮤지컬 <틱틱붐>을 영상으로 담아냈다. <틱틱붐>을 창작한 조너선 라슨은 뮤지컬 <렌트>의 작가로 유명하다. 비록 많은 작품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의 유고작 <렌트>는 뮤지컬의 형식을 바꿨다고 평가받을 만큼, 조너선 라슨은 뮤지컬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틱틱붐>은 서른을 목전에 둔 조너선 라슨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조너선 라슨은 뮤지컬을 하기로 결심한 날부터 예술가로서 자신에 대해 자부했다. 그리고 창작 외에 자신의 일상을 포기할 만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사랑했다. 그런 그도 서른을 목적에 두고서 마감일을 앞둔 사람처럼 초조한 마음이 크다.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사랑하는 일이지만, 자신의 손에 잡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의 초조함 이 더해질수록 틱(Tick), 틱(Tick), 틱(Tick) 시계 초침 소리가 공명 한다. 언제 ‘붐(Boom)’ 하고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손에 쥔 채 말이다. 

 

 

서른에 대한 사회적 상상, 탈각된 삶의 의미 

 

  <틱틱붐>은 그의 작품 <틱틱붐>과 <렌트>가 나오기 몇 년 전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너선 라슨이 막 서른 살 생일을 몇 달 앞둔 시점이다. 8년 간 매일 작업을 하며, 이 외의 시간에는 식당 일을 하며 버텨왔다. 말이 8년이지, 20대를 온전히 바친 것이다. 그러나 수확물은커녕, 8년 간 공들여 쓴 <슈퍼비아>는 뮤지컬 제작사에서 여러 차례 퇴짜를 맞는다. 그런 그에게 <슈퍼비아>를 공연할 수 있는 신작 워크숍 기회가 찾아온 참이다. ‘서른. 넌 끝났어!’라고 자신에게 되새기는 그에게, 슈퍼비아 워크숍은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뮤지컬 창작가 손드하임이 데뷔한 나이보다 한참 뒤처졌지만 말이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슈퍼비아>에 쓰일 곡이 잘 써지지 않 는다. <슈퍼비아> 속 선택의 기로에 놓인 주인공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드러내는 ‘터닝포인트’의 의미다. 마치 서른을 목전에 둔 그를 둘러싼 복잡한 관계 변화 양상을 묘사하는 듯하다. 조너선 라슨에게 달라진 거라곤 서른이라는 나이밖에 없지만, 그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는 변해간다. 그와 같은 꿈을 지향하던 친구 마이클은 연극을 그만두고, 광고 회사에 취업하여 점차 자리를 잡아간다. 그의 연인인 수잔은 뉴욕의 정 반대편에 위치한 바닷가 근처의 한적한 도시에 직장을 구한다. 그의 오래된 꿈의 상징인 뉴욕을 떠나, 더 안정적인 삶을 찾자고 제안한다.

 

  이러한 변화의 조짐 때문인지, 언젠가부터 조너선은 누군가에게 좀처럼 자신을 소개하기가 어렵다. ‘서른’, ‘예술가’ 그 간극에 미묘한 시선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이 미묘한 시선은 ‘진짜’ 어른이 되지 못한 채, 그저 시간의 흐름에 쫓기어 입은 어른의 옷을 입은 조너선을 발가벗긴다. 여기서 서른 살의 기표 안에 담긴 사회적 상상이 피어오른다. 혹시 마이클처럼 고액 연봉을 받는 직업, 깨끗하고 안락한 집과 자동차가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경제적인 성공과 사회적인 지위가 진짜 어른의 모습인가? 

 

  현재 그에게 남은 건 무엇일까? 연인인 수잔에게도, 병세가 깊어져 위급한 친구에게도, 8년 간 달려온 <슈퍼비아>를 향해서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는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는 처지다. 일요일 오전 9시 문댄스 식당에 묶긴 웨이터일 뿐이다. 조너선이 차곡차곡 쌓아 올린 삶의 의미와 가치가 탈각된다. 

 

 

“또 쓰고 계속해서 쓰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조너선은 서른의 경계에 서서 끊임없이 고뇌한다. 이 고뇌에 대한 결말은 영화적 상상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숙제로 남아있던 <슈퍼 비아> 넘버는 무사히 극적으로 만들었고, 워크숍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극적 내러티브는 거기서 그친다. 그의 작품은 ‘상업적 가치’가 없기 때문에 브로드웨이 무대로 실현되지 못한다. 그의 뮤지컬 작가로서 삶은 연장되었지만 그게 다였다. 그의 고뇌가 끝이 난 것은 아니었다. 매 순간 그의 고뇌는 이어진다. 하지만 조너선은 끊임없이 ‘다음 작품을 쓰고, 그게 끝나면 또 쓰고, 계속해서 쓰기로’ 마음을 먹는다. 

 

  조너선의 이야기가 서른의 기표를 전유하는 모든 청년들에게 무엇을 해야한다는 제안이나 대안을 제시하진 않는다. 어쩌면 어떤 이들에겐 조너선의 다분히 예술가적인 면모가 부각되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틱틱붐>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적어도 나에게는 큰 의미다. 이 영화는 단순히 예술가의 고뇌나 선택의 순간에 ‘포기하지 말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상상에 기댄 서른의 기표를 전유하는 모든 이들에게 ‘진짜’ 어른에 대한 의미를 다시 채워 넣는다.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과업은 끊임없이 사회적 욕망과 결합하여, 우리네를 옮아 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가’ ‘물살을 헤치고’ ‘마음에 귀 기울여서’ 그저 삶을 견디어 내는 것, 또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