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터뷰

[165호]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하죠.” - 조수진 변호사

 

지난해 방영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기억하는가? 우리는 이 드라마를 통해 변호사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변호사를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만난다. 인생에 있어 송사에 휘말리는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시청자가 우영우를 보며 ‘힐링’을 받았다고 말할 때, 그들이 처한 시스템의 문제를 제기하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또 다른 변호사가 있다. 그녀는 지칠 때 ‘김밥’ 대신 ‘소고기’를 먹는다.

 

인터뷰 및 편집 유 지 연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조수진이라고 하고요. 법무법인 위민에서 변호사로 일을 하고 있고, 변호사가 된 지는 올해로 17년 차가 되었습니다. 방송에도 출연하고 중학생용 독서 잡지에 글도 연재하지만, 본업은 변호사입니다. 대구에서 태어났지만, 서울에 올라와서 산 지 20년이 넘었고요. 경상도 출신이지만 민주당 당원입니다. 

 

 

변호사라는 직업을 선택하신 계기가 있나요?

 

저의 고등학교 때 꿈이 기자였어요. 지금도 기자에 대한 선망이 있을 정도인데요. 집에서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하는 걸 반대하셔서 ‘법을 공부하면 기자를 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 란 단순한 생각에 법대에 진학했어요. 입학해선 주변 친구들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사법시험을 준비하게 됐지만 판사, 검사가 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러던 중 한 번은 부모님께서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한 일이 생겼어요. 그때 제가 부모님을 대리해서 재판에도 이기고 돈도 받아냈는데, 그 경험이 굉장히 짜릿했어요. 내 글로 인해 좋은 결과가 나오고, 성과가 나서 무언가를 바 꿨구나. 이 경험을 계기로 사법시험공부도 열심히 하고, 사법연수원도 들어갔어요. 졸업 전에 변호사 취업을 했고, 자연스럽게 변호사가 된 것 같아요.

 

 

변호사님의 전문 분야는 무엇이고, 선택하게 된 이유가 궁금해요.

 

저는 형사 재판을 주로 하고 있어요. 변호사는 사실 전문 분야가 찾아온다고 말해요. 그러니까 내가 뭘 선택해서 그걸로 밥벌이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느 날 사건이 찾아오고, 그게 반복되고, 알려져서 점점 더 많은 사건을 맡게 되고, 그러면서 전문이 되는 경우가 많거든 요. 언젠가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많은 시기에 ‘딱 1년만 국선 전담을 해보자’ 생각하고 국선 전담 사무실에 들어갔는데 의외로 형사 분야가 제 적성에 맞는 거예요. 그곳에서 엄청나게 많은 수의 형사재판을 접하게 됐고,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형사 전문을 하게 됐어요.

 

 

서강 형사재판의 매력이 뭘까요?

 

사실 많은 변호사들이 형사 전문으로 하는 걸 꺼리세요. 민사 재판은 돈이 오가고, 가사재판은 가정에 대한 일반 사건을 다루는 반면 형사재판은 잘못되면 사람이 잡혀 들어가거나 전과가 생겨서 해고되거나, 구금될 경우에는 한 가정이 파탄나는 경우가 많거든요. 다른 재판에 비해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승부사 기질이 필요해요. 그런데 부담을 느끼는 변호사는 형사 재판에 적합하지 않죠. 그런데 저는 오히려 어떤 사람의 인생에 좀 더 큰 역할을 한다는 점이 매력으로 다가오더라고요. 

 

 

변호사님께 파이터 기질(?)이 있다는 말씀이시죠?(웃음)

 

그렇죠. 다른 재판에서 서면이 우선시된다면, 형사재판은 구두변론이 우선이거든요. 그래서 구두변론과 서면을 함께 준비해야하는 수고스러움이 있지만, 나름 재미있어요. (웃음)

 

출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민변 소속 변호사로 꾸준히 활동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민 변에 대한 소개 부탁드려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이 풀네임이고요. 민변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 증진을 위해 모인 변호사들이 1988년 창립한 단체예요. 독재정권 하에서 양심수나 권력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처벌받거나 소송에 휘말리는 사람들의 사건이 많았을 시기죠. 이런 ‘시국사건’을 목숨 바쳐서 하시던 선배 그룹인 <정법회>가 있었어요. 그다음 나라를 걱정하는 젊은 변호사들을 중심으로 한 <청변>이 있었 고요. 두 그룹이 합쳐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라는 임의 단체를 만들었고, 당시에는 50여 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1,300명이 넘는 전국 조직으로 발전했어요. 현재는 인권 변론뿐만 아니라 각종 공익소송, 입법 및 정책 제안을 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고 있어요. 박근혜 탄핵 정국에선 광장에 나가 시민들이 불법 구금을 당하지 않게 보호하는 활동을 했고요. 단순 변호사 단체를 넘어, 또 하나의 시민단체의 위치를 점하게 됐습니다.

 

 

작년까지 민변의 사무총장직을 맡으셨는데, 코로나 19 시국에 활동 제한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많았죠. 제가 민변 사무총장 제안에 고민 없이 수락한 이유는 ‘온 세상 시민단체를 다 만나보겠다!’란 생각 때문이었거든요. 많은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하면서 그분들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결과적으로 나 자신도 성장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겠단 생각이 있었는데, 코로나19 상황에서 만남이 제한되다 보니 당초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줌(zoom) 회의를 통해서는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직접 만나 눈과 눈을 마주치면서 대화할 때 생기는 공감대라는 게 있잖아요.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없으니, 숙의(熟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회의가 상당히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있어요. 특히 신입회원들과의 정서적 교류가 힘들었어요. 그분들은 민변으로서의 정체성을 체험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계기가 없다보니 민변을 단순 회의체 정도로 인식하는 것 같더라고요. 실제로 민변의 선배들을 만나보면 그동안 수많은 변론으로 다져지고,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이겨낸 아우라가 있거든요. 그걸 배워야 하는데 이분들은 그게 없는 거예요. 코로나 기간에 들어온 신입회원에게 이런 부분들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래도 이 사안은 꼭 해결했어야 하는데, 아쉬움이 남는 활동이 있으세요?

 

민변에서 차별금지법과 국가보안법 철폐 두 가지를 주력 사업으로 정했어요. 당시 문재인 정부의 의지, 사회적 분위기도 충분히 가능 한 상황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특히 국가보안법 중에서 찬양 고무죄 같은 것은 진작 사라져야 했을 법이죠. (편집자 주: 이 조항은 반국가단체를 찬양·고무하거나 이적표현물을 제작·판매할 경우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해 그동안 독소조항으로 꼽혀 왔다.) 어떻게 보면 쉽게 끝날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화력이 모여지지 않고 지지부진하면서 문재인 정부가 끝났고, 지금은 오히려 더 어려워졌죠. 차별금지법도 언제 논의가 재개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고요. 코로나19 시국이 아니었다면 광장에 모여서 그 두 가지 법은 반드시 통과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아요

 

 

차별금지법에 대해선 국회 앞에서 법 제정을 위한 기자회견도 하시고, 토론회 등을 개최하시는 등 많은 노력을 하신 걸로 기억하는 데요. 차별금지법 제정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네. 당연히요. 저는 단지 시기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물론 통과가 안 되고 오랜 시간 제자리걸음인 건 알고 있어요. 남녀고용평등법이 1988년도부터 시행됐거든요? 이 법이 차별금지법과 내용이 거의 같아요. 여성이라는 이유로 고용 분야에서 차별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당 시 인구 비례로는 여성이 절반을 차지했지만, 사회 권력층에서 바라봤을 땐 소수자에 속했죠. 차별금지법에선 소수자 그룹에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성적지향, 인종, 피부색, 언어’ 등의 이유를 넣고 고용에서 차별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찌 보면 여성보다 좀 더 소수자에 속하는 그 룹을 차별하지 말라는 당연한 소리죠. 이걸 고용 이외에 문화적 영역, 사회적 영역, 정부 영역, 서비스 이용 영역 등 5~6개 영역으로 넓히면 그게 차별금지법 내용하고 거의 비슷합니다. 차별을 판정하는 공식기구를 두고, 차별적 행위가 일어나면 조사를 하 고, 차별로 판정이 될 경우 과태료를 부과하거나 심한 경우 시정명령을 내리고,,, 다만 차별받을 수 있는 그룹이 여성으로 한정되는 게 아 니라 다른 그룹까지 넓히자는 거죠. 저는 우리 사회에서 남녀고용평등 법을 수용했을 때 이미 ‘어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의 특성 때문에 차별하면 안 되는 거구나.’라는 논의에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차별금지법이 통과가 안 되는 이유는 극단적인 혐 오 세력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요. 국회에 있는 정치인들이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나치게 무서워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출처: Law Leader]

 

지난 5월 10일, 윤석열 정부가 취임 1주년을 맞았어요. 긍정 평 가 먼저 부탁드려요.

 

생각보다 긍정적인 부분은 쉽게 떠올라요. 기대치가 낮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직 ‘대단히 큰 잘못이다’라고 할 만한 부분은 없었던 것 같 아요. 정치 초년생이 갑자기 대통령이 됐잖아요. 걱정이 많았죠. 그런데 걱정의 무게에 비해선 무난하게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임기 초에 바지를 거꾸로 입은 듯한 모습이라든가, 빈 모니터 화면을 보면서 업무를 보는 모습을 보면서 ‘사진이 많이 찍히는 지위에 있으니 빨리 캐치를 해야 할 텐데...’ 하는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학습 능력이 있어서 생각보다는 큰 과오 없이 가시더라고요. '주 최대 69시간 노동제' 같은 여러 거친 발언들을 쏟아냈잖아요. 그게 바로 법제화되지도 않았고, 행정에 반영되지도 않았어요. 대한민국이 5공 시대와 달리 체계적인 시스템을 지닌 국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과거엔 거대 권력을 행사한 제왕적 대통령제였잖아요. 이제는 대통령 한 명 바뀌었다고 해서 우리 사회 전체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부정 평가도 부탁드립니다.

 

윤석열 정부 1년을 민주주의의 ‘후퇴’가 아닌 ‘퇴행’이라는 평이 많았잖아요. 우리 사회에서 이미 합의가 된 어떤 가치에 대해서 부정하는 발언을 너무 많이 했어요. 그동안 ‘주 5일 근무제’나 ‘저녁이 있는 삶’에 대해 사회적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합의했는데, 윤 대통령은 ‘주 69시 간 노동’이나 ‘바쁠 때 몰아서 일하기’ 같은 이야기를 하잖아요. 외교 문제도 한국이 미국·중국·일본 등과의 양자 관계를 다자외교의 틀에서 풀어야 한다는 건 한반도라는 곳에 살면서 어느 정도 합의가 된 부분이잖 아요. 그런데도 한국과 같이 북한이라는 위험 요소가 있는 나라에서 ‘신 냉전’ 외교를 편다는 것은 그간의 합의된 가치관을 뿌리째 흔드는 행보라고 생각해요. 또 대법원에서 강제노역 피해자에 대한 일본 가해 기업의 손해배상을 판정했는데, 일본 기업 대신 한국 정부 돈으로 주라며 사법부를 간단하게 깠어요. 나경원 의원이 국민의 힘 당 대표 출마 의사를 밝혔을 땐 공개적으로 “행정부의 일원임을 망각한 처사”라고 집중 난타 하기도 했고요. 어떻게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행정부의 일에 관여합니까? 삼권분립을 기본으로 하는 법치국가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이죠. 현재는 국회에서 야당이 다수 의석을 점하고 있지만, 만약 내년 총선에 서 입법 권력까지 여당으로 넘어가면 어디까지 퇴행할까 걱정이 되죠. 내년 총선이 기점이 될 것 같아요. 윤 정부 1년의 부정 평가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기본이 없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고 법조계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변호사의 업무 중 하나가 각종 위원회 활동인데요. 관세청, 국세청, 구청, 시청 단위 위원회에 변호사, 세무사, 회계사 위원들이 많은데 요. 약간 진보적이라고 찍힌 로펌에 소속돼 있는 변호사들은 다 솎아 내는 것 같아요. 윤 정부 들어서고 위원회에 들어오라는 섭외가 딱 끊겼어요. 저는 소형 로펌에 있어서 고객들이 비교적 정치색이 약하지만, 진보적이라고 찍힌 로펌들은 큰 사건이 안 들어올 것 같긴 해요.

 

 

윤석열 정부의 영향이라고 체감할 정도로 명확한 변화가 있나요?

 

네 그렇죠. 기관이 알아서 눈치를 본다고 해야 할까요. 정말 놀라울 정도로 찾는 데가 아무 데도 없습니다. 딱 끊겼어요. 그리고 임기가 만료가 된 위원회에선 연임이나 새로운 위원회의 제안 없이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고 적힌 감사패만 와요. 아무런 통보 없이 임기 만료로 그냥 끝난 거예요. 그리고 그 자리엔 윤석열 대선 캠프 출신이라든가, 대선 캠프에서 아주 작은 직위라도 맡았던 분들이 오시는 거죠.

 

[출처: 노무현 재단]

2019년 정치·시사 유튜브 ‘알릴레오’ 진행을 맡으셨어요.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아주 우연한 계기였어요. 담당 PD한테 ‘알릴레오’ 프로그램 진행자 선발전을 하는데 응모하지 않겠냐고 연락이 왔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유튜브가 이렇게까지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기라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참여하게 됐던 것 같아요.

 

 

그 당시 알릴레오가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죠. 조국 사건을 비롯해 예민한 이슈도 많았을 시기라 많이 긴장하셨을 것 같아요.

 

그 시기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려요. 스튜디오에 들어설 때 늘 긴장됐어요. 저는 방송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인데, 그 당시엔 알릴레오 조회 수가 100만 이상씩 나왔으니까요. 내가 출연하는 방송을 100만 명이나 본다는 게 실감이 안 났어요. 그땐 방송 사고만 내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주로 정치시사를 다루니까 시시각각 사안이 달라지거든요. 정치인 발언도 꼼꼼히 체크해야 해서 아침 출근길에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를 매일 들으면서 출근했어요. 밤사이 생긴 일을 팔로우 하고, 진행자의 멘트를 계속 섀도잉 했어요. 제가 알릴레오에서 진행자 역할을 하다 보니까 목소리 톤이나 발음, 질문을 어떻게 끌어가는지를 익히려고 마구잡이로 익힌 거죠. 그땐 종이신문도 보수지와 진보지를 같이 보고, 중요한 이슈는 인터넷 뉴스도 빠짐없이 체크했어 요. 법원과 스튜디오를 오가며 정말 바쁘게 지냈던 것 같아요.

 

 

갑자기 맡게 된 방송 진행 때문에 굉장히 바쁘게 지내셨겠네요.

 

그 당시에 변호사로 평온하게 10년 넘게 일을 해온 터라 일상에 무뎌져 있었던 것 같아요. 변호사 일도 편해지고, 재판에 가도 떨리지도 않고, 졸다가도 툭 치면 바로 변론을 할 수 있었어요.(웃음) 그런데 갑자기 시작한 방송 진행이 제겐 굉장히 짜릿하게 다가왔어요. 새벽에 방송 원고를 가지고 어떤 상황인가를 연구할 때면 잠도 안 오고, 피곤도 느끼지 못했어요. 새롭게 시작한 일이 제게 활력을 불어넣어 준 거죠. 지금 생각하면 2019년 알릴레오를 시작한 게 제 인생의 큰 변화였던 것 같아요.

 

 

방송 진행 이전에 법을 다루는 전문가로서의 평가를 요구할 때 가 있잖아요. 공개적으로 의견을 밝히는 데 부담은 없으셨어요?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같은 생각이 드는데요. 시사 방송에서 법조인을 다루는 태도나 법조인에게 요구하는 답변에 대해서 많은 문제의식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의사도 검진할 때 문진도 하고, 촉진도 하고, CT도 찍고, MRI도 찍어봐야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잖아요. 그런데 방송에 출연하는 법조인에겐 언론에 의해 밝혀진 단편적인 사실만 가지고 이게 유죄냐, 무죄냐, 어떤 법을 위반했냐. 등의 답변을 요구하는 경우가 유독 많아요. 그래서 맞추면 좋은 거고, 못 맞추면 능력 없는 변호사가 되는 거죠. 그렇게 사실을 판단할 증거가 부족한 사안에 대한 판단을 요구받을 때는 살얼음판 걷는 기분이 들어요. 게다가 방송에선 많은 시간을 주지 않잖아요. 단답형으로 10초 내지 20초의 짧은 시간을 주고, 두괄식으로 얘기를 시작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방송에서 서둘러 답변을 요구받고 나면, ‘법률 분야의 전문가 그룹한테 욕을 듣겠구나.’ 내지는 ‘나의 전문성을 훼손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래서 점잖으신 선배 변호사들이 방송에 나가지 않는구나 생각했죠.(웃음)

 

 

직장생활과 학업을 병행하신 걸로 압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요. 대학원 생활을 어떻게 보내셨어요?

 

저도 대학원 생활이 꽤 힘들었던 것 같아요. 논문을 쓰다가 밤에 혼자 울었던 기억도 나네요(웃음). 하지만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데 오는 시너지도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학업만 하시는 분들과는 다른 접근법이나 현장 경험에서 오는 직관적 이해가 도움이 되는 때가 있더라고 요. 처음부터 돌탑 쌓듯이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신 분들은 마지막에 전체 그림을 완성하는 데 비해, 현업인들은 전체 그림을 파악한 뒤에 부분 부분을 썰듯이 공부해야 한다고 할까요? 실제 업무에서 적용해 가며 공 부하니까 목적의식도 뚜렷하고 이해도 빨랐어요. 하지만 전업으로 공부를 하시는 분들에 비해 학교에 가는 횟수 자체가 적을 수밖에 없는 점은 힘들었어요. 그래서 전 수업 시간에 어떤 질문이라도 꼭 하나씩은 하려고 노력했어요. 제 나름의 존재감 드러내기라고 할까요?(웃음) 대학원에서 내가 배울 수 있는 최대치를 배워가겠다!라는 생각이 있었죠. 

 

그리고 저는 조세 재정 분야에서 공익 활동을 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 고민들, 예를 들면 ‘소득세를 올려도 되는가’, ‘복지 국가를 만들기 위한 재원 마련은 어떤 방식을 해야 하는가’,‘소득세의 아래 구간을 올려서 세금을 내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기업이 내는 게 맞을까?’ ‘당위적 차원에서 누가 내는 것이 옳은가를 따지는 것이 아닌 국가 경제 측면에선 어떤 방식이 옳을까?’ 등의 여러 고민이 많았어요. 시민단체에서는 구호성 주장으로 무조건 부자가 더 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잖 아요. 저는 그게 맞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의심이 드는 거예요. 그게 정말 궁극적으로 우리가 다같이 잘살게 되는 게 맞을까하는.. 전 대 학원에 진학하면 나름의 해답을 얻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학원에서 제가 느낀 건 오히려 ‘현장에 답이 있다’는 거였어요. 대학원에서 배운 건 제가 익힌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방법이었어요. 정리되지 않은 지식은 지식으로 보기 어렵잖아요. 뒤죽박죽으로 어떤 건 비대해져 있고, 어떤 건 굉장히 조그맣게 쌓여 있던 지식들이 대학원의 학문이라는 서랍장에 착착 자리 잡혀 가는 걸 느꼈어요. 내가 아는 게 어느 정도고, 모르는 게 어느 것인지를 서랍장에 정리하면서 배웠어요. 저는 그것만으로도 대학원 공부를 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면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편이에요. 그러면서 덧붙이죠. “대학원 가도 누가 무얼 가르쳐주지는 않아. 그런데 내가 모른다는 걸 깨닫는 것 자체가 배움이야.”라고요.

 

 

논문 작성에 대한 변호사님만의 팁이 있을까요?

 

흔히 하는 말이 “가장 잘 된 논문은 다 쓴 논문이다.”라는 말이잖 아요. 저도 석사 졸업에 불과하지만, 논문 한 편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죠. 예를 들면 피타고라스나 에디슨 같은? 하지만 그건 역사적인 인물의 기적같은 일이라서 역사책에서 볼 수 있는 거고요. 내 논문 한편으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기존 연구를 정리하는 수준에 그칠 가능성이 매우 커요. 논문으로 학업적인 성과를 남기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든 써내야 한다.’란 생각으로 접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가능한 한 입학하자마자 본인의 관심 분야에서 논문 주제를 빨리 정하시고, 발표 수업을 할 때마다 논문의 한 챕터씩 채워나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걸 나중에 모으면 자기 논문의 초안이 되거든요. 저도 선배한테 들은 조언인데, 논문을 쓰기로 마음먹었으면 무조건 써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하루 한쪽을 쓰든, 두 쪽을 쓰든, 쥐파 먹듯 쓰든 머릿속에 있는 생각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요. 윤문(潤文)은 나중에 하더라도 일단 종이에 옮기는 게 중요하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활동 계획에 대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글 쓰는 걸 좋아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카메라 앞에서 말하는 게 글쓰기와 똑같다고 느꼈어요. 정해진 시간 안에 내 생각을 정돈된 말로 전달했을 때 느껴지는 통쾌함이 굉장히 짜릿했거든요. 하지만 전 정치 논객도 아니고, 논평을 즐기는 사람도 아니에요. 누구 앞에서 정치를 평가하기보다는 그 결과로 만들어진 제도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그로 인해 피해 본 누군가를 구제하는데 즐거움을 느끼는 안전 지향적인 활동형(?)이거든요. 나의 안정 지향적인 전문가로서의 성향과 카메라 앞에 서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조화시킬까 고민하다가 들었던 생각이 ‘내 전문 분야인 법을 방송으로 풀어보자’란 생각이었어요. 그러니까 ‘Law Communicator’라고 할까요? 그리고 또 하나는 순수문학에 대한 로망이에요. 글쓰기에 대한 마음속 깊은 열망이 있거든요. 법조인으로 오랜 기간 글을 쓰다 보니 ‘하여’, ‘하였으나’ 등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는 일본식 문체나 법률용어가 몸에 배 버렸어요. 그런데 제가 사실 고등학교 때 문예반 출신이랍니다. 시를 썼고요. 상도 받고 제법 인정도 받았어요. 제가 국문과에 갈 거로 생각한 친구들도 여럿 있었어요(웃음). 그래서 제가 나중에 자연인(?) 이 되면 소설을 쓰고, 책을 내고 싶은 생각이 있답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선언했으니 꼭 지켜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