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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대학원 신문사
[173호] 젠더, 피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정치성 본문
김보명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교수
지난 겨울의 춥고 맹렬했던 광장의 시간을 거쳐 다시 선거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광장을 환하게 밝혔던 응원봉의 기억이 무색하리만치 막 시작된 선거에서 ‘여성’과 ‘젠더’ 의제는 침묵되고 있다. 정의당의 권영국 후보와 민주당 경선에 나선 김동연 후보를 제외한다면 성평등 의제에 대한 의견이나 입장은 거의 표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번 선거에서 보이는 페미니즘 의제의 실종은 ‘젠더갈등’ 구도로 명명되었던 지난 대선과 총선의 국면과 극명히 대비되는 동시에 지난 선거들에 대한 주류 정당들의 평가를 반영하는 듯 보인다. 민주당은 지난 대선 패배의 원인을 민주당과 ‘20대 여성’ 혹은 페미니즘 사이의 친연성, 혹은 그렇다고 믿는 대중의 인식에서부터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평등 의제가 자칫 선거의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우려 속에 함구령이 내려진 듯 삼엄한 분위기마저 감지되며 노골적으로 페미니즘을 ‘리스크’로 낙인찍는 발언에서부터 ‘여성 출산 가산점제’를 언급하였다가 선대위 직위를 내려놓게 되는 해프닝까지 일어나고 있다. 정확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젠더 이슈가 대선의 결과를 좌우할 수 있다는 우려 혹은 인식은 아이러닉하게도 페미니즘 지우기로 이어지고 있다. 다른 한편 국민의 힘은 경선을 거치면서 극대화된 내부 갈등을 봉합하느라 바쁘기도 하겠지만 애초에 이들에게 있어 젠더 이슈는 상대를 공격하는 지렛대 역할에 가까운 역할을 하는 것이라 민주당이 먼저 성평등 의제를 언급하지 않는 한 이를 다루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민의 힘 역시 주요 지지층이라 할 수 있는 아스팔트 보수나 지난 계엄과 탄핵의 정국에서 일어난 서울 서부지법 습격사건에서 나타나듯 ‘보수’를 넘어 ‘극우’의 얼굴을 갖게 된 ‘20대 남성’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청년 세대 안에서 나타나는 주류 정당에 대한 지지 성향의 차이는 성평등 및 페미니즘에 대한 20대 여성들과 20대 남성들의 입장 차이와 관련된 것으로 진단된다. 학력이나 소위 ‘스펙’에서 또래 남성들에게 밀리지 않거나 나아가 평균적으로 조금 더 높은 성취를 보이지만 여전히 노동시장에서 유리천장이나 경력단절 등과 같은 구조적 성차별을 마주하는 오늘날의 20대 여성들에게 있어서 페미니즘은 이미 삶과 분리할 수 없는 의제이자 세계관이다. 커리어 없는 삶도, 평등하지 않은 삶도 상상할 수 없는 20대 여성들에게 성평등 정책은 생필품 같은 무엇이며 페미니즘에 대한 태도는 주류 정당이나 정치인들을 선택하는 척도이자 정치성을 정향하는 나침반의 역할을 한다. 페미니즘을 키워드로 삼아 일어나는 20대 여성들의 각성과 실천의 반대편에는 흔히 안티페미니즘의 기수로 등장한 20대 남성들이 있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교육 및 노동시장, 그리고 연애 시장에서의 치열한 경쟁 속에 지치거나 나아가 화가 나 있기도 한 어떤 ‘20대 남성’들은 그 힘듦의 원인을 ‘20대 여성’들의 높아진 능력이나 그에 비례하는 눈높이로부터 찾으면서 여성혐오를 도피처나 무기로 삼는다. 소위 ‘20퍼센트의 능력있는 남자들이 80퍼센트의 여성들을 차지한다’는 인셀 식의 이성애 방정식 혹은 괴담은 이들의 좌절과 분노를 부채질하고 또 확신을 심어준다. 아버지 세대와 같은 건실한 생계부양자의 삶은 더 이상 평범한 현실도, 그렇다고 규범적 이상도 아니지만 딱히 대안이 무엇일지는 불분명하고 나아가 그 대안적 삶의 양식이 나를 행복하게 해줄지도 모르겠는 현실일 것이다. 여전히 사회적 평가와 시선이 중요하고 경쟁을 통해서 자신의 가치와 위치를 배우는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번듯한 직장과 깨끗한 신축 아파트로 요약되는 중산층 이성애적 삶의 양식은 깨지지 않는 희망이자 어쩌면 이 모든 갈등과 외로움의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오늘날 한국사회의 청년세대에게 있어서 성평등과 젠더 이슈는 첨예한 정치적 의제이자 이들이 정치화되는 핵심적인 기제이며, 나아가 이들의 정치성을 내용과 양식을 형성하는 요소로 보인다. 안보나 분배의 문제가 좌와 우 혹은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기준이었던 과거와 달리, 혹은 그에 더해서 젠더 정의는 (기후 정의와 더불어) 청년 세대가 새롭게 문제화하고 있는 정치적 과제이다. 달리 말해 소위 ‘젠더갈등’으로 명명되는 청년 세대의 성평등 문제를 한국 정치와 사회가 어떻게 다루고 통과하는지는 당장의 선거 뿐만 아니라 향후 한국사회의 정치 질서와 민주주의의 질을 좌우하는 문제일 수 있다.
20대 남성들의 보수화되었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페미니즘 때문일까? 한마디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다. 20대 남성들의 정치적 목소리가 주로 ‘안티페미니즘’으로 표출되거나 혹은 그렇게 조직되고 있다는 현실이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어렵게 만드는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20대 여성들은 페미니즘을 통해 삶의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지만 20대 남성들은 20대 여성들, 혹은 상황에 따라 86세대 남성들을 비판하거나 이들과 대립항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혹은 그 이외의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진단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이 지향하는 긍정적 가치는 ‘공정’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공정’은 이미 한국사회의 지배적 가치라 할 수 있는 경쟁의 또 다른 표현에 가깝다는 점에서 대안적 동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덧붙이자면 더욱 치열한 경쟁이 과연 ‘20대 남성’들이 동일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80퍼센트의 평범하거나 나아가 약자인 남성’들의 미래를 더 좋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믿는 이유는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다시 지난 겨울의 광장을 기억해본다. 응원봉 무리 속에서 2030남성들을 찾기 어려웠던 이유는 무엇일까? 광장에 나오느니 당장의 내 생존을 위해 투자하는 게 현실적이라는 판단이었을까? 광장보다는 디지털 커뮤니티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나 대변자를 찾아서일까? 이들에게 정치는 더 이상 희망이 아니라서일까? 20대 남성의 보수화 혹은 극우화라는 현상 혹은 서사에 대한 새로운 응답은 어쩌면 여전히 대변되지 못하는, 그리고 안티페미니즘으로 흡수되거나 대리될 수 없는 청년세대 남성들의 정치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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