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고

[108호] 송영선과 신해철의 밀월관계

호섭(석사과정)


한쪽에선 북으로 올라가라고 윽박지르고, 한쪽에선 일본으로 넘어 가라고 조롱한다. (윽박지른 쪽의 수준이야 그렇다 치고) 조롱한 쪽이 윽박지른 쪽에게 던진 남한의 부동산이 다 니들 거냐는 레토릭은 재기발랄하지만, 은연중에 내비친 남한 부동산에 대한 지분권 주장은 고루하다. 빨갱이 담론에 맞서는 친일담론. 조롱한 쪽은 모 인터넷 토론회에서 이를 두고 저질에 저질로 응수한 것이라 말했다지만, 글쎄, 과연 조롱한 쪽은‘조롱의 수사학 ’외의 다른 대응 방안을 가지고나 있는가하는 의문이 든다. 이성적인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앞에 두고 차라리 무시하거나 조롱하는 태도는 전략으로서 효율적일 수 있지만, 그 전략으로만 기계적으로 대응하는 것, 혹은‘그 전략밖에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송영선을‘수구친일꼴통’진영에, 신해철을‘좌파386빨갱이’진영에 놓을 수 있다고‘가정’(이 구분은 상당부분 제도권의 이데올로그들이 만들어낸 허구적 도식임에 분명하지만, 대중에게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범주 틀이라는 점에서 일정부분 실체를 갖고 있다고 본다) 할 때, 두 진영의 경계는‘선’이라기보다는‘벽’에 가깝다. 지워지고 재차 그을 수 있는 선이 아니라 여간해선 넘어갈 수도, 뚫릴 수도 없는 벽 말이다. 물론 경계 자체는 필요하고, 또 필요했다.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는 군사독재반공 진영에 대항해 끊임없이 자신의 경계를 확장해온‘진지전’war of position 의 역사였으니까. 하지만‘경계 긋기’가 실천적이기 위해선 동시에‘경계 지우기’가 필수적이다. 새로운 경계 긋기는 일단 경계가 지워져야 가능한 것이므로. 따라서 경계가 더 이상 지워질 수 없을 정도로 공고화 될 때, 즉 선이 아니라 벽이 될 때 경계는 그 실천력을 상실한다.

신해철에 대한 송영선의 빨갱이 공격, 송영선에 대한 신해철의 친일 공격이 적절한가 적절치 않은가, 효과적인가 효과적이지 않은가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이 둘의 치고받음은 민주화 이후 진행되어온 소위(!) 보수와 소위(!) 진보간의 싸움에 비추어 볼 때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유사한 공격과 유사한 대응의 반복, 그리고 그 순환. 이때 핵심은 이‘매너리즘’적 싸움이 두 영역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트리지 못한다는 사실, 아니 오히려 서로의 경계를 강화시켜준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진영은 적대적 밀월관계이다.‘윽박의 수사학’은 빨갱이라는‘적대’가 있음으로 자신의 안보 담론을 유지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조롱의 수사학은 수구꼴통이라는 적대가 있음으로 자신의 해방 담론을 유지 할 수 있다. 두 진영 사이의 경계-벽 쌓기는 배척과 동시에 자기 정당화를 낳은‘공동의 작업’이라고.

따라서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이 고루한 경계-벽 자체를 의심하는 일이다. 이는 윽박과 조롱 모두 각자의 영역 안에 안주하는 비실천적인 수사학임을 인지하는 것이며, 두 진영의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짜여진 정치적 프레임에서 탈피해 새로운 경계를 촉발하는 것이다. 그들의 정치를 우리의 정치로 만들기, 경계-벽을 와해할‘소통’을 욕망하기. 하지만 경계화의 방식은 송영선과 신해철의 그것처럼 경계-선을 둘러싼 진지전 방식이어서만은 안 될 것이다. 똑같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새로운 경계화의 방식은 이전 경계화의 방식과 질적으로 달라야 한다. 따라서 추가적으로 필요한 것은 무수히 많은 경계-점, 그 ‘국부적 중심’으로부터 동심원을 이루며 퍼지는‘게릴라전’,그리고 이를 통한 탈경계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