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 대학원 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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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13호] 잎 속의 검은 잎

dreaming marionette 2012. 2. 16. 21:02
고준석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이양하 선생은 초록에도 인생이 있다고 했다. 만물을 식물로 비유한다면 모든 것은 세상에 씨앗으로 던져져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펴고 잎을 채운다. 그 중 청춘은 하나하나 형태를 갖추어 완전한 빛이 되는 동시에 발랄한 담록으로 피어나는 시절이라고 한다. 이 담록의 기간은 매우 짧고 강렬하다. 어느 날 푸름에 만취해 있다가도 언제였을지 모르는 사이에 불그스레해진 잎사귀를 발아래 둔다. 그리고 초록이 회자되는 겨울 즈음에 비로소 지나간 시간이 담록이었음을 느낀다. 인간들에게도 이렇게 초록이 무르익는 시간이 있다. 그들은 그 담록의 과정을 자신들의 언어로 청춘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대한민국의 20대는 이 청춘이라는 단어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초록의 시절은 좋은 학교와 좋은 기업, 좋은 동네를 꿈꾸는데 소비된다. ‘좋은’ 이란 형용사에는 ‘남들보다’ 라는 상대적 관점이 항상 따라붙는다. 자본과 경쟁, 맹신과 불신으로 구조화된 사회에서 청춘이 지닌 신록의 빛은 더 이상 담록일 수가 없다. 20대들은 ‘어느 곳에서 사느냐’라는 질문으로 가족 내력이 평가되고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라는 질문으로 개인의 됨됨이가 평가된다. 재력과 학력으로 얼룩진 어두운 청춘, 이는 분명 담록이 아닌 담암(暗)의 빛이다. 

방황하는 신자유주의는 이 담암의 20대를 결정짓는 대표적인 요인이다. 하지만 사실 이 요인의 주인은 20대가 아니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경쟁, 학력, 자본, 세습을 직접 선택한 적은 없다. 아이가 돌잔치에서 돈을 집기를 원하는 사회적 배경이 그들을 링 위로 던져놓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 링 위의 규칙은 오직 ‘남보다 잘하는 것’이기에, 승자들만이 어느 곳에 사느냐 혹은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 라는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 특권을 독식한다. 남보다 좋은 것들을 얻은 이 승자들은 더 이상 방황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시커멓게 변한 잎을 자랑스레 내보이며 자본과 경쟁이 지배하는 사회와 ‘열애’를 시작한다. 의지와 상관없이 경쟁에서 ‘열외’된 자들이 링 곁을 배회하는 데도, 수년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책과 펜을 잡았던 이들은 패자에게 손을 내미는 승자의 여유조차 베풀지 않는다. 약간의 남은 양심에 기대어 어떻게 손을 내밀지 고민하지만, 대부분 어색한 감정에 슬그머니 눈을 감는다.

결국 젊음이 지닌 초록의 열정은 자신이 열외 되지 않는 방법을 강구하는 데에만 소모되고 만다. 그리고 경쟁에서 몇 발 앞선 자들은 열외 된 자보다 우월하다는 오만에 빠진다. 끝없는 경쟁을 통해 ‘너 보다는 좋은’이란 배타적 성공의식에 사로잡힌다. “왜” 라는 질문은 한 적이 없기에 패자들이 왜 열외 되었는지 조차 알 턱이 없다. 따라서 인격에 대한 예우는 고사하고 사회적 열외의 의미를 파악하지도 못한다. 결국 언젠가 자신도 그렇게 열외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종종 푼돈의 동냥 짓으로 열외자들을 달랜다.

보들레르는 청춘은 존재함으로 아름답다고 했다.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어도 그들은 분명한 초록이다. 이 초록은 무더운 여름을 견딘다. 가을이 오면 형형색색 아름다운 빛깔을 자아내기 위해, 흔들리고 젖어가면서 햇빛을 이겨낸다. 하지만 그 동안 몇몇의 잎들은 벌레의 먹이가 된다. 그들은 자신의 초록을 다하지 못하고 시들어 버린다. 초록 잎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이 검은 잎들이야말로 청춘에서 열외 된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