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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6호] 한국 민중시의 언어적 실천 연구 -1970․80년대 민중시에 나타난 ‘부정성’의 의미화 양상을 중심으로-

김란희(국문과 박사)

1. 연구 주제 선정 이유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학부 때부터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필자가 이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당대의 시대적 상황에 맞서 사회적 호명작업을 감행했던 민중시의 시적 언어에 대한 규명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민중시의 시적 언어에 대한 규명 작업의 필요성은 1970․80년대 민중시에 대한 그간의 논의가 주로 리얼리즘과 연계된 재현이나 이념적 차원으로만 국한되어왔기 때문에 민중시 자체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해석의 다양성을 제한하고 민중시를 시대적 부산물로 박제화시켜 버린 채 그 시학적 측면의 연구가 답보 상태에 머무르고 말았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그동안 논의되어 왔던 민중시 연구가 리얼리즘 차원에서만 거론되었던 측면을 거부하고 민중시의 언어적 측면을 살펴보고 규명해봄으로써 민중시의 시학적 지평을 넓혀보겠다는 의도에서 연구 주제를 선정하였다.

2. 연구 목적

필자가 논문에서 연구 목적으로 삼은 것은 민중시가 지닌 시적 언어의 특질과 그 의미화 양상이었으며, 이는 일반적인 언어와는 다른 시적 언어의 특질이 민중시 텍스트에서는 어떻게 발현되고 의미화를 이루는가를 밝혀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필자는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언급한 시적 언어의 '부정성(Negativity)' 개념을 통하여 민중시 텍스트에 나타난 ‘언어적 실천’ 양상을 살펴보고자하였다.

여기서 언급하는 ‘부정성’이란 일반적인 언어가 갖는 논리적 명제와 정립상을 부정하는(그리하여 의미의 일의성을 부정하는) 일종의 운동성을 뜻하는데, 이것이 시 텍스트에서 언어적 상징성에 대한 거부와 투쟁으로 드러날 때 시적 언어의 ‘부정성’으로 명명된다. 이러한 시적 언어의 ‘부정성’은 언어에 대한 투쟁이 언어라는 상징계를 구성하는 사회 질서에 대한 투쟁과 등가적 의미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함의를 동시에 지닌다.

주지하다시피, 1970·80년대 민중시는 시대적 억압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육성을 체현하는 시 양식으로 존재해왔다. 이는 시가 갖는 언어의 물질성과 육체성을 전경화시켜 당대 지배질서의 억압과 논리에 대한 충동적 거부를 체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언어적 실천은 당대의 사회적 지배질서로 정립된 이념과 논리를 재현하는 언어적 상징계에 대한 거부이자 투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민중시의 ‘부정성’ 연구는 민중시에 나타난 시적 언어의 특성이 당대 사회의 사회적 실천으로 여하히 기능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작업이 될 수 있다.
 
3. 연구 결과

먼저, 필자는 크리스테바의 ‘부정성’ 개념을 통해 연구 대상으로 삼은 세 시인의 텍스트를 살펴보았다.

김지하의 ‘담시’에 나타난 부정성의 표지는 리듬이나 구문의 반복, 의성어, 파라그람, 형태-통사론적 파괴를 통해 드러난다. 이러한 부정성의 표지는 모두 다 상징계의 의미화에 맞서 텍스트 내에 자신의 육체적 충동성을 이동시키고 변형시키고자 삽입된 기호계적 맥박인 바, 이는 기호계와 상징계의 경계 선상에서 이질적 요소들이 충돌하면서 생겨나는 의미생성 과정의 표지로 기능한다. 김지하 ‘담시’에 나타나는 부정성은 이러한 이질적 요소 사이의 파괴적이며, 유동적인 의미생성으로 포착되는데, 이때의 부정성은 물질의 이질적 거부-자유로운, 혹은 일차적인 에너지-가 표상체의 구조 그 자체 속으로 침입할 때 드러나는 것으로, 이질적 요소 간의 투쟁 그 자체를 실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실현은 주로 상징계적인 언어의 정립상에 대항하여 의미의 차별화를 생성한다.

신경림의 ‘민요시’에서 포착할 수 있는 부정성의 표지는 ‘가락’, 즉 리듬이다. 신경림의 텍스트에서는 리듬이 지배적인 시니피앙으로 작용하면서 의미생성의 기제가 된다. 신경림 텍스트에서의 리듬 장치는 음소, 음운의 반복, 어휘나 구문에 의한 병행과 반복, 휴지부의 반복, 정형률 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리듬 장치는 대상이나 외적 현실에 대한 시적 주체의 육체적 충동의 기입 양상을 잘 보여준다. 초기 시의 경우를 보자면 이러한 리듬장치는 의미론적 단절과 리듬적 단절의 긴장과 길항 작용을 통하여 시적 주체의 에너지가 힘겹게 대립하는 이른바 ‘한’의 응축 양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민요가락이 전면화되어 나타나는 텍스트에서는 이러한 거부의 움직임은 지시작용과 일시적으로 융합함으로써 ‘한'의 이완 양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또한 민중 집단의 투쟁 의지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리듬의 과잉성이 충동의 방출을 이루어 집단적인 신명 에너지로 전환되어 드러나기도 한다. 이 리듬의 과잉은 지시성을 과장시키고 청자의 공명을 자극하여 감정의 분출을 이루게 한다.

고정희의 ‘굿시’ 텍스트에서는 모성적 육체성의 회귀, 즉 코라적 맥박을 통한 상징계에 대한 거부가 부정성의 주요 표지를 형성한다. 특히나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에서 드러나는 ‘본풀이’ 과정은 반복적 대구, 등가적 통사구조의 나열, 반복구문 등을 통해 코라적 리듬을 형성하는데, 이 코라적 리듬은 로고스 중심적인 선조성을 파괴시키면서 여성이 받은 고통에 대한 풀이 과정을 남성적 상징체계에 의존하기 보다는 어머니의 ‘몸말’을 통해 해소하게 하는 의미장치가 된다. 또한 무당의 ‘대신 말하기’ 방식에 의한 제의적 대구는 ‘어머니’가 당한 수많은 외상적 사건을 회상하게 하여 그것을 말로 표출하게 함으로써 가슴에 쌓인 한을 씻어내리는 일종의 해소 기능을 한다. 이 해소의 과정은 상징적인 지시체계 속에서는 구현되기 어려운 과정이다. 따라서 굿 사설 속의 언어는 무엇보다 상징체계를 뚫고 나오는 육체성· 물질성을 담보해내는 ‘부정성’의 표지가 된다.

다음으로는 각 시인의 텍스트 분석을 통해 도출해낼 수 있는 언어적 실천(사회적 실천)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

민중시의 주요 특성으로 거론되는 전통장르와의 상호 텍스트적인 전위(轉位) 양상은 민중시가 지닌 열린 텍스트성,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텍스트성을 구현하는 언어적 실천 요소가 된다. 김지하의 ‘담시’는 ‘판소리’ 사설에 반영되었던 기층 민중 발화의 재활성화를 통해 단일한 장르 코드를 해체하는 탈 장르적 열린 텍스트로서의 지향성을 갖는다. 신경림의 ‘민요시’는 ‘민요’라는 민중 공동체의 사회적 방언을 개인 방언으로 편집, 재주조하여 개인적이고 폐쇄적인 서정장르로부터의 이탈을 꾀하였으며, 고정희의 ‘굿시’는 ‘씻김굿’이라는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제의적 양식을 통해 역사적 사건을 생생하게 현재화시킴으로써 ‘어머니’의 수난을 공동체적인 수난으로 전위시킨다.

또한 민중시에서 드러나는 복수(複數) 주체의 창출은 단일한 서정 주체를 해체하며 다수의 발화를 통해 집단 간, 계층 간 대화적 갈등의 구현 양상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언어적 실천 과정은 무엇보다도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발화자들의 세계관의 차이, 담론의 차이,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텍스트 생산 기제가 된다. 민중시에서 창출된 다수 발화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는 그만큼의 사회적 갈등을 구현하는 시적 전략이 되며, 이를 통해 독자들은 텍스트에 드러난 갈등 구조에 참여하여 발화와 텍스트, 그리고 사회적인 네트워크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아울러, 민중시에서 볼 수 있는 과거 밑바닥 민중들의 발화와 발화 양식은 근대화와 산업화의 논리에 밀려 추방되거나 배제되었던 아브젝트(abject)의 회귀 양상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지배 체제의 동화·포섭의 담론에 파열을 꾀하는 거부이자 근대화와 산업화, 관(官) 주도의 민족문화, ‘정의사회구현’ 등을 역설하는 당대의 지배체제에 하나의 공포로 기능하는 사회적 실천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