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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호] 원용진 교수(신방과), 나꼼수를 말하다. 본문

특집

[118호] 원용진 교수(신방과), 나꼼수를 말하다.

dreaming marionette 2012. 2. 27. 15:42


송주현 기자



송주현 기자(이하 송)
최근 <나꼼수>는 이슈의 중심에 서 있는데요. 나꼼수가 저널리즘의 환경변화와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요?


원용진 신방과 교수(이하 원) 일단, 기술적인 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나꼼수는 방송의 외연을 넓혔다는 점에서 방송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지만 기술적인 면에서는 단순히 방송이라고 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방송’입니다. 우리가 나꼼수를 방송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것을 방송이라는 범주에 귀속시키지 않으면 현재로서는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냥 방송이라는 용어를 차용하는 거지요. 언젠가는 이러한 형태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리게 될 날이 오겠지요. 같은 맥락으로 팟캐스팅에서 ‘캐스팅’(casting)이란 말 역시 방송(broadcasting)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사실 나꼼수는 단순히 온라인상에 업로드한 데이터 파일로 해석할 수도 있어요. 이름은 붙이기 나름이지만, 사람들은 원래 낯선 것이 등장하면 낯익은 것에 기대어 생각하려고 하거든요.

하지만 나꼼수를 방송의 한 형태로 간주할 경우 추가적인 문제가 생기고 맙니다. 예를 들어 방송이니까 규제나 심의를 해야 한다는 식의 문제 말이에요. 하지만 현재까지는 불특정 다수를 향하는 ‘One to Many’ 형식이 아니라 인터넷상에 파일을 올리면 수용자가 직접 다운을 받아서 들어야 하는 ‘P2P’ 형식이기 때문에 방송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나꼼수는 매스미디어가 아니란 사실이에요. 방송이 아닌 개념으로 설명해야 하지만 아직까지는 설명할 방법이 없죠. ‘김어준의 라디오 방송’이라고 부르는 것도 단순히 편의상 그럴 뿐입니다. 형식 자체가 기존의 저널리즘 환경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꼼수는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선구자라 할 수 있겠네요.

송 나꼼수만의 차별성이 있다면요?

최근까지 정치풍자 프로그램이라고 하면 ‘패러디 웹툰’이나 ‘노사모 방송’, 아니면 ‘라디오21’ 정도가 있었어요. 하지만 나꼼수처럼 처음부터 대놓고 정치풍자를 표방하는 프로그램은 전무후무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인터넷 방송 중에도 사회 비판적인 경향의 프로그램이 있긴 하지만 이들 방송은 스트리밍의 형태로 제공되기 때문에 나꼼수와는 차이가 있어요. 또 패러디가 이런 식으로 ‘절대권력‘을 직접 겨냥한 적도 없었고요. 그런 면에서 굉장히 파격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송 나꼼수가 정치에 대한 어설픈 반감만 부추길 수 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나꼼수를 어떤 태도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나꼼수는 듣고 싶은 수용자가 직접 찾아가는 형식이라는 겁니다. 미디어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에서 나꼼수를 본다면 말씀하신 것과 같은 우려를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사람들이 나꼼수라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바로 파일을 다운받아서 듣는 게 아니에요. 사전에 ‘가카헌정방송’인 나꼼수가 가카의 꼼꼼함과 호연지기를 보여준다는 걸 인지한 상태에서 들을 겁니다. 만약 진심으로 가카를 흠모하는 사람이라면 방송을 듣고 갈등이 생길 테니 듣지 않겠지요. 단지 나꼼수에서 웃고 떠드는 걸 듣는 게 목적이라면 이념적 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들을까요? 직접 찾아가는 형식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즐길 수 있는’ 수용자들이 들을 겁니다. 이 중에 정권을 막연히 싫어했던 사람들은 나꼼수에서 제시하는 여러 사실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강화하는 계기로 활용하겠지요. 이는 분명 설득의 기능과는 다릅니다. ‘강화작용’으로 볼 수 있겠네요.

하지만 나꼼수를 대안적 미디어로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요. 물론 분명히 대안적인 역할은 하고 있죠. 그래도 나꼼수가 스스로 언론이라는 지위를 바라거나 격상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처음부터 대안언론을 외치며 등장한 것이 아니라 하다보니까 대안적이 된 셈이죠. 그 이유는 물론 마땅히 다뤄야 할 사안들을 기존 언론에서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고요. 기존 언론에서 이러한 문제들에 관심을 가졌다면 나꼼수가 이만큼 인기를 끌었을까요? 따라서 특정 상황이 나꼼수를 대안적으로 만들어버린 겁니다. 기존 언론들의 비겁함과 나태함이 결국 사람들에게 나꼼수를 대안적인 형태로 받아들이게 한 것이죠.

아마 나꼼수는 대안언론으로 자리 잡으려 하기보다는 현상유지와 변형에 주력할 것 같아요. 언론이라고 하면 시스템화 되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엄격한 규제에 노출되기 쉬우니까요. 열악하긴 해도 차라리 일주일에 한 번씩 팟캐스트를 통해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청취자와 소통하기를 선택하는 편이 현명합니다. 이를 문화적으로 해석해 보면, 나꼼수는 이 정권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목요일 미니시리즈’라 할 수 있어요. 드라마의 최고 묘미는 기다림이잖아요. 목요일마다 기다려지는 나꼼수. 일정한 내러티브를 갖고 있는데다 캐릭터에 집중하는 맛도 쏠쏠하고 게다가 거침없는 입담이 웃음을 자아내고 있으니까요. 누가 드라마를 보면서 심각해지고 싶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나꼼수야말로 심각해지지 않고서도 즐길 줄 아는 수용자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서 듣는 소통 창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법을 개정해서라도 앱을 심의하거나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나꼼수는 분명 방송은 아니니까 그 안에 들어간 내용이 단순히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규격이나 품격, 이런 것을 논하기 어려워요. 게다가 방송이라는 틀로 나꼼수를 이해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습니다. 법률적 해석에 있어서도 나꼼수를 규정짓는 게 그만큼 어려워요. 법적 해석의 범위를 확대한다든지 법률을 개정한다든지 하는 절차적인 문제 또한 복잡하죠. 이에 앞서서, 이러한 논란 자체는 말이 안 된다고 봅니다. 규제할 수 없는 것을 법 개정을 통해 규제하겠다는 것 자체가 초헌법적인 발상이 아닌가 싶어요. 나꼼수는 규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데다 규제를 하는 순간 다른 방식으로 변형될 겁니다. 인터넷에서 사용자 간 공유 방식을 통해 파일로 돌아다닌다면 그걸 현실적으로 규제할 방법은 없어요. 나꼼수에 대한 어떤 규제가 가능하려면, 그것은 결국 만든 사람들을 가두거나 제작하지 못하게 하는 것 말고는 없지 않을까 싶네요.

다른 나라는 정치풍자 프로그램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합니다.

한국 밖에서 이런 예를 찾기는 어려워요. 오히려 외국에서 나꼼수에 관심을 갖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마 그들은 새로운 형식과 파격적인 내용의 나꼼수라는 게 등장해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낄 것 같아요. 사실 나꼼수를 들으면서 낄낄거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현재 한국의 정치상황이나 저널리즘 상황이 최악이라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죠. 마치 일제시대의 독립군을 보는 것 같지 않나요? 최첨단의 뉴미디어 기술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를 통해 전달하는 내용은 거의 석기시대까지 퇴보한 저널리즘이라 할 수 있으니까요. 슬픈 현실이죠. 그러니까 언론환경의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나꼼수와 청취자들 사이에는 일종의 ‘공모의식’이 생겨나고 나아가 이로부터 ‘공모희열’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나꼼수는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 차원에서도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꼼수의 행보가 더욱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