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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134호] 기억되고 남겨져야 할 또 하나의 과거, 형제복지원

과거 독재정권 시절 사회정화사업이라는 미명아래 강제로 호명되어 형제복지원이라는 수용소에 수용당한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와 같이 일상을 영위하던 이들은 국가가 정해놓은 사회적 기준에 합당하지 못한 존재라는 이유로 부랑자라는 낙인이 찍혀 육체적, 정신적 억압과 폭력을 당했다. 이유도 모른 채 온전한 삶의 순간들을 빼앗겨야만 했던 수용소 사람들은 그때의 혼란을 지나 고통을 드러내고, 국가를 고발하고, 일상을 되찾기 위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기억되고 남겨져야 할 또 하나의 과 거 , 형 제 복 지 원



안녕하십니까?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실종자, 유가족) 모임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한종선입니다. 저는 1984년 9살때 작은 누나와 함께 형제복지원에 수용되었으며, 제 아버지 또한 1986년에 형제복지원으로 잡혀 오셨습니다. 저는 형제복지원이 폐쇄되던 1987년까지 그곳에서 수용생활을 한 형제복지원 피해 당사자이며 지금은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형제복지원의 실상

 형제복지원은 1975년 박정희 정권 때 만들어진 내무부 훈령410호에 근거하여 부랑인을 집중단속 하기 위해, 198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이 대내외적인 복지 사업을 시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회정화 사업입니다. 사회정화 사업의 대상은 가난한 일반인들과 주민등록증을 소지하지 않고 돌아다닌 일반인, 어린아이들, 집 나온 아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 국가가 지원 해줄 거라는 공무원들의 달콤한 유혹에 아이들을 맡겼던 한 부모 가정이었으며 이들은 모두 경찰과 부산시의 공무원들에 의해 강제 수용을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회정화 사업은 부랑자가 아닌 사람들을 부랑자로 양성하였습니다. 형제복지원과 같은 부랑인 수용소에 사람들을 감금시키는 경찰은 평점 5점을 부과 받아 빠르게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강도나 절도범을 잡으면 부과되는 평점 3점에 비해서 월등히 높은 평점을 받았다는 것이 자료로 증명되었습니다.

 형제복지원은 당시 전국의 36개의 부랑인 임시 수용소 중하나였지만, 그 규모가 형제복지원을 따라올 수 있는 수용소가 없었고, 12년간 형제복지원 자체 사망기록만으로 513명이라는 사망자가 발생하였던 곳입니다. 그런데도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지자, 담당 검사였던 김용원 검사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축소 은폐시키기 위해 정부로부터의 압박 속에서 공소사실을 변경하기에 이르렀으며, 결국 이 사건은 7번의 재판을 통해 대법원의 판결로부터 15년 구형에서 징역 2년 6개월로 끝이 났습니다.

 때마침 당시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인해 민주화 운동이 한참일 때였던지라,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한 전두환 정권의 대내외적인 인간 청소 사회정화 사업의 폐해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지식인들도 묻거나 따지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사라졌고, 역사의 언저리에조차 드러나지 않게 숨겨지고 묻혀졌습니다.


형제복지원에서의 기억

형제복지원은 국가의 예산과 부산시의 예산으로 연간 20여억원을 받으며 운영되었습니다. 전국의 36개 부랑인 수용소로 책정된 예산 80억 중 형제복지원이 받은 예산은 20여억 원이었습니다. 지금의 액수로는 수백억에 달하는 국가예산이었습니다. 그러나 형제복지원에 살았던 저희에게는 단 몇 십 원도 돌아오지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음식은 들판에 버려진 배춧잎과 무를 수거해서 그것으로 김치를 만든 것이었으나, 그마저도 썩어빠진 배춧잎 위에 그저 굵은 소금만 뿌린 김치와 깍두기였고, 버려지고 으깨어진 생선들로 젓갈을 만들어 수용소 사람들에게 먹였습니다. 또한 그 당시 폐기물이었던 소의 피를 수거해와 선짓국을 끓여 먹였고, 사시사철 언제나 똑같은 나일론 팬티와 난닝구, 추리닝, 양말, 검정고무신이 우리들의 의복이었습니다. 형제복지원의 수많은 건물과 높은 담장들 역시 기계를 동원하여 만든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에서 일 못 하고 장애가 있거나 노약자들이라며 국가가 잡아들인 부랑인이라는 사람들이 오로지 정과 망치, 삽과 곡괭이로 산을 깎고, 거기서 나온 골재로 지어 만든 것이었습니다.


형제복지원의 운영방식

 형제복지원의 운영 방식은 군대와도 같았습니다. 각 건물은 소대로 분리되고, 각 소대로 배치된 사람들은 소대원들이라 불리며, 그 소대 안에 소대장 1명, 서무 1명, 조장3~4명이 존재하고 그 밑으로는 일반소대원들이 대략 적게는 5~60명, 많게는 120여 명 까지 한 소대에서 생활을 합니다. 언제나 새벽 4시 30분에서 5시쯤 기상을 합니다. 형제복지원에는 온수가 없으므로 몹시 추운 겨울에도 예외 없이 깡깡 얼은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해야 합니다.



 식생활에 있어서 형제복지원 운영방침에는 30분에서 1시간 정도의 식사시간이 있다고 되어 있지만, 3900여 명이 한 곳의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없어서 그 운영방침은 말 그대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시간표일 뿐이었습니다. 제가 속해있던 아동소대 식사시간은 10분 이내이고, 그 10분조차도 우리에겐 허용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식사시간에 선착순 몇 명이라는 말 때문에 밥도 다 먹지 못하고 한 대라도 덜 맞기 위해 소대로 복귀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동소대에서만 있었기 때문에 다른 소대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른이고 아동이고 여자건 여자아이건 상관없이 상명하복에 따르지 않는다면 죽거나, 반신불수가 될 정도의 구타와 기합고문이 따른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형제복지원에서 벌어진 온갖 폭력들

우리 아동소대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매타작이 있었습니다. 기상시간에 10초라도 늦게 일어나면 얼굴에 주먹이 날아오고 발이 날아옵니다. 세수를 할 때에도 물바가지를 세 번 부어 주는 것으로 세수를 하는데, 그것 또한 조장이 부어주는 속도에 맞추지 못하면 물바가지로 머리가 깨질 정도의 힘으로 두들겨 맞고 밖에 나가서 다른 소대원들 세수가 끝날 때까지 원산폭격을 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취침시간에는 불침번을 서야 하는데, 불침번을 서다 보면 구석진 조장들의 자리나 힘이 센 덩치 큰 소대원들의 (일명 여례) 침대에서 힘 약한 소대원들의 눈물 섞인 신음 소리가 들려옵니다. 어김없이 이어지는 동성 간의 강간이었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였기에 강간이라는 단어조차 모를 때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저도 근 3년동안 형제복지원에서 생활하면서 동성 간의 강간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형제복지원에 들어가서 기상천외한 기합들을 받으면서 생활하였습니다. 아래는 형제복지원 수용 당시 받았던 기합과 고문, 폭력의 종류에 대해 기억나는 것만 서술해 본 것입니다.


[기합의 종류] 아동소대 기준입니다.

나룻배, 히로시마, 한강철교, 전깃줄, 기마 자세, 고춧가루, 귀뚜라미, 낮은 포복, 4열 종대 오리걸음, 4열 종대 어깨걸어앉았다 일어나기, 원산폭격, 엎드려뻗쳐(한쪽 팔, 한쪽다리 들기), 무한정 구보 돌기, 각종 성경 구절과 찬송가 외우기 등


[고문의 종류] 아동소대 기준입니다.

물고문(추운 겨울에 2번 당함), 부동 차렷 자세(여름과 겨울에 많이 함), 부동 앉은 차렷자세(여름과 겨울에 많이 함), 앉은 차렷 자세로 잠 안 재우기 등


[폭력의 종류] 아동소대 기준입니다.

액스카바, 인간샌드백, 허벅지 빳따, 발바닥 빳따, 허벅지 위로 손바닥 빳따, 손등 회초리(겨울철 동상에 걸렸을 때 자주 맞음), 모다구리(일명 이불말이), 마구잡이 구타(주먹과 손바닥, 발로 밟고 차고,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것을 말함)

[타 작] 아동소대 기준입니다.


타작이라 함은 일주일에 한두 번 있는 일입니다. 매일같이 두들겨 맞고, 기합을 받으면서 생활했습니다. 조장들의‘오늘 타작 한번 하자’라는 그 말이 지금도 꿈속에서 생생하게 들릴 때면 저는 온몸이 경직되어 다리에 쥐가 나며 놀라 잠에서 깨기도 합니다. 위에 써 놓은 것들의 다양한 종류의 기합과 폭력과 고문이 이어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형제복지원에서 보낸 3년 6개월가량의 생활에서 무엇이 남았느냐고 한다면, 이러한 기억들밖에 없습니다.



형제복지원 안에서 품었던 바람

이미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린 아버지와 작은누나를 보면서 살아온 저는 세상이 확 바뀌지 않는 이상, 형제복지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형제복지원 안에서의 저의 작은 소원은 고작 하루만이라도 덜 맞고, 덜 기합 받고, 고문 안 당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먹지를 못해 항상 영양실조와 각종 피부병과 질병에 노출되어 살았던지라, 살아있는 지네나 갓 태어난 쥐새끼를 먹거나, 솔방울과 교회당 갈 때 무덤가 근처에서 퍼온 시뻘건 흙을 납작하게 눌러서 햇볕에 말려 쫀드기라 부르며 먹을 수밖에 없었기에 맛없는 꽁보리밥일지언정 배부르게 먹어봤으면 하는 게 저의 간절한 바람이었습니다.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현재까지의 진행 상황

1987년 형제복지원이 폐쇄된 후 2007년이 되어서야 저는 아버지와 누나를 근 20여 년 만에 정신병원에서 찾게 되었습니다. 그 후 형제복지원 사건을 여러 언론 신문, 방송에 알려왔습니다. 2011년 말 <히스토리 후> 라는 시사프로그램을 처음으로, 2012년부터 다양한 시사프로그램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다루어주었습니다. 이후 수많은 언론을 통해 형제복지원 사건이 알려졌고, 물론 저 역시 2012년 5월부터 오로지 돗자리 하나와 얇은 담요 한 장만을 의지 한 채, 2013년 2월 초까지 국회 앞에서 24시간 노숙 1인 시위를 이어 갔습니다. 당시 2012년 6월경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할 때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전규찬 교수님께서 오셔서 저에게 기억나는 그대로 형제복지원에 대한 글을 써보라는 권유를 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저는 <살아남은 아이>라는 형제복지원 수기형 책을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2013년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준 대책위가 꾸려졌으며, 이 사건이 2013년 3월 <그것이 알고 싶다>에 방영되면서 (기존 80여 명에서) 200여 명이 넘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모임을 결성하기까지 이르게 되면서, 28년 만에 국회에서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논의가 법안 심사 소위로 올라가게 되는 과정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진상규명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하물며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조차도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하여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공감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아직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켜주지 않고 있습니다.

 2014년 7월 새정치민주연합당 진선미 의원님께서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등을 위한 특별법을 발의한 이후 지금까지 국회에서 어떠한 입장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새누리당은 새로 만들어지는 법이다 보니 공청회도 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통과시키느냐 하며 시간을 끌었지만, 결국 2015년 7월 3일 국회 안행위(안전행정위원회, 편집자주) 차원에서 공청회도 열었습니다. 공청회 날짜조차 잡아 주지 않고 무한정 시간만 끌고 있는 것에 대해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모임은 항의 차원에서 국회 앞에서 삭발식을 거행하였고, 기자회견 후 바로 국회 앞 연좌농성에 들어갔었습니다. 공청회 날짜가 확정되고서야 58일간의 연좌 농성을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준비해온 공청회를 열었음에도 요지부동으로 형제복지원 특별법은 법안심사 소위에서 멈춘 상태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저는 변방예술제의 초청으로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릴 수 있는 그림 전시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9월 30일에 국회의원회관 1층 로비 안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리는 그림전과 사진, 형제복지원 당시의 건물을 재현하는 모형을 전시하려고 준비중입니다. 이 와중에도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모임과 함께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의 활동과 부산에 위치한 대책위원회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형제복지원이 갖는 사회적 의미

아파해야 하는 것과 아파해줄 수 있는 것은, 아픈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은 아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보면서 아파해야, 그리고 아파해줄 수 있는 마음을 가져 달란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아파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곧 당신이고, 여러분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잊는 것이 아니고 기억되고 남겨져야 한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노력은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먼저 아픔을 알게 된 사람들의 증언과 기억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며 기억해주고 다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국가의 정책을 점검해서,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아줄 수 있도록 당사자의 운동에 함께 참여해 주는 것이야말로 사회적인 노력일 것입니다. 형제복지원이라는 엄청난 고통과 트라우마 속에서 허우적거리지만, 당사자 운동을 하고 있는 사건 피해 당사자들이 트라우마를 극복해가면서 서서히 온전한 한 사람으로서 일어서는 모습을 통해서야말로 형제복지원 사건이 사회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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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면에 수록된 모든 그림은『살아남은 아이(2012)』에 실린 저자의 그림을 리젬출판사에서 제공받음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