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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대학원 신문사
[159호] 온라인 그리고 오프라인 본문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석사 졸업생 조윤희
일주일 사이에 두 개 콘서트를 관람했다. 하나는 온라인 콘서트였고 또 다른 하나는 오프라인 콘서트였다. 코로나 이후 온라인 콘서트 관람은 벌써 3번째였고 오프라인 콘서트는 무려 2년 만이었다. 아직 일상의 단계적 회복 과정에 있어 코로나 이전과 같은 여건에서 콘서트가 열린 것은 아니었다. 좌석 곳곳은 거리 두기로 인해 비워져 있었고, 관객들은 기립과 함성이 금지되어 있어 무대에 호응하기 위해 박수만 쳐야 했다. 무대 위 가수가 관객들에게 잘 보고 있냐고 질문을 던져도 박수로만 대답할 수밖에 없었고 가수는 자신이 무대 도중 습관적으로 함성이나 떼창을 유도하더라도 잘 참아야 한다고 관객에게 당부했다. 답답하면서도 재밌는, 소위 말하는 매우 ‘웃픈’ 상황이 이어졌다.
코로나는 공간 전쟁을 촉발했다. 이는 대중예술계도 마찬가지였고 많은 가수들이 무대를 할 수 있는 공간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중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공간은 바로 온라인 공간이었다. 유튜브에는 새로운 라이브 영상들이 계속 올라왔고 각종 온라인 공연 플랫폼들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어쩌면 오히려 더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어쨌든 실시간으로 무대를 볼 수 있고, 또 공연장에 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부가적인 비용에서도 자유로웠으니까. 그리고 대부분 온라인 공연 플랫 폼들은 관람객들이 실시간으로 채팅을 치면서 서로 소통하는 데 그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즐거움’은 결국 그냥 위안이었을 뿐이었다는 걸 오프라인 콘서트를 다녀오고서 깨달았다. 온라인 콘서트를 본 직후여서 더욱 그랬다. 변화의 바람 속에서 그리고 변화와 진보가 혼용되어 많은 오해가 만들어지는 상황 속에서 문득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에 질척거리게 되는 것이다.
공연장 안에서 가수의 목소리는 단순히 나의 청각만을 자극하지 않는다. 무대 미술 등의 시각적 요소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건 온라인으로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 어쩌면 온라인에서 더 시각적인 즐거움이 클 수도 있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하는 것도 다양한 각도에서 다 보여주니까. 그럼에도 온라인 공연이 오프라인 공연장에서의 경험을 완전히 실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공연장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각은 다분히 촉각적이기 때문이다. 공연장에서 울리는 가수의 목소리는 내 몸 전체를 때리며 지나간다. 매끄럽게 투과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안에 있는 모든 요소와 마찰한다. 밴드 반주는 대형 스피커를 통해 공연장 전체를 진동시키며 이에 내 몸도 덩달아 진동한다.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크게 듣거나 이 퀄라이저를 통해 베이스를 증폭시키는 것은 사실 이러한 촉감을 조금이나마 느껴보고자 하기 위함이다. 이때의 촉감은 단지 내 고막을 진동시키는 것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라이브 공연 감상에 자주 쓰이는 ‘현장감’이라는 단어를 풀어쓰자면 결국 그 감각은 촉각인 것이다. 촉각은 마찰에서 온다. 온라 인 콘서트를 보며 가장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은 사실 음향 믹싱의 문제였는데, 가수의 목소리와 밴드 반주가 너무 매끄럽게 분리되어 들렸다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가수의 목소리를 고품질로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가수 목소리가 반주랑 너무 따로 놀았다. 사실 공연장에서는 반주와 목소리가 ‘시끄럽게’ 섞인다. 서로 마찰하는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으로 송출되는 소리가 그런 식으로 섞인다면 오히려 ‘노이즈’가 생긴다며 제거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오 프라인 콘서트는 현장감도 함께 잃는다.
물론 그 현장감에는 기분 좋은 진동뿐만 아니라 불편한 통증도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원래는 스탠딩 구역이었어야 할 곳에 깔아놓은 간이 의자에 3시간가량을 앉아있다 보니 아직까지도 가시지 않는 허리 통증이 있을 수 있다. 아마 코로 나로 인한 여러 가지 제약이 없었더라면 더 다양한 아픔이 날 괴롭혔을 것이다. 함성과 떼창으로 인해 목이 나가고 스탠딩 이든 좌석이든 결국에는 다 일어나서 보게 되어 있기 때문에 정말 삭신이 쑤셨겠지. 온라인 콘서트를 관람할 때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그런 불편함마저 그리웠다고 하면 너무 오버하는 것일까? 어떠한 경험이 내 몸에 각인되는 듯한 강렬한 느낌이었다고 여긴다면 어떨까? 물론 지금 글을 쓰면서도 허리가 너무 아파서 이걸 어쩌나 싶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감각이 내가 공연에 정말 다녀왔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기에 이러한 불편함이 밉지 않은 것이다.
온라인 공간 또는 가상 공간 또는 ‘메타버스’가 이러한 경험을 완전히 구현해낼 수 있을까? 사실 가능하더라도 그걸 구현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감각의 교란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지 않나. 현장에 없어도 현장에 있는 것처럼 내 몸을 착각하게 만드는 기술. 얼마나 잘 속일 수 있느냐에 그 성공 여부가 달려있다. 사실 이건 그냥 내가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이것만큼은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에 질척거리느라 쓰는 투정에 불과할 수 있다. 난 진짜 현장에 가서 현실의 경험을 하고 싶어! 라고 징징거리지만 앞으로 그 ‘진짜’와 ‘현장’과 ‘현실’의 표준이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는 함부로 예상하지 못하겠다. 멀지 않은 미래에 현장감의 감각이란 지금과는 또 다른 감각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때 이 글을 보면 무척 구시대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럼에도 변화의 여정 위에서 계속 마찰을 내면서 내 발걸음을 조금은 늦추고 싶은 마음이 있다.
여담으로, 이번 오프라인 콘서트를 보기 위해 외국에서 온 친구들이 있었다. 온라인으로도 볼 수 있었던 공연이었지만 그럼에도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온 것이다. 게다가 코로나로 인해 입국 절차가 이전에 비해 더 까다로워졌고 친구들은 각종 서류를 준비해 가는 번거로움을 이겨내면서까지 한국으로 왔다. 이들에게는 그 모든 비용을 치르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게 있었다.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2년 전 해외 투어 공연로 가수가 자신의 나라에 와서 공연을 했을 때 겪었던 그 진동이 있었다고 하였다. 공연장 밖에도 무대 리허설을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쩌렁쩌렁해서 놀랐다고, 그런데 안에 들어가서 본무대를 보니 그 목소리가 내 몸 전체를 울렸다는 것이다. 아직도 그 감각과 충격이 선명해서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 그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한국에 오자고 마음을 먹었다. 온라인 공연으로 인해 물리적 거리의 제한이 사라졌다고들 하지만 그 진동이 촉감 그리고 전신을 마찰하며 만지는 목소리의 힘은 이들로 하여금 물리적 거리의 제한을 기꺼이 뛰어넘도록 했다. 그리고 제한을 사라지게 하는, 또는 사라졌다고 착각하게 하는 것과 뛰어넘는 것은 분명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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