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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59호] ‘발명된 기억’으로서의문화적 기억 :영화 <모던보이>를 중심으로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신문방송학
석사 졸업생 권 서 현

 

영화 모던보이 포스터 

 

※ 이 글은 영화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선은 어떠한가. 암울하고 비극적인 시기라는 기본적인 정서가 깔려있다. 이러한 정서는 문화적 기억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이는 국가의 교육으로 심어지기도 하지만 문화적 재현물을 통해서 더욱 공고화되는 경우가 많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대부분의 영화는 매우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으며, 이 영화들은 식민 지배에 관한 영화적 문법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영화에서 주목하는 시기는 1930년대다. 일본의 지배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시기이자 경성이라는 공간이 한양의 낡음을 완전히 벗어버린 새로운 도시로 거듭난 시기이기 때문이다. 화려하고 모던한 경성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만주와 상하이에서의 전투장면을 보여줄 수 있기에 관객들의 이목을 쉽게 사로잡을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를 다룬 다양한 작품 중 영화 <모던보이>는 1930년대 화려한 경성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영화다. 혹자는 영화 <모던보이>를 일제강점기 경성의 도시경관을 재발견하게 한 영화로 기록될 것이라 평하기도 했다. 더불어 영화 속에서 하나의 소재 혹은 장치로 등장했던 모던보이나 모던걸을 영화의 전면으로 부각해 당시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일상을 보여준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 <모던보이> 역시 다른 일제강점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결과적으로는 독립운동을 하는 주인공들의 모습과 비극적인 결말을 포함하고 있다. 다른 영화 속에서는 소재에 불과했던 모던보이와 모던걸을 전면에 배치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똑같은 방법으로 모던보이와 모던걸을 소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2008년 개봉한 정지우 감독의 <모던보이>는 일제강점기 때 유행의 최첨단을 걷고 있던 한 청년의 모험담을 그리고 있는 일종의 사극(costume piece)이다. 1937년을 배경으로 조선총독부 1급 서기관 이해명(박해일)이 주인공이다. ‘모던보이’라고 불리는 이해명은 친구이자 조선총독부 검사인 신스케(김남길)의 도움을 받아 경성 최고의 구락부(俱樂部)의 댄서 조난실(김혜수)을 유혹하는데 성공한다. 조난실은 댄서이자 테일러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지하 독립운동 조직의 핵심 멤버였다. 하지만 이를 몰랐던 이해명은 조난실이 정성스럽게 싸준 도시락을 들고 조선총독부로 출근을 했다가 도시락통이 폭발하면서 조난실의 정체를 알게 된다. 더불어 신스케를 통해 조난실이 ‘테러 박’이라는 남편이 이미 있음을 알게 되고, 이를 확인하고자 사라진 조난실을 찾아 서울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해명은 조난실과 함께 일하는 요원들에게 조선총독부 1급 서기관이라는 사실을 들키게 되고, 스파이라는 오해를 풀기 위해 자신을 ‘테러 박’이라소개하며 테러용 양복을 입으면서 그렇게 ‘모던보이’ 이해명은 얼떨결에 다가올 거사에 중차대한 임무를 떠맡게 된다.

 

 마침내 거사의 날이 밝아오고, 조선총독부 앞 광장에서는 승전 축하 기념식이 화려하게 거행된다. 특수 제조된 폭탄이 있는 연미복을 입은 이해명은 일본 측 요인들이 있는 단상 위로 올라가 상의에 달린 뇌관을 힘껏 잡아당긴다. 하지만 연미복은 폭발하지 않고 뇌관에서는 태극기가 딸려 나온다. 당황한 이해명은 태극기가 손에 들리자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본 경찰들에게 끌려 나간다. 진짜 폭탄이 장착된 연미복을 입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조난실이었다. 그녀는 기념식 이후 진행된 실내 파티 연회장에서 이해명의 만류를 뿌리치고 뇌관을 잡아당겨 장렬히 산화하고 만다. 자신의 눈앞에서 죽음을 맞이한 조난실을 보며 이해명은 ‘모던보이’의 생활을 청산하기로 결심하고, 독립군으로 활동하며 영화 <모던보이>는 막을 내린다. 이처럼 영화 <모던보이>는 이러한 ‘독립의 문제’라는 거대 역사에 발목을 잡혀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영화의 결말에서 ‘사실은’ 독립군이었다거나, ‘갑자기’ 독립운동에 투신함으로써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영화 <모던보이>는 왜 ‘모던보이’ 이해명을 독립군으로 변화시킬 수밖에 없었는가. 그 이유는 일제강점기 당시 백성들이 ‘모던보이’에게 기대했던 이미지와 현실에 괴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930년대의 대중가요를 살펴보면, 그 당시 ‘모던보이’, ‘모던걸’을 어떤 식으로 인식했는지 알 수 있다. 대중가요는 서울의 거리는 지향 없이 활보하며 속물적인 생활로 시간을 소비하는 모던한 청춘 남녀들을 풍자했다. 대중가요 속의 ‘청춘 서울’은 소비의 도시이자 향락의 도시, 그리고 허영의 도시로 묘사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뚱딴지서울>, <모던비가>, <서울가두풍경> 세 편은 모두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의 향락과 허영을 풍자하고 있다. 세 편의 대중가요 속에서 근대적 도시 공간을 유랑하는 젊은이들은 그 누구도 찬란하게 돌아가는 경성의 소비적이고 향락적인 흐름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경성’이
라는 공간 속에서 속물이 되어가고 허영심만 늘어난다. 이것이 경성의 거리를 헤매던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을 바라보는 당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모던걸 아가씨들 동근 종아리 / 데파트 출입에 굵어만 가고 /
저 모던보이들에 굵은 팔뚝은 / 네온의 밤거리에 야위어가네 /
뚱딴지 서울 꼴불견 많다 / 뚱딴지 뚱딴지 뚱딴지 서울
(<뚱딴지 서울> / 고마부 작사 / 정진규 작곡 / 유종섭 노래 /콜럼비아 40828-A / 1938년 9월 발매)

 

 이와 같은 모던보이와 모던걸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인식이 영화 <모던보이> 속에도 여실히 드러나 있다. 영화 초반부 이해명이 자신의 친구 신스케를 경성역에서 기다리는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자신이 바로 모던보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증명이라도 하듯 이해명은 최신 유행의 양복과 구두를 갖춘 채, 기생들을 데리고 자신의 차 앞에서 친구를 기다린다. 이해명의 모습에 푹 빠진 여학생들을 보면서 그들을 인솔하는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느그들 저런 모던보이랑 어울리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저런 기생들 되는 거다.” 이 대사에는 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들에게 모던보이와는 어울리면 안 된다는 속뜻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를 나온 신여성으로서 모던보이, 모던걸과는 다른 집단임을 구별 짓고 있는 것이다.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을 영화 속에서 ‘결국에는’ 독립군, ‘알고 보니’ 독립군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는 먼저 애국적 지식인들의 유토피아적 상상을 영화 속에서나마 실현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근대계몽기의 애국적 지식인들은 경성 이라는 공간이 서구 문명을 받아들인 도시인들이 힘차고 근면한 활보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할 것이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양복과 중절모, 금테 안경과 반지로 치장한 신사는 조선의 독립과는 무관하게 무위도식한 삶을 선택했다. 사치와 허영을 일삼는 소비적 인간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전통시대의 군자를 대체한 신사들은 외양만 문명인이었지 하는 일이라곤 청루, 별택, 요릿집, 화투장, 활동사진집을 전전하는 것이었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고 오히려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은 식민지 현실에서 향락과 소비적인 생활을 하며 방황했다. 즉, 애국적 지식인들의 유토피아적 상상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두 번째 이유로는 이러한 애국적 지식인들의 현실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현재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제강점기를 기억하고자 하는 방향이 합쳐져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비현실을 향한 욕망을 풀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애국적 지식인들은 경성의 유행을 이끄는 모던보이, 모던걸들이 독립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역할을 수행하길 희망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들은 한국에서 일제강점기를 바라보는 특별한 시각을 낳았다. 일제강점기를 보낸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친일파를 제외하고 모두가 조선의 독립을 열망했다고 기억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이들의 활동을 정리할 때 민족문화의 수호자나 민족 정체성을 위한 투사로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욕망이 합쳐진 일제강점기에 대한 문화적 기억은 영화라는 비현실을 통해 그들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로즈메리 잭슨(Rosemary Jackson)은 『환상성-전복의 문학』에서 ‘환상성’이란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욕망의 운동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욕망은 현실의 경계를 넘어 비현실의 공간을 끊임없이 추구하는데, 하나는 현실의 질서를 온전히 유지한 채로 욕망을 채워주는 가상공간을 구성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의 질서를 제공하는 안정을 완전히 거부하는 무질서의 가상 세계를 창출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다양한 영화 작품들은 ‘경이’의 방식을 통해 현실에 대한 불만을 비현실을 향한 욕망으로 풀어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구락부에서 화려한 댄서 생활을 하는 로라는 ‘알고 보니’ 지하 독립군 조직의 핵심 요원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제강점기 민족의 아픔은 무시하고, 화려한 경성 생활을 즐기며 향락과 소비를 하는 인물로 비치지만, ‘로라’는 조난실을 숨기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을 뿐이다. 실제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자금 조달부터 실제 폭탄 투척까지 하는 독립군의 핵심 요원이다. 그리고 이해명 역시 ‘모던보이’의 표상이었으나 조난실과 사랑에 빠지면서 일본인이 되고 싶었다던 지난날의 자신을 반성하고 연인의 발자취를 따라 ‘갑자기’ 영화 결말에서 독립군이 된다. 이처럼 어떠한 방식으로든 독립군으로서 마무리 짓는 영화 결말은 당시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영화가 재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기억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원하는 욕망을 영화 속에서나마 실현시켜 주고 있다고 보는 것이 알맞을 것이다.

 

 우리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historical background)에 지나치게 강박 되어 있기에 있는 그대로의 모던보이와 모던걸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는 ‘발명된 기억’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에 가깝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소설 작품을 분석한 문학계의 논설에 따르면 실제 민족주의적 이념은 일제강점기 때가 아니라 해방 이후 오히려 강화됨과 동시에 당대 정치적 환경에 의해 소환되고 기획되었던 성격이 강함을 이야기한다. 즉, 우리가 일제강점기에 관해 가지고 있는 막연한 민족주의적 의식은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후대에 만들어진 기억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기억이 ‘발명된 기억’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의 공로의 격하하는 것도 아니며 식민사관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후대에 생성된 저항적 민족주의라는 거대담론에 휩싸여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이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낄 뿐이다. 왜 모두 폭탄을 터트리고 자살을 해야 하는가. 폭탄을 터트리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살아가는 해피엔딩으로 영화가 마무리되면 안 되는 것인가. 식민 지배에 관한 역사를 영화적으로 재현하고 재구성함에 있어서 인식론적인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왜 우리는 독립투사에게 비극적 결말을 강요하는가. 일제강점기에 대한 우리의 ‘발명된 기억’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는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