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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59호] 뽀로로 작가가 된 후 내 삶의 변화

임다빈 작가

 필자는 아이들의 대통령, ‘노는 게 제일 좋아’라는 노랫말로 유명한 뽀로로 회사에서 작가로 일하고 있다. 회사원으로서작가가 쓰는 글은 대외 홍보글, 사내 방송 및 웹진 기고글 등일 경우가 많은데, 이곳에서 쓰는 글은 사람들이 작가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시나리오’가 맞다. 작가가 되고 싶다며 대학원 신문방송학과에 들어왔을 정도로 인생에서 안정을 추구하는 편이기에, 졸업을 앞두고 아직 수련이 필요한 작가로서 필자에게 회사원은 필요충분조건이었다. 그래서 취업사이트에 ‘정규직 작가’를 검색한 끝에 병원 홍보팀 등 다양한 허수를 거른 다음 최종 지원한 곳이 바로 뽀로로 회사. 아무래도 이야기를 순수 창작하는 작가로서 회사에 다니는 건 흔치 않은 일인 것 같다. 뽀로로 작가가 된 후 내 삶의 변화를 말하기 위해서 먼저 일에 대한 설명을 해드리겠다.

 

 회사에서 뽀로로 작가의 하루 일과는 어떨까? 9시에 출근해 하루 스케줄과 메일을 체크하고, 9시 반부터 소재 리서치, 10시 반 미팅, 12시 점심 식사 후 개인 작업? 매일매일 다르며 그렇게 체계적으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소재가 고갈되었을 때는 출근했을 때부터 퇴근할 때까지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는 사람들끼리 소재 회의를 한다. 반대로, 시나리오 작업을 해야 할 때는 하루 종일 책상에 틀어박혀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고 모니터와 씨름하는 사이 창밖으로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다. 상부의 검토를 기다리느라 할 일이 없을 때는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안 할 때도 있다. 다른 회사와 직무에 비해 굉장히 변동성도 크고 자유도도 높은 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작업물의 내용에 있어서는 굉장히 지켜야 할 것도 많고, 작가 개인의 취향이 반영되기 어렵다. 회사에서 구체적인 작업공정 별로 자주 벌어지는 일들을 생생하게 소개한다면 보다 이해가 쉬울 것이다.

 

 뽀로로 회사에서 제작하는 키즈 애니메이션은 한 시리즈 당 26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 편당 약 11분가량 된다. 한 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하여 다음 공정인 콘티 단계로 넘기는 것이 작가들이 해야 할 일인데, 그를 위해 작가들은 크게 소재 - 시놉시스 - 시나리오의 3단계의 공정을 거친다. 그 안에는 수많은 피드백과 회의, 수정이 포함되어 있지만 크게 보면 그렇다. 그리하여, 여기 <뽀롱뽀롱 뽀로로> 프로젝트를 배정받은 다빈 작가는 회사의 간판 프로젝트를 맡았다는 기쁨과 새로운 프로젝트는 스케줄을 밀리지 않겠다는 희망찬 다짐으로 열심히 소재를 쓰기 시작하고 있다. 소재를 쓸 때는 국내외 시트콤을 참고하기도 하고, 주말에 있었던 재미있는 일들을 떠올리며 그 일을 가장 맛깔나고 재미있게 살릴 수 있는 캐릭터들을 선택, 조합한다. 사실상 일상에 재미있는 일이 별로 없는 다빈 작가는 소재 찾는 게 그리 녹록치 않지만, 힘든 것도 잠시 소재를 고르고 난 후에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신 들린 듯 키보드를 두드린다. 다 완성하고 읽어 보면 ‘너무 재미있는데? 아무래도 월급을 더 받아야 할 것 같아’ 본인 소재에 대한 애정이 흘러넘친다.


 하지만 한 시간 뒤 담당 피디와 함께 하는 소재 회의. 다빈 작가는 재미있게 읽었으려나 기대되는 마음에 피디의 안색을
살피지만, 얼굴이 그냥 평소랑 똑같이 아무 표정이 없다. 입 찢어지게 하품까지 한다. 역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고, 피디는 말한다. “4기에 이미 한 번 나왔던 소재예요. 그때는 비치발리볼 아니고 줄넘기 하긴 했는데, 어쨌든 큰 틀이 겹쳐서 못 쓸 것 같아요.” 이야기 자체는 재미있었지만 다빈 작가가 간과한 게 있었으니 뽀로로는 이미 스무 살이 넘었고, 이미 몇 백편이나 방송한 미취학 아동계의 전원일기였던 것이다. 결국 다빈 작가는 거듭 소재를 다시 작성한 끝에 그중 한 소재가 피디의 입가를 살짝 씰룩이게 해 드디어 시놉시스 단계로 넘어가는 기쁨을 누린다.(이미 눈치채셨겠지만 피디가 갑, 작가가 을이다) 비록 소재 그대로의 이야기 흐름은 아니지만 피디와의 치열한 회의 끝에 나온 새로운 흐름도 나름 마음에 들어 A4 두 장 분량의 시놉시스를 열심히 쓴다.

 

 “음, 나쁘지 않은데 몇 가지 걸리는 게 있어요.” 하지만 시놉시스 역시 한 번에 통과되는 법은 없다.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피디의 대사들로 몇 줄 소개하자면 “루피가 너무 못돼 보여요. 안 못돼 보이게 심하게 화내는 방법(?) 없을까요?”, “얘네들이 머리가 커서 서로 포옹이 안 돼요.”, “동선이 이렇게 안 나와서 소풍을 설산 말고 다른 곳으로 가야 해요.” 두 번째, 세 번째는 고치는 게 전혀 문제가 안 되지만, 첫 번째 이유는 시놉 자체를 폐기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갈 수가 있기 때문에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든 타개책을 찾아야 한다. 그 외에도 마이크로매니징의 경향이 있는 팀장님을 고려하여 조사하나, 어미 하나까지 거치는 작업도 거치고 나면 다음은 팀장님 보고. 하지만 수정 10고까지 가고 나서도 팀장님의 말 한마디, 사장님의 “NG입니다.” 메일 하나에 거기 들인 시간이 모두 날아가버릴 수도 있다. 시나리오 역시 마찬가지다. 이 단계까지 가서는 아예 이 화수가 없어지는 불상사는 흔치 않지만, 뽀로로 회사는 시나리오를 씬별로 쓰지 않고 컷별로 연출까지 상세히 작성하기 때문에 쓰기가 까다롭고 수정 사항도 많은 편이다. 컷과 컷이 연결되지 않는다거나, 시간이 11분을 넘을 것 같으면 과감히 들어낼 부분을 찾아야 한다. 그 노력을 들이고 나서도 사장님이 시나리오를 아예 폐기하고 다시 쓰는 일이 부지기수다.

 

 이렇게 정해진 규격 안에서 넘지 않아야 하는 선을 넘지 않는 동시에 신선하고 창의적이어야 하는 게 뽀로로 작가를 포함한 키즈 애니메이션 작가의 숙명이다. 그래서 겪게 된 변화로는 대사를 쉽고 간결하게 써야 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일상에서도 감탄사는 “우와~ 멋지다!”, “정말 예뻐!” 등으로 한정되게 되었다는 것, 지인의 자녀들에게 뽀로로 장난감을 반값으로 할인해 주는 ‘뽀로로 이모’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 상점에서 뽀로로가 그려진 물건들이 눈에 더 잘 보이게 되었다는 것 등 작은 것부터, 동화와 애니메이션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는 것, 작가로서 내 생각을 무조건 믿기 보다 내 글을 다시 한번 객관화해서 보는 습관이 생겼다는 것, 다른사람들의 부정적인 피드백에 초연해져 웃는 얼굴로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등 커다란 수확들도 있다.

 

 사실상 이제 곧 4년 차에 접어드는 회사원 작가로서 이제 새로운 변화들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렇기에 정체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변화하려 노력해야 하는 시점이라 할 수 있겠다. 작가이니 작품 내적으로 먼저 생각해 보자면, 사실 세상에 ‘뽀로로’와 ‘변화’만큼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있을까. 뽀로로는 나이를 먹지 않을뿐더러 아무리 세상이 빨리 변한다 해도 아이들에게 권장되는 이야기의 내용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부에서 이야기를 쓸 때 의식적으로 변화하려고 하는 것들이 있다면, 여자 캐릭터들에게 요리를 해서 배식하는 행위를 되도록이면 시키지 않는 것처럼 성적인 고정관념을 심을 수 있는 내용들은 최대한 배제하는 것? 이렇게 한결같이 사랑 받는 뽀로로도 변화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작가로서 나도 더 노력해야겠다는 책임감이 느껴진다. 그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건 처음 작가가 되었을 때의 초심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어떨 때는 변하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게 더 어려우니까. 여기까지 뽀로로 작가가 변화라는 키워드에 맞춰 오랜만에 대학 과제하듯 써본 글인데, 아무래도 조금은 무리한 시도였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대학원 후배들에게 뽀로로 작가라는 직업에 대해서 자세히 들려줄 수 있었고, 다시 한번 졸업 이후의 생활을 돌아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글을 쓸 기회를 준 서강대학원신문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