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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59호] 영화의 시대적 반영:<무녀도>를 중심으로

 오랜만에 극장에 활기를 불어넣은 <듄>(2021, 드니 빌뇌브)은 프랭크 하버트의 소설 『듄』을 영화화한 것이다. 『듄』은 전설적인 SF 소설인만큼 1984년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영화로 만든 적이 있다. 인기 있는 이야기들은 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를 횡단하며 수없이 리메이크 된다. 한국에서는 고전소설 「춘향전」을 기초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수없이 많은데, 영화만 세어 봐도 20편이 넘는다. 같은 소재와 주제의 영화들이지만 제작된 시기와 감독의 차이로 추가된 장면이 있는가 하면 삭제된 장면도 존재한다.


 한국 소설 영화화 프로젝트로 <소중한 날의 꿈>,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소나기>를 제작했던 ‘연필로 명상하기 스튜디오’의 안재훈 감독은 프로젝트의 마지막 작품으로 「무녀도」를 선택해 이를 뮤지컬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였다. 「무녀도」는 김동리 작가가 1936년 <<중앙>>에 발표한 단편 소설로 1947년 을유문화사에서 출간한 『무녀도』에 일부 개작된 버전이 실렸다. 출간 이후 40년이 지난 1978년 김동리 작가는 「무녀도」를 장편소설로 만든 『을화』를 발
표하였다. 두 작품은 김동리 작가의 주제의식인 ‘생명의 구경’, ‘민족의 원형’을 샤머니즘과 기독교의 충돌로 표현하고 있으며, 「무녀도」에 비해 『을화』는 반근대적인 성향이 더 짙게 들어간 작품이다. 한국 소설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만큼 연극, 뮤지컬, 무용으로 계속해서 리메이크되었으나, 영화의 경우 <무녀도>(1972, 최하원)와 『을화』를 영화화한 <을화>(1979, 변장호) 이렇게 두 편만 제작되었다. 1970년대 초반과 후반에 제작된 이후 영화화된 적 없던 소설인 「무녀도」가 다시 영화화된 현재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세 편 모두 기본적으로 샤머니즘과 기독교의 대립이라는 소설의 큰 줄기를 따르지만 무녀를 그리는 방식, 샤머니즘을 대하는 태도, 영화에 드러나는 갈등 구조는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세 편을 비교하여 무엇이 다르게 표현되었는지, 또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무녀도>가 품고 있는 사회를 읽어내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단편 소설인 「무녀도」는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줄거리를 살펴보면 어느 날 집에 찾아온 청각장애를 가진 소녀 낭이가 그려준 그림을 할아버지는 ‘무녀도’라 불렀다.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무녀도’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들 욱이와 딸 낭이를 키우던 모화는 욱이를 공부시키기 위해 절로 보낸다. 욱이가 떠난 뒤 낭이는 청각장애를 얻고 모화는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된다. 절에서 공부에 매진하는 줄 알았던 욱이는 기독교 신자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고 무당인 모화와 갈등을 빚는다. 모화는 아들 욱이에게 ‘예수 귀신’이 쓰였다고 생각해 성경책을 불태우려 하고, 이를 말리던 욱이를 칼로 찌른다. 욱이는 모화의 칼로 인해 생긴 상처 때문에 죽게 되고, 아들을 잃은 모화는 청상과부의 넋을 달래는 굿을 주재하는데 굿판이 절정에 이르자 그녀는 호수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장편 소설로 확장 된 『을화』에선 주인공들 이름이 바뀌는데, 모화는 을화로 욱이는 영술로 낭이는 월희로 바뀐다. 『을화』는 을화가 무당이 되기 전 사연을 새롭게 추가하였으며, ‘굿과 예배’, ‘성경과 칼’ 같은 소제목들에서 드러나듯 샤머니즘과 기독교가 대립하는 내용을 대폭 추가하였다. 「무녀도」와 달리 영술의 아버지를 기독교인으로 설정하였으며, 욱이와 낭이의 근친상간의 뉘앙스도 『을화』에선 지웠다. 그럼에도, 두 편 모두 큰 줄기는 샤머니즘과 기독교의 대립을 주요한 갈등 소재로 삼고 있다.

 

 한국 영화에서 무속 또는 무당이 등장하는 영화들은 1960년대 이르러 늘어나는데 이때 무당들은 과거의 유산이자 사라져야 할 존재로 부정적으로 재현되었다. 반면, <무녀도>는 무당이 영화의 주연으로 등장한 첫 영화이며, 무당의 여성적 욕망이 전면에 드러나기에 배우로써 탐낼만한 매력적인 역할이었다.1) 이 때문에 영화의 주연 자리를 놓고 당대 톱스타였던 윤정희 배우와 김지미 배우가 다퉜으며, 결국 이 작품의 주연은 윤정희 배우에게 돌아갔다. 이후 김지미 배우는 <을화>의 주인공 역을 맡게 된다.


 <무녀도>의 주요 갈등은 샤머니즘과 기독교의 대립이 아닌 모화, 욱이, 낭이의 삼각관계이며,2)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 욱이와 낭이는 남매가 아니다. 영화에서 모화가 아들 욱이에게 성적 욕망을 품고 욱이와 낭이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그려진다. 모화가 욱이에게 품는 성적 욕망은 욱이의 몸을 쓰다듬는 장면에서 드러나는데, 특히 욱이를 등목 시킬 때 클로즈업으로 욱이의 등을 쓰다듬는 모화의 손 장면은 성적 긴장감을 높인다. 또, 원작에는 없는 모화의 과거 장면이 플래
시백으로 등장하는데, 모화는 과거에 사당패로 어느 집 도령(욱이 아버지)과 눈이 맞아 욱이를 출산한다. 과거에 등장하는 욱이 아버지는 욱이와 동일한 신영일 배우가 연기하고 있어 성적 효과가 증폭된다. 욱이와 낭이는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는데, 둘의 정사 장면이 영화 속에 여러 번 노골적으로 등장한다. 삼각관계가 주요한 갈등인 만큼 욱이는 모화에게 낭이를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장면도 추가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성경책을 불태우는 결말 전에 위치함으로써 모화가 기독교를 배척함과 동시에 욱이와 낭이의 관계를 질투하는 것으로 비춰진다. 끝에 다다르면 소설과 달리 욱이는 죽지 않고 창에 찔린 뒤 낭이를 데리고 떠나고 버림받은 모화는 물에 비친 욱이 아버지 얼굴을 보고 더 깊은 물속으로 들어간다. 삼각관계는 노골적인 정사 장면과 섹슈얼한 장면들을 넣어 형성된 성적 긴장감을 기초로 한다. 이는 1960년대 말부터 1971년까지 68혁명의 영향으로 한국 영화계에 불어닥친 ‘섹스 영화’의 영향3)과 1970년대 텔레비전의 확산으로 한국 영화계의 불황을 타계하기 위해 에로티시즘이 채택된 영향으로 보인다. <무녀도>는 위와 같은 에로티시즘을 영화와 결합하기에 적절했는데, 문예영화로 그 예술성을 인정받았기에 성적 표현과의 결합이 용이한 작품이었다.4)

 

 반면 <을화>는 원작을 따라 무속신앙의 비중을 높였으나 <무녀도>와 마찬가지로 무속신앙과 기독교의 대립이 중요한 갈등 상황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무속신앙과 기독교의 대립은 영화가 시작되고 한 시간이 더 지난 시점에서야 나타난다. <을화>에서 주된 갈등은 권력과 돈의 문제이다. 을화는 자신을 무녀로 만들어준 신엄마 빡지와 마을 내의 주도권 두고 싸움을 벌인다. 빡지는 그 과정에서 범죄까지 저지르지만 결국 을화가 승리한다. 영화는 권력이 돈과 연계되어
있음을 보여주는데, 빡지의 굿을 뺏은 을화가 남편인 성방돌과 나누는 대화에서 “벌써 40원이나 모아진 기라요”라는 대사를 성방돌은 방을 한 칸 더 늘리자는 말을 뱉는다. 이후 집을 고치고 방을 늘리는 장면을 보여준다. 빡지와의 주도권 경쟁에서 앞설수록 을화는 많은 재물을 얻는다.5) 끝에 다다르면 빡지가 을화에게 돌아와 복수하는 과정에서 불이 나 함께 타죽으며 영화는 부도덕한 인물들의 공멸을 보여준다.

 

 1970년대에 이르면 경제개발의 효과로 중산층이 생겨났으며, 아파트 가격이 폭등해 부동산 투기를 하는 여성들을 비하하는 복부인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지는 등 한국 사회는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화폐경제를 경험하는 시대로 접어든다. 언론은 이런 과도한 이윤추구를 비판하는 기사들을 써내곤 했었다. 영화는 시대에 맞게 샤머니즘과 기독교의 대립보다 권력과 돈을 추구한 자들의 결말을 보여주는데 엔딩에서 빡지와 을화가 죽은 뒤 재만 남은 집터는 허망함을 전달한다. 즉 영화는 그녀가 권력과 부를 쟁취한 뒤 모든 것을 잃는 과정을 보여준다. <을화>가 제작되던 1970년대 후반엔 이전의 무당들을 재현하는 모습 또한 한 단계 변화하는데 <무녀도>의 모화는 성적 욕망을 드러내긴 했지만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반면, 을화와 빡지는 자신들의 능력을 권력 쟁취를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능동성을 지닌 캐릭터로 묘사된다.6)

 

 그렇다면 최근에 제작된 <무녀도>는 어떻게 다를까? 이번 영화는 단편 소설 「무녀도」를 충실히 따른다. 이야기도 액자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화는 무속신앙과 기독교의 대립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리고 영화는 누구의 편도 쉽사리 들지 않는다. 신에게 기도하는 과정은 영화에 자주 묘사되지만 그 소망이 이뤄졌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영화에서 아픈 사람을 위해 굿과 기도를 하는 장면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는데 실상 어떤 쪽이 효과가 있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모화의 칼에 맞아 죽어가는 욱이를 무당인 엄마와, 목사 모두 치료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내레이션으로 등장한다. 물론, 영화엔 욱이의 노력으로 마을에 교회가 세워지고 마을 사람들 다수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대사가 변화하는 시대에 무당을 위한 자리가 사라져감을 드러내지만 이 또한 영험함을 잃은 직업적 무당의 패배로 보인다. 그러므로 영화의 끝에 다다르면 두 가치관의 충돌의 결과로 발생한 허망함이 강조된다. 영화는 종교적 대립을 그리지만 일종의 신념의 대결이자 2016년 대통령 탄핵 이후 유튜브 등 대안 미디어로 인해 발생한 정치적 양극화와 겹쳐 보인다. 이는, 1970년대에 만들어진 앞선 작품들과 달리 무속신앙에 대한 시선이 상당 부분 교정된 후에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가능하다. 1970~80년대에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무속신앙 또한 전통문화의 일부로 여겨지며 교정이 일어났고 2000년대부터는 이창재 감독의 <사이에서>(2006), 박찬경 감독의 <만신>(2013) 등 무속, 무당에 대해 진지한 자세로 성찰하는 작품들이
등장했다. <무녀도>는 그 영향 아래에서 제작된 작품이다.

 

 또, 앞서 언급했듯 무당이라는 직업이 끝나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안재훈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혔듯 “<무녀도> 속 모화가 무당이라는 직업을 끝맺는 것처럼 어느 땐가 내 직업을 끝맺어야 하는 시점이 굉장히 빨리 오고 있다는 느낌”7)을 영화에 충실히 표현하였다. 영화 속 모화는 처음 등장할 때부터 영험함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며 꾸준히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게 된다. 직업적 상실의 두려움은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에서 이세돌이 패배하며 ‘4차 산업혁명’이 사회의 큰 화두로 떠오르며 불어닥친 불안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COVID-19로 변화된 지금 사회에 던지는 질문으로써도 적절해 보인다.

 

 이렇듯 <무녀도>와 <을화>를 영화화한 3편의 작품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시대에 따라 다른 감수성을 흡수하여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 샤머니즘과 기독교의 대립이라는 기본 구조를 시대에 따라 성적 표현이 두드러지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드러나도록, 정치적 양극단 또는 급변하는 시대를 보여줄 수 있게 리메이크하였다. 앞서 언급한 <춘향전>을 제외하고도 전설로 남아있는 이만희 감독의 <만추>의 리메이크작들, 자신의 작품을 리메이크했던 김기영 감독의 <충녀>와 <육식동물>을 비교해 살펴보는 것도 한국 사회를 이해하고 고전영화를 넓은 각도에서 즐기는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1) 박유희. (2012). 샤먼의 기억 ― 한국 영화에 나타난 ‘무당’ 표상. 현대문학이론연구, 0(48), p.195
2) 이영미. (2016), <무녀도>, 문예영화의 관습과 무속신앙에 대한 태도. 영화와 문학2: 영화보는 한국문학, 서울:한국영상자료원 P.118
3) 조준형. (2014). 박정희 정권 후반기 영화와 섹스 그리고 국가 - 독일성교육영화 <헬가>의 수입과 검열과정을 중심으로. 한국극예술연구, 0(45). pp.163–211.
5) 이영미. (2016), <무녀도>, 문예영화의 관습과 무속신앙에 대한 태도.영화와 문학2: 영화보는 한국문학, 서울:한국영상자료원 P.120
6) 박유희. (2012). 샤먼의 기억 ― 한국 영화에 나타난 ‘무당’ 표상. 현대
문학이론연구, 0(48), p.199
7)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7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