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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57호] 한국 동물영화와 가족, 공동체, 휴머니즘

채 태 준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연구원

 

  동물은 우리의 가족입니다.’ 지난 4월 7일 치러진 보궐선거는 오늘날 가정 내 동물에 관한 담론으로서 ‘반려’가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되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후보들은 앞다투어 ‘반려동물’에 관한 공약을 발표했고, 때로는 스스로가 ‘동물과 함께하는 반려인’이라 밝혔다. 서울 시장으로 당선된 오세훈 당시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는 “동물은 사람에게 안정감과 따듯함을 주는 존재”라 강조했고,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는 “저도 진돗개 2마리를 키우는 반려인”이라고 밝혔다. 그러니까 ‘반려동물은 가족이다’라는 프레이즈에는 초당적 합의가 있었다. 또한 반려동물은 관습적이고 문화적인 개념임과 동시에 법적 지위를 획득한 개념이기도 하다. 비록 ‘미흡할’ 수준일지라도 반려동물이라는 개념은 1999년 처음 <동물보호법>개정안 내에서 ‘일상적 유대관계를 나누는 동물’을 가리키기 위해 제안되어, 2013년 이뤄진 개정을 통해 법률에 안착했다. 분명 오늘날 ‘반려동물’은 지난시절의 ‘애완동물’을 따돌린, 가정 내 동물에 관한 패러다임이다. 

 

  2000년대 전반에 걸처 이뤄진 한국의 상업영화들도 이에 발맞추어 동물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관해 서사화해왔다. 2000년대 초에 개봉한 <각설탕>과 <마음이>같은 ‘유물’급 작품이라면, 2010년대 이후 개봉한 <미스터 주>, <미스터 고> 등의 ‘장르화된’ 동물영화가 등장한 바 있다. 안타깝게도 동물영화에 관한 비평과 연구는 거의 행해진 바 없으며, 저널리즘 비평의 차원에서 동물영화는 CG를 비롯하여 발전된 영상제작기술의 증거라든가 ‘동물에 대한 감수성’의 효과로서 논의되었다. 후자의 방식을 따르는 해석의 경우 특정한 서사구조를 가졌다. 먼저, 반려동물 가구 수를 거론하고. 영화를 소개한다. “이 영화는 최근 반려동물과 함께 살고 있는 가구의 증가와 더불어 반려동물이 우리의 사회에서 가족으로 고려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라고. 

 

  그러나 ‘동물은 우리의 가족’이란 수사에 그저 환호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가족’이라는 단어야 말로 오늘날 가장 큰 혼파망(혼돈 파괴 망각)의 중심에 있는 문제적 단어다. 오히려 동물이 우리의 가족이 되는 과정은, 기존의 ‘가족’에 내재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기도 한다. 가정 내에서 반려동물과 관련한 돌봄노동이 성별적으로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 한 연구는, 아버지와 자식들을 ‘돌보’는 어머니의 역할이 동물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동물영화는 ‘동물이 우리의 가족이 되었다는 증거’보다는, ‘동시대 한국사회에서 가족과 공동체란 무엇인가’에 관해 알려줄 수 있는 텍스트다. 

 

2000년대 ‘가족적 결여’를 대체하는 동물들

 

  IMF와 가족해체담론의 부상을 지나고 2000년대 초중반에 등장한 동물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가족적인 ‘결여’를 가지고 있었다. 2006년 개봉한 <마음이>는 엄마가 부재한 환경에서 단 둘이 살고 있는 남매와, 이들을 보살피는 강아지 ‘마음이’를 그린다. ‘마음이’는 부재하는 엄마를 대신해서 ‘나쁜 어른’들로부터 찬(유승호 분)이를 지켜낸다. 마음이는 납치된 찬이를 구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게 되는데, 마음이의 죽음 이후 ‘집을 나간 엄마’는 돌아온다. ‘엄마의 대체재’가 떠나자 진짜 엄마가 돌아오는 셈이다. 같은 해에 개봉한 <각설탕>(2006)에서도 이 같은 구도는 반복된다. <마음이> 속 ‘마음이’가 두 아이의 부모 역할을 대체하다가 진짜 부모에게 이 바통을 다시 넘겨주며 마무리된다면, <각설탕>의 경우 말인 천둥이는 주인공 ‘시은’을 ‘어른’으로 길러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기수였던 엄마처럼, 시은 역시도 ‘기수’로서 마지막 레이스에서 우승을 쟁취하게 되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영화는 병을 앓고 있던 천둥이가 스스로 ‘치료가 아닌 마지막 경주’를 선택했음을 강조한다. 시은은 죽은 엄마가 그랬듯 ‘기수’가 되고, 경주에서 우승한다. 말은 부재한 부모를 대신해, 시은을 ‘어른’으로 만들어내는 셈이다. 

 

  두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부재하는 것은 ‘엄마’이며, 동물은 헌신적인 사랑을 통해 엄마의 자리를 대체한다. 도나 해러웨이(Dona Haraway)는 ‘개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관한 이야기란 인본주의적인 자기애의 반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특히 소비문화 내에서 동물과 맺을 수 있는 수많은 다양한 관계들을 제거한 뒤 오직 ‘사랑’만을 남겨두는 경향은, 동시대 인간을 통해서는 어려운 ‘휴머니즘의 복원’을 동물을 경유해 시도하는 것이다. ‘사랑’을 비롯해 다양한 휴머니즘의 가치들이 자명한 도덕이라기 보다는 억압과 착취의 현장으로 지목되는 시절에, 의인화된 동물을 통해 전해지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랑’의 낯뜨거움이란. 특히 ‘엄마’와 ‘사랑’ 사이를 다시 매개하고자 하는 이 시도는, 여성에 관한 고착화된 이미지와 그 역할을 사적인 영역으로 한정하는 억압으로 현상할 수 있다.

 

2010년대 ‘능력의 결여’를 대체하는 동물들


  호주의 문화연구자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팀 개드(Tim Gadd)는 가축이 등장하는 영화를 모더니즘 동물영화와 포스트모던 동물영화로 나눈바 있다. 20세기 초반의 ‘Lassie’시리즈와 20세기 말의 <k-911>과 같은 작품을 비교하며, 전자의 영화 속 동물은 주로 어린이와 관계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 동물은 어른 남성의 조력자이자 ‘동료 형사’로 등장한다고 말한다. 20세기 초의 영화 속 가축들이 ‘아이’와 주로 관계하는 ‘귀엽고 친근한 대상’이라면, 21세기의 영화 속에서 가축들은 ‘성인’과 짝을 이루고 ‘직업적 전문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20세기 초의 영화들이 가축과 인간 사이의 강한 이항대립을 중재하기 위해 여성과 어린이 등 주변화된(Marginalized)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했다면, 20세기 후반의 동물영화에서 인간과 가축 사이의 이항대립이 약화되어 백인/남성이라는 소위 헤게모니적 주체와 동물이 관계한다. 특히 개드는 후자의 영화들 속에서 동물들은 ‘직업을 가진’ 채 등장하며, 이제 주인공은 그가 가진 결여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동물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이 인간보다 탁월한 능력을 지녔기에 자발적으로 동물을 택한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분석은 한국영화에서도 적용 가능해 보인다. 한국 영화 내에서도 어린아이(마음이), ‘소녀’(각설탕), 시각장애인(챔프)과 관계하는 영화로부터 성인/남성과 관계하는 영화들(<미스터 주>, <해치지 않아>)로의 이행을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과 가축 사이의 이항대립이 약화되었다고 다소 낙관주의적인 해석을 내놓은 개드와 달리, 한국 동물영화의 서사적 전환을 좀 더 ‘고깝게’ 보는 것 역시 가능하다. 여전히 특정한 종류의 ‘결여’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동물이 등장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결여란 ‘능력’이다. <미스터 주>(2020)는 국정원 요원이지만 후배보다 승진에 뒤쳐진 주태주(이성민 분)를 그린다. <해치지 않아>(2020)의 경우 ‘변변치 않은 스펙’을 지닌 대형로펌의 수습변호사 태수(안재홍 분)에 관한 이야기다. <챔프>(2011)의 시력을 잃어가는 기수인 승호(차태현 분)는 변변치 못한 성적으로 인해 ‘퇴물 기수’라 불린다. 이때 엔터테이너, 정보요원, 운동선수로 등장하는 동물들은 자신의 직업적 전문성을 발휘해 주인공이 지닌 결여를 극복하도록 돕는다. <미스터 고>(2013)의 고릴라 '링링'은 야구선수로 활동해 그의 친구인 ‘웨이웨이’가족이 빚을 청산 하고 다시 서커스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한다. <미스터 주>의 군견 ‘알리’는 무능한 요원 태수가 다시금 국정원의 엘리트요원으로 거듭나게 만든다. <챔프>(2011)의 경주마 우박이는 경주에서 우승해 ‘퇴물기수’로 불렸던 승호가 여전히 유능함을 입증한다. 


우리, 가족에 관해 질문할 계기로서 ‘동물’

 

  가족적 결여를 대체하는 동물로부터, 능력의 결여를 극복하도록 돕는 동물로의 이행이 암시하는 바는 무엇일까. 주변화된 주체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의 현현’으로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공동체적 성원권을 획득했던 동물이, 이제 능력의 탁월함을 발휘해 ‘일그러진 남성들’이 탁월함을 발휘하도록 돕는다. 이 일련의 변화는 아무리 생각해도 동물과 인간 사이의 관계 보다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화정치적 관계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후기자본주의, 신자유주의, 통치성, 능력주의 등 지극히 ‘인간적인’ 체제들 말이다. ‘동물영화는 곧 동물에 대한 인간의 감수성의 진보’라는 도식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쩌면 동물영화의 동물은 동시대 한국 사회의 문화정치적인 조건과 정치적 무의식을 발견할 수 있는 알레고리로서 더욱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데리다는 ‘레비나스마저 누락시킨 절대적 타자성’이 동물이라고 말했다. 들뢰즈는 고정된 배치가 아닌 변이와 이행 속의 주체가 새로운 감각을 생성하고, 주체와 타자 사이의 상호 경계가 분리불가능해지는 순간
에 ‘동물-되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도나 해러웨이는 아이가 아니라 ‘친족’이 필요하다며 툴루(Chthulu)-땅-위의 모든 포유류들이 연대하길 강조했다. 이 철학자들은 동물에 ‘관해서’ 말하면서도, 동물을 ‘통해서’ 휴머니즘을 상대화 했다. 이 알레고리로서의 동물에 관해 읽는 작업은, 실재하는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일지도 모른다. “동물은 우리의 가족”이 우리시절의 도덕이라면, 문제적 단어는 ‘우리’와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