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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58호] 그림자밟기: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안 준 영

 

 그 해 겨울에는 내내 잠이 쏟아졌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도, 무엇이 되어야 할지도 알 길이 없 었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끝도 없이 삭막하게만 느껴지는 계절의 한복판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눈을 감고 생각을 닫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인간은 겨울잠을 자지 않는 것일까? 도대체 왜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배는 고파서, 밥을 챙겨 먹기 위해 일어나야 하는 걸까? 잠을 더 이상 잘 수 없을 때는 하고 싶지 않은 고민 대신 불평들로 머리를 채웠다. 그냥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다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면 좋겠다. 창문에 낀 성에만치 빠르게 증식하던 불만은 매번 그와 같은 덧없는 희망사항으로 귀결되곤 했다. 나는 비관과 무기력에 서서히 잠식되어가던 스물셋 겨울에 처음으로 이 영화와 조우했다. 

 

 해가 떠있는 내내 잠들어있었던 탓에 잠이 오지 않아 내내 뒤척이던 새벽이었다.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친구가 이 영화를 같이 보자고 했다. 영화를 보려면 노트북을 켜야 했고, 브라우 저를 열어서 영화의 제목을 검색하고 브이오디를 구매한 후 영화를 다운 받아야했다. 나는 친구 의 말에 이불 밖으로 나와 책상 위에 두었던 노트북을 들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그날 하루를 통틀어 처음으로 내가 ‘무언가’를 했던 순간이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펑펑 우느라 진이 다 빠져서 깊은 잠을 잤다. 매번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정말로 끝도 없는 심연 속으로 잠기고 싶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 새벽에 무엇이라도 하게 해준 그 친구가, 이 영화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두 친구의 이야기를 다룬다. 개인적으로는 원제인 <칠월과 안생 (七月与安生)>을 선호하는 편인데, 그것은 이 영화가 전적으로 주인공인 칠월과 안생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소울메이트라는 표현조차 칠월과 안생의 결과를 규 정하기에는 다소 평면적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울메이트는 으레 마음 이 잘 맞는, 깊은 연결감을 느낄 수 있는 상대를 의미하는 어휘로 사용된다. 그러나 작중의 칠 월과 안생은 꽤 오랜 시간을 물리적으로 떨어진 채 보내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 이기도 한다. 서로를 향한 엇나간 마음들이 날카로운 말이 되어 기어이 쏟아지고 마는 중후반부 가 되어서는 둘의 관계가 애정보다는 애증에 가까운 것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 즈음이 되면 등장인물들 또한 그런 것을 묻는다. 우리,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이들의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성은 어떻게 보면, 칠월과 안생이라는 두 사람을 먼저 각각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칠월은 저녁마다 가족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가정에서 자랐다. 명문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진학을 하지만 삶의 목표와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엄마가 그러는데, 여자는 갈 곳이 많지 않대. 그냥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옮겨가는 거래. 앞으 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묻는 안생의 질문에 칠월은 그렇게 대답한다. 그런가 하면, 안생은 좀처럼 정주(定住) 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아버지를 이른 나이에 잃었고 있으나 마나 한 어머니와 살고 있다. 열세 살 무렵의 안생에게 밥을 먹이고 돌봐준 건 칠월의 부모님이다. 이후 안생은 시간표에 맞추어 공부를 하는 것이 싫다는 이유로 직업학교에 진학하고, 크루즈에서 일을 하며 술과 음식을 얻어먹는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한곳에 정착해있는 칠월과 내내 떠돌아 다니는 안생의 대비는 <아비정전> 속 수리진과 아비, 혹은 <해피 투게더>의 아휘와 보영의 관계 성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정반대 성향을 가진 두 사람이 관계를 맺는다고 했을 때, 그 관계의 양상에 관해서는 크게 세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첫 번째, 서로가 가지지 못한 부분을 보완해 줄 수 있는 건설적인 관계가 될 것이다. 두 번째, 서로의 가치관과 성향을 이해하지 못해 파국을 맞을 것이다. 세번째, 처음에는 서로의 다른 점에 이끌려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가 결국은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 고 멀어질 것이다. 열세 살에 ‘숙명처럼’ 서로를 찾게 된 칠월과 안생은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된다. 칠월의 가족은 곧 안생의 가족이 되고, 안생은 직접 돈을 벌어 마련한 첫 자취방에 칠월을 초대하며 ‘이제 너를 초대할 곳이 생겨서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둘의 사이에 가명이라는 남성이 끼어들면서 둘의 관계에는 균열이 생긴다. 


 칠월은 안생에게는 없는 안정적인 울타리,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안생에게는 칠월 에게는 없는 자유로움이 있다. 칠월은 내심 자유롭고 명랑한 안생을 동경하고, 안생은 칠월의 울타리를 부러워한다. 이와 같은 관계 설정은 이들의 이름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여름 중 가장 더운 달인 ‘칠월’이라는 이름은 어쩌면 안생에게 조금 더 어울리는 이름일지도 모른다. 안 생(安生)이라는 이름은 반대로 칠월에게 더 잘 어울리는 이름처럼 보인다. 그러나 칠월은 안생 이 될 수 없고, 안생은 칠월이 될 수 없다. 그 와중에 안생이 칠월의 남자친구인 가명을 좋아하 게 되고, 이 상황에서 가명은 섣불리 칠월과의 미래를 약속하지 않아 칠월을 불안하게 한다. 안생은 칠월과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베이징으로 떠나지만, 칠월은 안생을 마중하러 갔던 기차 역에서 기어이 보게 된다. 가명이 매일 목에 걸고 다니던 불상이 안생의 목에 걸려있는 것을. 

 

 원자 간의 공유결합은 두 원자가 전자의 개수를 공유하여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것은 빼앗긴다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상대를 위해 기꺼이 내어주었던 무언가를 빼앗기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 칠월과 안생은 모두 어느 순간 그 사실을 깨닫게 되고, 서로를 배려해서 당연하게 했던 행동들에는 ‘양보’라는 이름표가 붙어 조금 더 양보한 쪽이 누구인지를 내내 다투게 된다. 절대 깨어지지 않을 것 같던 두 친구의 관계에도 금이 간다. 안생 은 베이징으로 떠나기 전, 떠나지 말라는 칠월에게 웃으며 이별을 너무 슬프게 만들지는 말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가 서서히 저물어가는 모습은 좀처럼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그저 쓰게만 느껴진다. 

 

 누군가는 관여 혹은 몰입, 누군가는 유사사회적 상호작용이라고 명명할 감정적 반응으로 인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칠월 같은 사람일까, 안생 같은 사람일까? 나에게도 칠월 같은, 혹은 안생 같은 친구가 있었나? 이와 같은 질문들과 함께 100분이 조금 넘는 러닝타임 동안 칠월이 되었다가 안생이 되었다가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덧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누군가에게는 칠월, 누군가에게는 안생이었겠구나. 칠월과 안생은 어쩌면 처음부터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열세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의 칠월과 안생을 영화 속에서 ‘그림자’에 비유하는 것처럼.  

 

 위의 이유로 이 영화에서는 그림자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나는 그중에 ‘누군가 의 그림자를 밟으면 그 사람은 절대 떠나지 않는다.’는 대사를 가장 좋아한다. 가을이 되고, 날이 쌀쌀해졌다. 나뭇잎은 나뭇가지와, 우리는 여름의 열기와 이별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 영화를 몇 년 만에 다시 보면서, 나는 내내 겨울잠을 자고 싶던 그해 겨울의 나와 헤어지기로, 그 애를 보내주기로 마음먹었다. 영화 속 칠월의(혹은 안생의) 말대로 헤어짐이 슬프지 않을 수는 없 지만, 나는 이제 안다. 내가 지금까지 알 수 없는 저 멀리로 휩쓸려 사라져버리지 않은 것은 그 시절 누군가 내 그림자를 내내 밟아주었던 덕분이라는 것을. 가장 사랑하는 영화에 대한 두서 없는 감상을 마치며, 가장 사랑하는 그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