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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58호] 우리는 어쩌면 만약에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장 혜 연

 

 치열하게 살아낸 하루의 자정에 몸을 뉘고 생각한다. 아니, 이성적인 생각을 한다기보 다는 ‘감정’을 한다.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하고, 또다시 화내고, 돌이킬 수 없는 사건 으로 애태우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또 후회한다. 안타깝게도 신은 인간에게 기쁨이라 는 감정의 우물보다 슬픔과 분노라는 감정의 우물을 더 깊게 만들어놓아서 망각이라 는 한 줄기 빛이 비치었을 때 얕은 기쁨은 금세 말라 고갈되고, 슬픔은 훨씬 더 오랜 시간 보관된다. 똑같은 감정을 다시 느끼지 않기 위해 다시 되짚어보고, 상황을 몇 번 이고 다시 그려본다. 그래봤자 지난 시간이지만 끓는 물처럼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이성으로 누르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받아들일 수밖에. 삶의 과정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받아들인다. 그 사건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결국엔 그저 받아들이고 수긍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는 자그마한 자극에도 크게 반응했 지만, 밥 몇 그릇 더 먹었다고 익숙해져서인지 자극에 대한 반응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매일 마주하는 자극에 매일 불같이 화내거나 뛸 듯이 기뻐하기는 어렵다. 나이를 먹으면 놀라운 게 없다고, 몇 년 전 우리 할머니가 말씀해 주셨는데 이젠 그 말의 뜻을 어렴 풋이 알 수 있다. 무뎌져 가는 거지. 사랑도 그렇다. 몇 년이고 만난 연인이 매일 설렐 수 없는 것처럼. 사랑 같은 좋은 감정도 이렇게 지우개 모서리가 닳듯이 뭉개지는데! 하물며 영원한 것이 있을까. 

 

 외부에서 받는 자극에 매일 동일한 크기로 반응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 하는 것들은 있다. 아주 사소하고 시시한 것들. 아주 피로한 하루를 마치고 내가 좋아 하는 포근한 이불에 몸을 맡기는 것, 잠이 덜 깬 아침에 연기가 나는 뜨거운 커피를 직접 내려 마시는 것, 커피를 마시기 전에 한껏 숨을 뱉어 폐의 공기를 빼고 커피 향 으로 들숨 가득 채우는 것, 착하고 귀여운 나의 친구와 며칠 만에 만나 하이파이브를 하는 것, 쉼과 안정. 나열하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구나 새삼스레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좋아하는 것들을 나열하고 나서야 뚜렷이 느껴 지는 것이 슬프기도 하다. 

 

 개미 떼처럼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각자의 역사와 시간이 담긴 주인공인 데 왜 이렇게 자신에게 무관심할까. 인간의 숙명이라는 밥벌이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또, 우직하게 사는 것일 뿐인데. 어쩌면 목적이 너무 소중한 나머지 자 기 자신을 수단으로 희생하는 것일 수 있겠다. 학교 가는 길에 신도림역에서 환승을 위해 내린다. 인파에 떠밀려 계단을 내려가는 중엔 나라는 사람이 없어진 것 같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출퇴근 시간의 모습을 비추듯이 내가 내 인생의 주도권을 가진 주체적인 사람이 아니라 감독의 큐 사인에 따라 연기를 하는 엑스트라처럼 느껴 질 때도 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각자 자신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주인공이기에 각자의 시간과 역사가 스며있다. 우연히 한 공간을 공유한 저 사람에게도 그만의 역사와 시간이 존재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주인공이다. 


 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이거다. 조금 고루하고 뻔한 말이지만 우리 이제 지나간 것들, 어찌할 수 없는 것들, 분노하고 미워하며 마음의 우물에 저장해놨던 것 들을 보내주자는 거다. 나와 인연이 없던 제3자의 인생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노릇이고, 그의 모든 생각과 관점을 간파할 수 없으며, 그들의 입장을 세세하게 이해해 줄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 서로 조금만 양보하고 누그러뜨리자. 왜 그런 경험 한 번쯤 있지 않은가. 이해가 가지 않아 실컷 욕하고 미워하고 싫어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아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이해했던 경험 말이다. 우린 서로의 시각에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에 불과하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상황과 사정이 모두 다르다는 것.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굳어진 바위처럼 그 사람만의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 감정이 용수 철처럼 마구 튀어 오르는 날에는 다시 한번 되뇌어본다. 매번 하던 ‘감정’은 접어두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숨을 크게 내쉬며 되뇌어 본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 사람 만의 사정이 있겠지!”. 

 

 우리는 그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어차피 인간에게는 밥벌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밥벌이를 위해 달려가면 된다. 마치 개미 가 사탕 조각을 찾아 줄을 지어 달려가는 것처럼. 불설비유경(佛說譬喩經)에서 부처는 인간의 삶을 이렇게 비유했다. 발 아래에는 무서운 독사와 이무기가 들끓고 머리 위에 서는 벌이 쏘아대고 쥐들이 나무 뿌리를 양쪽에서 갉아먹고 있지만 떨어지는 꿀 몇 방울의 단맛 때문에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 공동의 목표를 위해 달려 가는 와중에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조금 더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응하자. 원망과 미움, 분노로 자기 자신을 소모하고 고갈시키지 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