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고

[159호] 예술에서 예술인으로 :공공 지원 사업 관점의 변화

오 남 기자

 

흔히들 문화 재단 혹은 공공예술 지원 사업을 펼치는 기관 직원들 사이에서 웃프게 하는 말이 있다. “우리(기관)의 목표 는 우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필자가 재단 직원으로 입사하 고자 면접을 봤을 때, 면접관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10년 뒤에서 재단은 여전히 존재할까?” 필자는 그때 존재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예술인(혹은 기획자)이 더 이상은 공공지원 사업에 의존하지 않도록 자생할 수 있기 를. 복잡하고 너무 많은 문서들을 요구하는 (행정 수행 당사 자이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을 정도의) 행정 체계, 공모 지원 신청, 심사, 지원금 교부 신청 그렇게 힘겹게 지원 금을 받고 나면 사업(프로젝트)이 다 끝난 뒤에 기다리는 이 모든 것의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는 정산! 혹자는 나이브 하다고 웃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노동이란 무엇인가’란 심오한 질문까지 들어가지 않더 라도, 적어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는 게 예술이다. 필자가 근무하며 경험하고 마주친 예술은 분명 시간과 노력 그리고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 필요한 노동 이다. 이를 통해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의 대가를 받는 것이 예술이다. 그게 소수의 몇 명 엘리트, 스타 예술 가에게만 절대적 보상 체계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 적어도 구성원의 50%만큼이라도 자신의 전문 분야(예술적 장르, 예술적 방법론, 예술적 스킬 등)가 자신의 지속 가능한 수입 원이자, 삶을 영위하는 수단으로 이어지는 것. 흔히 보릿고 개라 불리는 1~3월의 공공 지원 사업 공백기를 걱정하지 않는 것. 만약 현재 문화 재단의 주된 미션과 사업이 ‘예술 인 중심 지원 사업’에 머무르고 있다면 여기서 독립하는 것이, 문화 재단의 지향점일 것이다.
  코로나-19가 문화예술계를 강타했다는 표현은 부족 함이 없다. 22년 동안 청담동에서 제자리를 지켜온 재즈클 럽 ‘원스 인 어 블루문’의 사라짐도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이 다. 드라마 <파리의 연인>, <내 딸 서영이>의 촬영장소이기 도 했던 이 공간은 긴 시간 동안 국내 재즈클럽의 고급화와 대중화를 이룬 상징적 장소이다. 코로나-19로 경영난에 시 달리다 그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런 현장의 갈급 함에 발맞춰 중앙, 시정부는 추경을 통해 예술인 긴급 지원 편성했고, 전국적으로 예술인 고용보험 체계가 마련되어 조금 더 희망을 시사하고자 했으나. 노력과 별개로 예술 인 개인의 생활고 가중과 더불어 수많은 민간 (문화)공간이 폐업을 했고 각종 축제 및 공연도 설 자리를 잃었다. 매년 6월 초 DMZ뮤직 페스티벌을 해오던 피스트레인도 2020년, 2021년 ‘취소’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활동터가 사라 지니, 예술인의 삶은 더욱 곤궁해졌다. “예술가는 가난해” 어렸을 때 부모님한테 “예술가가 되고 싶어요!” 하면 으레 듣던 말은 과거 일면 사실이기도 했으나,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사실을 넘어 진리에 가까워지는 불행이 펼쳐졌다. 코로 나-19 이후, 2년에 가까운 지난한 시간이 지나간 다음 전 국민 백신 70% 이상 접종률과 함께 ‘위드 코로나’가 찾아왔다. 필자가 처음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위드 코로나의 시작으로 인한 문화(지원)사업의 변화’란 주제로 청탁을 받았다. 문화 (지원)사업에 한정해서 본다면, ‘변화’보다는 ‘복귀’가 적당 한 용어일 것이다. 
  위축된 소비 심리가 다시 활기를 띠고, 멈췄던 공연- 극장-축제가 다시 재개되면서 말 그대로 예술인은 예술 활동이 가능해졌다. 기관에서도 활기가 띤 예술계 현장에 발맞춰, 대면 중심 행사, 전시, 축제들을 재개했다. 그럼 지원 사업은? 솔직히 말하면 코로나-19 이전과 그게 다를 게 없다. 그간 수행하던 지원 사업의 시스템을 그대로 이어 가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한 게 업계 내 솔직한 심정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기관 내부에서가 아니라, 외부 다시금 현장 에서 찾아야 한다. 기관 사업의 큰 특성은 어느 시정부를 타고 있는지 정치적 이해관계를 결코 무시할 수 없지만, 현장(실제 예술 활동 수행자, 예술인 당사자의 담론)의 결을 무시할 수 없으며, 종래에 이곳으로 향하는 거대한 흐름을 따르고 있다. 그것을 민주주의, 예술인 당사자주의, 예술인 과 협력인 민-관 거버넌스라 체계라 명명하는 건 그것의 구체적 양태로서 기능한다.
  외부의 답을 (청년들의 거부반응이 있는 것을 알지만) 미래를 견인할 청년예술인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미래를 견인한다란 용어에 담긴 적극성이 청년(예술인)에게는 부담 스러울 수밖에 없다. 본고에서도 청년이 미래의 주체로서 변화를 호명하는 씬체인저로 호명하지는 않는다. 대신 근미 래에, 다가올 시공간 내에 주된 활동자(그게 주체성이든, 나이에 의해 부여된 생산인구로서 역할이든)가 되어야 하는 예술인이 ‘요구’, ‘경향성’이 무엇인지 알아야 위드 코로나 그 이후에 펼쳐질 변화를 감각할 수 있다는 의미다. 아이 러니하게도 ‘MZ, 알파, 청년, 2030’ 지나치게 많은 이름 으로 호명되는 이 세대의 예술인의 경향성을 찾기란 불가 능에 가깝다.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음, 군집화될 수 없음, ‘개인’ 내에서도 교차되는 다변화된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이 세대(이러니 세대란 말이 얼마나 빈곤하고 게으른 단어언지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다)가 요구하는 ‘미래 예술, 예술계, 공공 예술 지원체계’는 무엇일까.
  예술(장르)로부터의 탈피의 움직임이다. 여전히(예술 대)학교 내 교육 담론도 그렇고, 장르 예술계 내 인정이 예술 인으로서 성공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하는 예술인이 주류다. 그러나 조금씩 현장에서는 본인을 예술인이면서 동시에 시 민으로서, 주민으로서, 사회적 어젠다에 적극적 교차를 지 향하는 활동가로서 본인을 인식하고 정체화하는 예술인도 두드러지고 있다. 장르 내 성공만이 유일한 신화로 작동하 던 흐름에서, 장르 외 혹은 장르와 사회적 연결망을 감각하는 시민으로서 스스로를 감각하는 예술인이 감지되고 있는 것 이다. 영화감독이라면 ‘영화부터 잘 만들어야지’ 외로도, 우리 동네의 기후 위기를 고민하고 비거니즘을 실천하며(예술 활동의 단순한 소재 그 이상으로 당사자로서), 본인 이 속한 예술계 내 창작 환경의 안전(젠더 및 위계 폭력) 을 염려하고 이에 대한 변화를 촉구하며, “우리가 창작할 수 있는 안전한 사회 그리고 시민으로서 사회에 문제의식 을 느끼고 이를 창작의 동기로만 연결되는 것이 아닌, 행동 으로 이어지는, 다변화된 정체성을 지닌‘ 예술인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도 MZ세대이긴 하지만, 이 세대는 다양하게 오독 되고 있다. 개인주의-신자유주의에 누구보다 적응한 이기 주의-느슨한 연대(해석하기 나름이지만 필자는 “끈끈한 연대 에서 비롯되는 끈적이는 건 싫어요” 라고 해석했다)-인스타 그램/틱톡에만 빠져든 채 일 방향적인 소통만 하는 소통 불 능성이 이 세대를 설명하는 거의 유일한 해석 언어가 되어 가고 있다면, 필자가 관찰하고 경험한 (청년)예술인은 복잡 하고 다층적인 시공간 속에서 반응하고 교차하며 다변화된 정체성을 형성한 이들이다. 그 정체성은 예술인으로서, 시민 으로서, 활동가로서, 노동가로서 공진하고 있다. 그 속에서 타인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다변화된 정체성 속에서) ‘느슨 한 이합과 집산을 통한 연대’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서울청년예술인회의 웹진 ‘숨은 참조’에 기고된 글인 <‘청년예술’을 폐기하라>에서 필자 성연주는 2017년 ‘청년 예술’이라는 새로운 결이 등장하고 수많은 공공지원 사업 에서 폭발적으로 사용되었음에도, 왜 청년예술이 상징자 본을 획득하지 못하는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청년예술 가의 생계 곤란 문제는 예술가들이 자신을 뽐내거나 서로 에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내기물로 작동하기 힘들다. (중략) 청년예술가들끼리 크루와 네트워크를 만든다는 것도 공고한 예술 씬을 뒤흔들 만큼의 엄청난 파괴력을 담보 하기 어려웠다. (중략) 청년예술 관련 지원 사업이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 씬을 만들기에는 무언가 2% 부족했다.” 그리고 새로운 기의를 담기를 즉, “청년이란 나이, 풋내기 애송이라는 경력의 미천함, 간난과 궁핍함의 아이콘으로 존재하는 청년이 아닌, 예술가하기의 성공적인 전환을 통해 사회와 긴밀히 소통하고 자신의 작업 세계를 공고히 쌓아 가는” 그런 청년예술이 호명됨으로써 이전의 ‘청년예술’이란 개념을 폐기하기를 밝힌다. 그러니 지원 사업은 다시금 시각, 사운드, 연극, 소설, 미디어아트 등 특정 장르에만 천착하여 그 사이의 수월성만을 뽑아내고 선정하는 매커니즘으로 복귀한다면 안 될 것이다. 위드 코로나 이후 문화예술 지원 체계가 새로운 그릇으로 기능하고자 한다면 각각 고유의 장르만을 호명하는 게 아닌, 좀 더 다변화된 주체로서 이들 을 담을 수 있는, 예술인의 장르적 활동에만 보는 것이 아닌 청년예술 ‘인’ 그 주체성을 바라보고 지원하는 관점이 필요 하다. 예술에서 예술인을 바라보는 것, 그게 바로 지원 사업 이 행할 수 있는 변화이자 진화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