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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0호]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다고 말할 때

원양해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사

 

  아메리칸 드림을 가슴 속에 품고 고국을 떠나 새로운 삶을 선택한 이민 1세대, 그리고 그들로부터 태어난 이민 2세대와 3세대가 있다. 그들은 이민자의 자식들이지만 부모의 고루한 생활방식보다는 태어난 곳의 역동적인 생활방식에 더욱 익숙하고, 부모의 모국어보다는 태어난 곳의 언어를 더욱 편하게 느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정체성으로부터 모종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어떤 혼종성(hybridity)을 가지고 있다.


  “엄마가 이제 내 곁에 없는데 내가 한국인일 수 있을까?”1)

 

  지난 2월에 한국어판으로 출간된 미셸 조너의 『H마트에서 울다』 (문학동네, 2022)는 작가가 이민 2세대로서 이민 1세대인 어머니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탐구하는 작품이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그리고 작가의 정체성 찾기의 여정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음식이다. 미국의 H마트는 한국 식재료를 파는 대형 슈퍼마켓 체인점으로, 백인 남성과 결혼하여 한국을 떠난 어머니는 늘 그곳에서 고향을 만나고는 했다. 그런 어머니와 함께 자라온 미셸은 오직 음식을 통해서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과연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남아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며 H마트에서 어머니의 흔적을, 그리고 한국인으로서의 조각을 발견한다. 한국 음식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그로부터 어머니의 애정을 발견하고 추억하는 과정은 한국계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미국 땅에 뿌리를 두지 않은 수많은 이민자들의 마음에 부드럽게 안착했다. 이 책은 29주 이상을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영화화를 앞두고 있다.

 

  지난 3월에는 이민진의 『파친코』(문학사상, 2018)가 애플티비를 통해 웹드라마로 제작되어 공개되었다. 이 소설은 1910년부터 1989년까지를 배경으로 4대에 걸친 재일교포의 삶을 그리고 있으며, 마치 대하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은 강렬한 흡입력을 자랑한다. 7살 때 미국으로 이주해 성장한 작가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이주를 선택한 만큼 상승 욕구와 인정 욕구가 강한 성향을 가진 재미교포와 달리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의 비애 속에서 일본에 정착하게 된 재일동포들 이 일본 사회의 하층부에서 처절한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현실을 날카롭고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했다. 이처럼 한국이라는 공통의 뿌리로부터 뻗어나간 각 지역의 이주민들은 서로 다른 삶의 형태를 주조해 나가고 있으며, 이는 누군가의 관심과 애정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 지게 되었다. 미국 전역을 강타한 소설 『파친코』는 애플티비라는 거대한 자본을 등에 업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재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이라는 지구촌 최강국에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적 정체성을 조명하는 드라마가 제작된 이 전무후무한 사건은 분명 세계의 어떤 변화와 움직임을 시사하고 있다.

 

  작년 10월에는 뉴욕 맨하튼의 차이나타운에 이민자 작가들의 작품을 취급하는 서점 <Yu and Me Books>가 오픈했다. 서점의 오너는 중국계 미국 여성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강인하고 다양한 목소리에 주목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서점을 열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미국 곳곳의 서점을 돌아다니다 보면 베스트셀러 혹은 스테디셀러 코너에 이민자 작가의 작품은 물론이고 미국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소수자들의 삶과 목소리가 놓여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최근 미국 문학계에서는 아시안 아메리칸 작가들이 전에 없던 인기를 끌고 있으며, 이는 이제까지 존재를 무시당해왔던 이민자들의 목소리가 미국 사회에 점차 퍼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실 미국은 이전부터 ‘멜팅 팟(melting pot)’이라고 불릴 만큼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다문화 사회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 사회가 정말로 여러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뒤섞인,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 ‘멜팅’된 형태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미국 사회 내에서 인종차별의 문제는 풀릴 듯 풀리지 않는 문제였고, 심지어는 소수자로 취급받는 다인종 사이에서도 암묵적인 계급이 존재해왔다.

 

  이제까지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을 논하는 것은 주로 흑인에 한하여 전개되어 왔다. 재작년 미국 미네소타에서 흑인 남성이 백인 경찰관의 가혹 행위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 전역은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이라는 구호를 내걸며 흑인민권운동을 펼쳤고 이는 전 세계로 뻗어 나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난 1월 세계의 중심이라는 미국 뉴욕 맨해튼의 타임스 스퀘어 지하철역에서 아시아인 여성이 흑인 남성에게 떠밀려 선로로 추락해 사망했을 때나 지난 2월 맨해튼의 차이나타운에서 한국계 미국인 여성이 귀갓길을 쫓아온 흑인 남성에 의해 살해당했을 때, 세계가 어떤 구호를 외쳤는지, 또 어떤 움직임을 일으켰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런 구호는 없었고, 또 그런 움직임은 없었으므로. 누군가는 그들의 죽음을 애도했지만, 대부분은 무관심했다.

 

  하지만 분명 변화의 실마리는 점점 늘어가고 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조차 잘 알지 못했던 자이니치의 역사를 한국계 미국인 작가가 포착해내었고, 지극히도 한국적인 음식들의 묘사로 가득한 이민 2세대의 에세이가 미국 전역의 공감을 자아냈다. 한국적인 것이 더 이상 한국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인정받는 것이 아닌 시대가 오고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민과 이주의 방식은 점차 다양해지고 있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더 잘 살아 보기 위해 어느 곳으로 떠나고, 또 떠나고, 그렇게 유랑하며 스스로의 자리를 찾을 뿐이다. 디아스포라 인구는 전 세계의 3%뿐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모두 스스로의 자리를 찾아 끊임없이 떠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그렇게 보면 “결국 우리는 다 같은 노마드일 뿐”이다.2) 그러므로 더 이상 한국적인 것은 한국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며, 단 하나의 정체성만으로는 더 이상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문학을 읽는다면 전쟁이나 테러는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조해진 작가의 말처럼, 문학을 읽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직접 경험할 수 없는 타인의 삶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도록 한다. 문학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고, 그 삶에 다가가 그 삶을 살아가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현실에 서는 결코 포개어지지 않을 타인의 삶을 문학을 경유하여 살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분명 우리로 하여금 성별이나 인종, 세 대나 국가, 종교나 문화에 따른 차이를 배제와 차별이 아닌 인정과 이해의 차원으로 이끌어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의 삶과 세계를 알아가고 인정하며, 납득하고 또 공감하는 것. 그것이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문학이 줄 수 있는 소중한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현재의 미국 문학계에서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사회는 ‘멜팅 팟’이 아니다. 멜팅 팟은 글로벌 사회라는 명분으로 서로 간의 차이를 녹여버리는 동화의 위험성을, 고유성과 이질성을 압살하고 무시해버리는 배제의 위험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곳은 복수보편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는 가운데에 어우러지는 ‘샐러드 볼(salad bowl)’과 같은 사회이다. 지금 여기에 우리가 존재한다고, 우리 또한 살아가고 있다고, 우리의 삶 역시 이어지고 있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여러 톤의 목소리들이 쌓이고 또 쌓일 때, 우리는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은 변화의 연속이고 유목의 연속이며 또 다양성의 집합이므로.

 

 

 

1)  미셸 조너, 『H마트에서 울다』, 문학동네, 2022.
2)  금희, 「노마드」, 『세상에 없는 나의 집』, 창비,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