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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2호] 2022년을 살면서 예수 읽기

예수회청년센터(MAGIS) 책임자 이 흔 관 신부

다시 예수 읽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한 명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한 사람을 이야기할 수 있다. ‘예수(물론 나는 예수를 ‘님’자까지 붙여서 믿는 열혈 신자이긴 하지만)’라는 청년이다. 예수쟁이라고 비하하는 표현을 듣는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내가 속한 수도회의 이름이 ‘예수쟁이’라는 뜻의 Jesuit 또는 Society of Jesus, 한국말로 예수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성경을 통해 만난 예수는 상당히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고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를 읽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작업이긴 하지만 예수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4 복음서(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는 상대적으로 짧고, 대부분 대화나 이야기 또는 비유로 이루어져 있어서 잘 읽히는 편이다. 그리고 마태오, 마르코, 루카는 비슷한 내용들이 많아, 읽다 보면 닥터 스트레인지의 마법에 빠진 ‘도르마무’처럼 이야기의 도돌이표를 체험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기에 이야기가 머릿속에 잘 안착할 수 있게 한다. 이런 반복되는 내용들이 복음의 예수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장점도 있긴 하다.

사실, 예수라는 인물이 아주 많이 알려진 것에 비해, 실제로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닌 것도 같다. 성경 또는 복음이란 베스트셀러를 읽어본 사람이 정작 얼마나 될까? 많은 사람들의 집에 성경이 한 권쯤은 있지만, 시간을 내서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 탐독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같은 의미로 그 유명한 ‘부처’나 ‘모하메드’에 대해서도 정말 나 역시 아는 게 거의 없긴 매한가지니 누가 누구에게 뭐라 할 처진 아니겠다. 내친 김에 이 글을 쓰고 나도 부처와 모하메드의 이야기를 좀 찾아 읽어보고자 한다.

여전히 유효한 매력적인 예수

내가 성경, 특히 복음서라 불리는 4권의 책을 천천히 읽어가면서 그리고 묵상하면서 만난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성품 좋은 청년이다. 또 그는 몸이 아프거나 공동체에서 소외된 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따듯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기도 하다. 때론 권력자들의 위협과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길을 걸어가는데, 결연한 의지를 품고 죽음을 불사하고라도 가야할 길을 가는 심지 굳은 ‘청년’이다. 그가 유명해졌을 무렵이 삼십 세 정도였음을 생각하면 나의 10년 전 모습과 자연스레 비교해보게 되기도 한다. 서른 살 정도의 청년이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이 남아있음에도 자신의 생계에 대해 연연하지 않고 신념에 따른 행동을 하고, 심지어는 그 신념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한다고 하더라도 마치 저 유명한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처럼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태도는 참 인상적이고 애잔한 마음을 일으킨다.

10년 전의 나는 그런 결기를 가졌던가? 예수처럼 공동체에서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품고 살았던가? 이상을 실현하고자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결기를 가졌던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이천년 전 청년 예수의 맘에 공감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소설 "침묵(Silence)"으로 유명한 일본인 작가 ‘엔도 슈샤쿠’는 “예수의 생애”라는 책에서 이런 심지 곧고 연민 가득한 낭만파 청년 예수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 '서른 살 정도 되는 유대인, 별로 잘생기지도 키가 크지도 않은, 하지만 삶에 대한 고뇌가 가득한 그리고 세상의 불의와 모순에 차별받는 이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편에 서서 이야기하고자 한 청년 예수!’ 동양인 소설가 엔도의 눈에 비친 2000년 전 유대인 청년의 모습은 그렇게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인간 중의 인간이다. 내게도 인간 예수는 여전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가 기적을 행하거나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어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사람들을 만날 때 시도했던 대화들과 그 방식을 볼 때 그는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며 특별히 가난하고 몸이 아프며 공동체에서 배제된 이들을 돌보는 마음 따뜻한 청년이었음을 알게 된다. 렘브란트의 유명한 그림 ‘청년 예수’에 등장하는 예수의 얼굴은 지금 내가 바라보고 묵상하는 그를 잘 그려내고 있다. 렘브란트가 묘사하는 예수의 뒷배경은 빛이 비치고 있다. 또한 그가 바라보는 전면도 빛이 들이치고 있는 듯 하다. 이는 아마도 과거의 우리의 실수나 잘못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우리의 만족스럽지 않은 과거도 중요하게 빛으로 여기는 예수의 모습이 아닐까? 아울러 미래의 우리의 가능성에 훨씬 더 큰 신뢰를 두는 예수의 모습이 드러나는 듯도 하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받았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평화를 이루려고 노력하던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의로움에 목마른 사람들’, ‘예수를 따른다는 이유로 모욕과 업신여김을 받던 사람들(그의 친구들)’이 바로 예수의 사람들이었다. 이 장면을 떠올린 채로 조용한 곳에 머물며 상상해보면 예수의 주변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없었음을 알게 된다. 또 그의 주변에는 권력자들이나 종교 지도자들 또는 공동체에서 인정받던 유명인들도 없었음을 깨닫게 된다. 아마 예수는 그런 사람들과도 알고 지냈겠지만, 그가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에게 찾아왔던 많은 이들은 바로 위에 언급한 사람들이다. 예수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그러나 열정이 있고 세상의 평화에 관심이 많은 이들을 사랑했던 것 같다. 그는 자비로운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고, 자신이 그렇듯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다가 박해받는 친구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들을 진심으로 위했던 사람으로 보인다. 이상주의자이면서 낭만적인, 서른 살 정도의 청년 예수는 오늘날 다시 읽어보아도 내겐 여전히 매력적이다.

낭만과 이상 그리고 현실

서른 살의 예수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간다면 여전히 낭만적이고 이상적일까? 자신할 수는 없지만, 나는 여전히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 중 한 사람으로서, 예수가 살아간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행동을하고 어떤 삶의 양식을 보여줄까? 나는 예수가 지금의 상황에 적응할 것이라 믿는다. 또한 그는 멈추지 않고 우리 공동체가 더욱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하도록 초대할 방법을 고민할 것이라 믿는다. 내가 만난 예수는 그렇게 자유롭고 창의적이면서 늘 현실과 조화를 이루고 대안을 찾는 젊은 청년 예수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가 ‘신으로의 예수’에 천착해서 이미 많은 선입견을 품고 그에 대해 알아보려 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여전히 젊은 청년 예수가 주는 영감이 있다고 느낀다. 포스트 코로나를 지나고 있는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 속에서는 종교나 믿음에 관해 이야기할 여유가 없다는 것을 잘 이해하면서도, 나는 (가톨릭교회의 사제이자 예수의 이름을 추종하는 수도회의 수도자로서) 여전히 예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예수라는 청년은 내게는 낭만주의자이다. 그러면서도 현실을 잘 이해하는 청년이다. 하지만 현실에 무조건적인 타협을 하는 인물은 아니다. 그는 현실의 부조리에 도전하면서도, 낭만을 잃지 않는다. 그야말로 멋짐(요즘 말로 FLEX)을 놓치지 않는 젊은이이다. 가톨릭의 사제이자. 예수회라는 조직의 수도자로서 내가 하는 이야기가 진부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처음에 내가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예수를 ‘님’자까지 붙여서 믿고 따르는 열혈 신자인 예수회원 신부이다. 이 진부하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독자들의 귓가에 작은 움직임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