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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55호] 2020대중음악의 ‘힙함’에 관하여

김 도 헌 (대중음악평론가, 웹진 IZM 편집장)

 

 

출처: 스브스뉴스

 

  ‘힙(Hip)’에 대한 정의부터 내릴 필요가 있겠다. 원래 ‘힙하다’, ‘힙스터’는 유행과 거리가 멀다. 영미권에서의 ‘힙’한 무언가는 개인의 기호와 정체성을 중심에 두고 트렌드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것에 가깝다. 따라서 ‘힙한 음악’의 마니아들 역시 원래대로라면 대중음악 주류를 지배하는 팝스타들의 음악 대신 소규모 공연장에서 자본의 개입을 최소화한 상태로 노래하는 인디 아티스트들을 따르게 된다.


  한국에서의 ‘힙’은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언제부터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힙하다’는 ‘핫하다’ 또는 ‘트렌디하다’와 비슷하게 통용된다. 여기저기서 많이 쓰니 익숙해졌지만 ‘요즘 힙한’이라는 단어는 아직까지 어색하다. 가장 거리가 멀어야 할 두 개념이 같은 뜻으로 묶인 격이다. 그런데 음악에 있어서 ‘힙’은 어느 정도 근거 있게 활용된다. 유튜브나 스트리밍 서비스에 ‘힙한 음악’을 검색했을 때 케이팝 아티스트,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아티스트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완전한 언더그라운드, 반골, 인디 음악만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힙’이라는 단어가 적어도 음악에서는 익숙한 형식에 머무르지 않고 싶어 하는 음악 소비자들의 기호를 반영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2020년 한 해 록, 힙합, 알앤비, 발라드, 댄스 등 다양한 장르에서 수많은 곡들이 조명을 받았고 그중 주류 미디어의 수혜를 입거나 소문을 통해 인지도를 쌓은 곡들이 범대중적으로 ‘힙한 음악’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멜론, 지니, 벅스 등 오랜 시간 대중의 선호를 좌지우지해왔던 스트리밍 서비스의 주류 차트들이 ‘음원 사재기’ 논란으로 개편되고 유튜브와 SNS가 빠르게 감상의 주도권을 차지하며 음악에서의 ‘대중’은 ‘수많은 취향의 집합체’로 재구성되었다.

 

  그렇기에 ‘올해 인기 있었던 음악은 무엇이었나?’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다양하게 등장한다.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겠다. 하나는 TV조선 <미스터트롯>, MBC <놀면 뭐하니?> 같은 미디어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에게 인기를 얻은 트로트 가수들과 프로젝트 그룹 싹쓰리의 '다시 여기 바닷가’, 환불원정대의 ‘돈 터치 미(Don’t Touch Me)’ 등이다. 둘째로는 방탄소년단, 여자친구, NCT, 트와이스 등 케이팝 그룹들이다. 세 번째가 바로 ‘힙’에 해당하는 인기곡들이다. 전세대, 전 사회 계층이 즐기진 않았으나 각자의 영역에서 확고한 지지층을 끌어모아 2020년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음악이다. 그 기반에는 유튜브 등 뉴미디어 상의 선-유행이 있었고, 이를 캐치하여 적극적으로 확장 혹은 도입의 과정을 거친 노래들이 ‘힙’을 넘어 ‘주류’에 안착하는 데 성공했다.

 

출처: 블루바이닐

  백예린은 국내의 힙스터들이 고대하던 새로운 유형의 아이돌 스타다. JYP엔터테인먼트에서 오디션 프로그램 <KPOP스타> 출신의 박지민과 함께 알앤비 듀오 ‘피프틴엔드(15&)’로 활동했던 그는 2015년 솔로 데뷔 EP <프랭크(Frank)>를 통해 더 넓은 음악 세계를 꿈꿨다. 언젠가부터 TV 음악 프로그램이 아니라 국내 각지의 인디 록 페스티벌에 자주 얼굴을 비치던 그는 2017년 난지한강공원에서 자신의 미공개곡 ‘스퀘어(Square)’를 불렀는데 이것이 백예린 신드롬의 시작이었다. 비바람이 치는 페스티벌 현장과 달리 해맑은 표정으로 자유로이 노래 부르는 이 영상은 1,200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으며, 오래도록 정식 발매되지 않은 ‘비공식 히트곡’의 지위를 누렸다.

 

  자신감을 얻은 백예린은 2019년 JYP에서의 마지막 작품 <아워 러브 이즈 그레잇(Our Love Is Great)>을 발표하며 완벽한 음악 노선 전환을 선언한다. 밴드 베이스의 팝 록 보컬로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 ‘지켜줄게’, ‘내가 날 모르는 것처럼’을 소화하는 모습에 ‘피프틴엔드’ 시절부터 그를 기억한 팬들부터 인디 록, 알앤비를 사랑하는 ‘힙스터' 팬층까지 환호를 보냈다. 결정타는 2019년의 마지막 달 발표한 첫 정규 앨범 <에브리 레터 아이 센트 유(Every Letter I Sent You.)>였다. 지난 시간 백예린이 차곡차곡  쌓아둔 곡들을 모아둔 이 앨범에는 앞서 언급한 ‘스퀘어’가 정식 수록되어 있었다. ‘스퀘어’는 한국 스트리밍 차트 최초로 1위에 오른 영어 가사 곡이 됐고, 그 열풍은 2020년 초반부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출처: Youtube 온스테이지ONSTAGE

<놀면 뭐하니?>의 프로젝트 그룹 ‘환불원정대’ 에피소드를 통해 이름을 알린 박문치(본명 박보민)는 꾸준히 생명력을 유지하는 노스탤지어 흐름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1996년생 박문치는 그가 태어나기 전 유행했던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중반까지의 댄스 음악을 선보이는 프로듀서다. 민수, 죠지 등 신예 싱어송라이터들의 곡에 프로듀서로 참여하며 복고의 숨결을 불어넣은 그는 작년 인디 뮤지션 달라, 준구, 힙합 아티스트 기린이 참여한 ‘널 좋아하고 있어’로 주목받기 시작해, 올해 예능 프로그램 출연과 더불어 ‘박문치 유니버스’라는 이름으로 앨범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박문치의 인기에는 2010년대 말부터 대중음악계의 주요한 축으로 자리한 ‘뉴트로’가 있다. 1970년대~80년대 일본에서 유행한 AOR(Adult Oriented Rock) 스타일의 풍부한 스트링, 긍정적인 메시지와 선율, 고급스러운 코드 진행 음악이 다시 돌아오며 김현철, 윤수일, 장필순, 김완선 등 과거의 이름이 현재로 돌아왔는데 이것이 ‘시티팝 리바이벌’이다. 1990년대 음악 방송을 24시간 송출하는 방송사 유튜브 채널은 팬들에게 ‘온라인 탑골공원’이라는 정겨운 별명을 얻었는데, 그 속에서 사라진 노래 ‘리베카’를 부른 무명 가수 양준일이 발굴되어 올해 초 복고의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이 레트로 흐름을 명민하게 포착한 프로그램이 <놀면 뭐하니>로, ‘깡’의 우스꽝스러움이 놀이 문화로 재발견된 가수 비와 과거의 스타 이효리를 프로젝트 그룹 ‘싹쓰리’로 엮어 1990년대 가요풍의 ‘다시 여기 바닷가’를 올해 여름 최고의 히트곡으로 만들었다. 후속 프로젝트 ‘환불원정대’ 역시 과거의 스타 이효리와 엄정화를 활용한 레트로 메이킹이 주요 문법이다.

 

출처: Youtube Imagine your Korea

 

  마지막으로 ‘범 내려온다’의 주인공 이날치와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를 빼놓을 수 없다. 올해 5월 정규 앨범 <수궁가>를 발표한 이날치는 음악 감독 장영규를 주축으로 젊은 다섯 명의 소리꾼과 드러머 이철희, 베이스 정중엽이 2019년 결성한 팀이다. 네이버의 라이브 시리즈 ‘온스테이지 2.0’에 출연해 ‘범 내려온다’를 부른 영상이 조회수 800만 회 이상을 기록하며 주목을 끌더니, 한국관광공사의 유튜브 광고 시리즈 ‘필 더 리듬 오브 코리아(Feel the Rhythm of Korea)’가 총 조회수 3억 회, 시쳇말로 ‘대박’이 나며 2020년 최고의 주목받는 곡에 등극했다.

 

  이날치의 감독 장영규는 이미 2015년 소리꾼 이희문, 추다혜, 신승태와 함께 밴드 씽씽(SsingSsing)을 꾸려 전 세계적인 화제를 모은 바 있다. 2016년부터 유럽 및 해외 지역에서 활발한 공연을 펼치던 씽씽은 전통 민요를 디스코와 펑크(Funk)의 감각으로 재해석한 팀으로, 2017년 미 공영 라디오 채널 NPR의 인기 라이브 포맷 ‘엔피알 뮤직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NPR Music TIny Desk Concert)’에 한국인 최초로 출연하며 음악 팬들에게 놀라움을 안겼다. 이날치는 씽씽 해체 이후 2018년부터 장영규가 세심하게 준비해온 프로젝트였으며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의 화려한 퍼포먼스는 흥행에 날개를 달았다. ‘범 내려온다’가 ‘힙’한 음악으로 통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들이 판소리 ‘수궁가’를 바탕으로 활동하면서도 국악의 요소를 과감히 내려놓은 채 춤추기 좋은 리듬과 댄스 음악을 고수하여 접근성을 높인 데 있다. 두 번째는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의 활약이다. 전자를 통해 이날치는 전통문화에 대한 세간의 고정관념과 접근 난이도를 낮추는 데 성공했지만 후자에서 보이듯 그 성공이 음악 자체의 힘보다 영상 및 퍼포먼스에 집중되어있다는 불안 요소도 안고 있다. 물론 올해는 이날치와 더불어 씽씽 이후 이희문의 ‘오방신과’, 추다혜의 ‘추다혜차지스’ 등 다양한 국악 기반 밴드들이 양질의 앨범을 발표한 해였으나, 이것이 단발성 히트로 잊히지 않기 위해서는 꾸준한 활동이 요구된다.

 

  21세기 들어 한국 가요계는 주류 미디어, 거대 기획사의 자본과 영향력 없이 대중적 히트를 만들어내기 어려운 시장이 됐다.  2010년대 중반까지 ‘인기곡’은 구매력 강한 팬덤 기반의 케이팝 그룹들이 주도하거나 인기 가수들의 차지였다. 하지만 유튜브의 영향력 증대 및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보편화는 주류에 반감을 갖고 있던 불특정 다수를 일정하게 묶어 ‘힙’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영향력 집단으로 부상시켰다. 2020년의 백예린, 박문치, 이날치는 몇 년 전부터 산발적으로 보였던 그 조짐이 커다랗게 발현하여 ‘올해의 인기곡’으로 자리 잡은 경우다.

 

  다채로워지는 음악계의 모습은 분명 긍정적이다. 그러나 앞서 이날치의 경우에도 언급한 바 있듯, ‘힙’의 주류화는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면 흥미만이 남아 순간의 유행, 트렌디한 어떤 것으로 잊힐 위험을 내포한다. 고유의 개성이 규격화되었을 때 끊임없이 새로운 대안, 반골의 ‘힙’이 솟아 그 자리를 대체하는 환경이 건강한 토양이다. ‘힙’한 발걸음을 꿈꾸는 이들의 롱런을 결정짓는 것은 재미가 아니다. 2020년 한 해의 히트에 멈추는 대신, 2020년대를 돌아봤을 때도 의미가 있을 장기적 흐름을 기획할 거시적 시각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