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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대학원 신문사
[121호] 한 잔의 추억 본문
글 이해수 기자
scene 1 금요일 저녁의 소주 한 잔
‘잠깐 내 방으로’
교수님의 호출이다. 교수님께서 부르시면 늘 불안하다. 뭔가 잘못한 게 있는지 괜한 걱정이 앞선다. 안에 누가 있는지 귀를 대보고 조심스럽게 노크한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시던 교수님은 오늘 일이 있으시다며 오후에 할 일 몇 가지를 체크해 주시더니 급하게 나가신다. 아싸. 슬며시 떠오르는 웃음을 내리누르며 인사를 한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교수님이 시키신 일을 말끔하게 정리한 후 일찌감치 연구실을 나선다. 이렇게 일찍 집에 가는 게 얼마만인가. 어머니가 못 알아 볼 것만 같다. 어디 돈 떨어지지 않았나하고 땅바닥을 바라보면서 정문을 돌아 소구장 앞으로 걸어가던 중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아챈다. 제길, 동기 녀석이다. 일주일에 6일을 술 마시자고 조르는 그 녀석은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다.
“어디 가냐? 집에 가? 벌써? 밥은? 안 먹어? 그럼 술이나 할까?”
“으, 응. 집에 가”
“에이, 왜 이래. 술 한 잔 해야지”
오랜만에 일찍 끝나서인지 술 먹자는 제안에 마음이 동한다. 짐짓 망설이는 척하면서 몸값을 올린다.
“어제도 발제하느라 거의 밤을 샜어. 오늘도 가서 페이퍼 써야 하고 내일은 프로젝트도”
“어허, 그럼 할 수 없지, 뭐. 수고하셔”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다. 이 녀석은 매일 마시는 술이지만 나는 지지난주 이후로 한 잔도 못 마셨던 탓이다. 삼겹살에 소주 생각이 간절해진다.
“네가 쏘는 거면 같이 가줄게”
“헐, 내가 갑부냐. 내가 조금 더 낼게”
“그럼 김씨도 같이 가자. 아까 연구실에 있던데”
연구실에 남아있던 몇몇이 떠올라 전화를 건다.
“난 이따가 갈게. 먼저 시작해. 일 좀 보고 갈게.”
“내일 시험이야. 그리고 어제도 새벽 두시까지 마셨어.”
“아~ 물론 한 잔 해야죠~!”
“옆에 후배도 있는데 같이 가도 돼?”
부랴부랴 섭외한 끝에 이래저래 시간 비는 녀석들 다섯 명이 모였다.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학교 근처에 있는 나름 괜찮은 고기 집으로 향한다. 빈속에 소주 한 잔을 털어놓고 삼겹살을 뒤집자 대화가 시작된다.
“야, 잘 좀 구워 봐라. 고기는 이래, 이래 두 번만 뒤집는 거야. 이거 이거 고기 육즙 다 떨어지네.”
이에 상추가 낀 줄도 모르고 고기 굽는 철학을 설파하는 선배, 그 맞은편에 앉은 후배는 뜨거운 불판 위에서 얄팍하니 기름을 뺀다.
“자, 자 한잔 합시다.”
소주를 한 잔 더 털어 넣으니 이제야 금요일 저녁의 들뜬 분위기가 느껴진다. 여기저기 비어있던 테이블도 점차 붐비기 시작한다. 취기가 오르니 역시나 김씨가 화려한 말발을 선보인다. 어디서 주어들은 음담패설로 흥을 돋우더니 급기야 만담 수준의 현란한 드리블로 좌중을 압도한다. 웃고 떠들면서 그렇게 술과 이야기에 취한다.
술이 좀 차면 으레 나오는 이야기, 뒷담화가 시작된다. 꼰대 같은 선배부터 싸가지 없는 후배까지 잘근잘근 씹다보니 이내 재미가 쏠쏠한 지 본격적인 고소·고발이 뒤를 잇는다. 공부 안하는 선생, 세력 싸움하는 선생, 조교 무시하는 선생 등 선생에 대한 본격적인 담화를 사이좋게 나누다가, 열이 받았는지 이내 무슨 성토대회마냥 그렇게 분기탱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아무리 욕해도 여전히 힘없는 학생의 처지는 바뀌지 않음을 잘 알기에 어느 순간 기운 빠진 모양새로, 그렇게 추적추적 취해만 간다.
야구 이야기가 지나가고 정치 이야기가 지나가다...가 멈춘다. 역시 술자리에 정치 이야기가 빠질 수 있겠는가. MBC 김 사장 욕을 그렇게 풀고 무한도전 언제 하냐고 또 그렇게 투정을 부린다.
“이게 다 누구 때문 아니겠어!”
“그래 이게 다 그 누구 때문이지!”
그 누구는 욕을 엄청나게 먹어도 꿋꿋이 잘도 버틴단다. 다른 누구는 결백과 부끄러움 사이에서 그렇게 괴로워했고 그래서 뛰어내렸다는데. 소주 탓인지, 사는 게 뭔가 하는 생각에 괜히 우울해져 담배를 문다.
“야, 담배 하나 주라”
“어, 형 담배 안 피우잖아요?”
“그냥 줘봐”
아무래도 오늘 메뉴는 잘 고른 듯하다. 삼겹살은 적당히 고소하고 적당히 쫄깃하다.
“어, 왔어?”
뒤늦게 후배 두 명이 왔다. 가라앉은 분위기가 금세 활기차진다. 옷도 잘 입고 세련된 스타일의 후배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음을 날린다. 아직 20대라서 그런가, 괜한 나이드립을 날리다가 선배한테 꼰대라고 욕만 먹는다. 이런. 그 모습에 웃음이 터지고 다시 소주 한 잔 씩을 가득히 돌리며 ‘위해서!’를 외친다. 얼굴이 빨갛게 변했는지 앞에 앉은 선배가 괜찮냐고 말하며 슬쩍 내 옆에 앉아 소주를 따라 준다.
“이거 마셔서 상태 더 안 좋아지겠는데요?”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꿀떡 소주를 삼켰다.
“너 연애 하냐?”
“시간이 어딨어요... 돈도 없고... ”
“내가 좋은 사람 소개 해줄까?”
“아, 전 소개팅 같은 건 좀 싫어서… 괜찮아요.”
“야, 너 그러다 연애 계속 못 한다? 지금 안 하면 나이 먹고 나서는 더 못해.”
집에서도 자주 듣던 소리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려는데 계속 물고 늘어진다. 나라고 뭐 연애하기 싫어서 안 하겠는가. 돈 없는 대학원생인데... 우선 뭐라도 자리를 잡아야 연애든 뭐든 할텐데... 알만한 사이라서 오히려 세게 말했겠지만 나름 잘 사는 선배의 무심한 말이 가뜩이나 소심한 마음을 움츠려들게 만든다.
그렇게 화제가 이리 튀고 또 저리 튀었다. 삼겹살 기름 때문인지 지루함 때문인지 안경을 벗어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옆에 앉은 동기 녀석을 힐끔 보니 핸드폰으로 야구 결과를 확인하고 있다.
“미안, 나 먼저 일어날게”
박군은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며 옷을 주섬주섬 챙겼고, 이참이다 싶어 너도 나도 일어나겠다고 눈치를 보낸다. 벌써 2시간이 지났나보다. 혼자 내달렸는지 일어날 때 뭔가 휘청한다.
“야, 괜찮냐? 얼마나 마셨다고 난리야?”
“아하하, 괜찮아요. 발을 잘 못 디뎌서요.”
얼마씩 추렴을 해서 계산을 한 후 술집 앞에 서서 다들 갈 길을 묻는다. 미적거리고 서있는 내게 선배는 한 잔 더 하자고 추파를 던진다. 세련된 후배가 거든다. 그래놓고 저는 빠질 거면서. 술 한 잔 하자던 동기 녀석은 이미 저만치 서서 집에 갈 채비를 하고 있다.
‘아, 정말 삼겹살에 소주 딱 한잔만, 정말 딱 한잔만 하려고 했는데…’
금요일 저녁 소주는 항상 토요일 새벽 해장이 되어야 끝이 난다.
scene 2 발표 끝난 후 맥주 한 잔
“아무래도 전면적인 수정이 필요할 것 같다.”
교수님의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논문 프로포절이 끝났다. 10분 발표 후 이어진 30분 동안의 세찬 지적에 아직도 정신이 멍하다. 한 학기 내내 쓴 글의 절반 이상을 버려야 하다니. 망연자실이라는 표현도 부족하다. 잠시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 여기저기서 말을 건넨다. 괜찮냐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괜찮다고 말하는 사이 손은 아직도 떨리고 있다. 입술이 바싹 말라 있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프로포절 페이퍼에 수북이 쓰여 있는 코멘트를 바라본다. 아, 내가 그렇게 못했나 하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심장이 뛴다.
처음 논문을 시작할 때에는 누구나 그렇듯이 나 또한 거창한 포부와 굳은 의지로 충일해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한 누구나 그렇듯이) 욕심과 현실 사이의 간격을 확인하고 점차 왜소해지더니, 이제는 논문이나 제대로 쓸 수 있을까하는 자조와 자포 사이에 쭈그려 앉아 있다. 아, 공부가 이렇게 힘든 거였구나... 프로포절에 참석했던 박사 선배가 등을 두드리며 말한다. 이제는 끝내는 걸 목표로 해야 한다고. 잘 쓰는 게 아니라, 끝내는 걸 목표로 하라고...
연구실로 돌아와 시계를 한번 쳐다보고 한숨을 내려놓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등이 땀에 절어 무슨 풀이라도 붙여놓은 마냥 끈덕지다.
“지금 책이 눈에 들어오냐!”
김씨가 다가와 괜시리 어깨를 친다. 아마 깨졌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나 하러 왔나 보다.
“여기서 뭐하냐. 프로포절도 끝났는데. 괜히 그러고 있으면 머리만 더 아파. 그냥 맥주나 마시러가자!”
억지 위로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김씨 특유의 긍정과 낙관이 더없이 부럽다. 빨간 펜으로 범벅이 된 프로포절 원고와 노트북을 대충 가방에 넣고 연구실을 나선다. 저만치 가는 김씨의 등을 바라보며 힘없는 발걸음을 내딛는다. 방금 전 교수님이 하신 말씀도 그 발걸음 위에 납덩이처럼 붙어서 같이 옮기운다. ‘전면적인 수정이라...’
“한 잔 하시죠. 수고 많으셨습니다.”
조촐한 자리인 줄 알고 따라 나섰는데 제법 많은 선후배들이 모여 있다. 프로포절 끝낸 우리들을 위로해 주는 자리란다. ‘위로’라니, 별로 내키지 않는다. 따라주는 맥주를 숨도 쉬지 않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 머릿속까지 얼얼한 게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아, 가만 보니 다들 내 눈치를 살피는 분위기다. 역시나 눈치를 보던 선배가 한층 과장된 목소리로, 프로포절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이제부터 논문에 매진하면 된다고 너스레를 떤다. ‘우씨, 너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겠냐!’
“예, 저야 뭐 좋은 코멘트 받았으니까 이제부터 고쳐야죠. 하하”
“그래, 원래 철도 두들겨 맞아야 강철이 되는 거야. 너무 낙심하지 말고”
“그럼요. 전 괜찮아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하하”
안주로 나온 뻥튀기를 손으로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면서 벌써 세 잔의 맥주를 비웠다. 머릿속은 이미 오래전부터 방어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하신 코멘트를 머릿속에서나마 하나하나 격파하면서 왜 그때는 제대로 말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에, 부끄럽고 원통하고 자존심 상하고 그렇고 그렇고 그랬다. 그러면 뭐하랴. 이미 끝난 것임을.
“휴...”
나도 모르게 한숨이 튀어나왔다. 제대로 디펜스 한 번 하지 못하고 프로포절을 끝냈다고 생각하니 이야기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열등감을 잔득 그러안은 채 불편한 표정으로 맥주 한 잔을 더 비우고,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일어섰다. 화장실 한 쪽 거울에 초췌한 내 모습이 보였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니 잔뜩 지친 얼굴이 보여 가슴 한편이 저려왔다. 찬 물로 세수를 하고 뺨을 두어 번 때린 후 자리로 돌아간다. 초라해진 모습을 들킬 까봐 허둥지둥 나와 담배를 물었다.
“후...”
담배 연기와 함께 걱정과 불안, 낙심과 절망, 열등감과 패배감을 날려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위하여!”
옆 테이블에는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왁자지껄 잡담을 나누고 있다. 치킨과 맥주를 앞에 두고 넥타이를 반쯤 풀어헤친 채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호탕한 웃음을 늘어놓는다. 가만히 바라본다. “괜찮은 사람을 만나면... 결혼하면... 승진을 하면...”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멋진 옷을 차려입고 대기업에 다니고 좋은 차를 타고, 별거 아닌 평범한 삶이 오늘따라 더 부러워 그렇게 한참을 바라본다. 그런 삶을 비판하면서 시작한 공부였지만, 그렇게 선택한 공부가 정말 내 길이 맞는지 매순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다시 이전의 삶을 부러워하는 자기 배반의 고리 한 가운데, 내가 서 있다.
“취업해야지...?”
담담히 말을 건네는 선배, 깊이 있는 공부를 해보겠다고 뭔가를 이뤄보겠다고 당당히 말했던 그때의 각오는 어디로 가버리고, 선배의 취업 이야기에 ‘그렇지... 그래야지...’라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같이 온 김씨는 추들추들해진 얼굴이 테이블에 닿을락 말락 졸고 있다. 잠에 곤드라진 그를 어깨에 들쳐 메고 택시에 태워 보냈다.
술집을 나오니 반짝이는 옷을 입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사람들로 거리가 가득 차있다. 시끄러운 음악과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 술기운이 물씬 풍긴다. 대학원에 온 후 수많은 후회를 거듭했지만 경제적 부담이나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 때문이 아니라, 내 한계로 인해 후회를 한 건 아마도 처음이지 싶다. 헌데 다른 이유 때문에 망설이고 고민할 때는 ‘이까짓 거!’ 하면서 버텨낼 용기가 생기더니, 그 원인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확인한 지금은 도무지 버티어 낼 도리도 재간도 없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위로라도 받고 싶었으나 마땅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 그냥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우린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더 높은 곳으로만 날았지. 처음 보는 세상은 너무 아름답고 슬펐지. 우린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더 높은 곳으로만 날았지. 우린 서툰 날개 짓에 지친 어깨를 서로 기대고 깨지 않는 꿈속에서 영원히 꿈꾸기만 바랬어.” Mot의 노래 ‘날개’ 중
젠장, 음악도 따라 슬프다.
scene 33차로 막걸리 한 잔
“한 잔 더 하고 갈래?”
역시나 그렇게 쉽게 헤어질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늘도 삼겹살로 시작된 술자리는 맥주 한 잔을 지나 이제 막걸리까지 왔다. 참 잘도 마셔댄다. 신촌 근처에 있는 시인촌에 오른다. 막걸리를 시키고 큼직한 양은그릇에 걸지게 따라 잔을 기울인다. 이미 집 멀다고 갈 사람들은 다 간 터라 오히려 호적하고 여유 있다. 따라온 후배 녀석은 이런 술집은 처음 와봤다며 호들갑이다. 분위기 맞추느라 고생한 후배들에게 술 잔 가득히 막걸리를 부어주며 원샷을 청한다.
“선배, 선배는 정말 대단해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난번 발표하시는 것 보고 감탄 했어요. 어떻게 공부하신 거예요?”
“에이, 괜한 비행기 태우지 마셔. 그렇다고 없는 술값이 생기지는 않거든”
“아니에요. 진짜로 하는 말이에요. 지난번에 학회에서 발표하실 때 하나도 긴장하지 않으셨죠? 좌중을 막 휘어잡던데요?”
“됐고. 술이나 마셔. 갑자기 웬 난리야”
후배의 칭찬에 괜히 머쓱해진다. 갑자기 술이 잘 들어간다. 술 맛이 좋으니 말도 많아지고 웃음도 많아진다.
“비법을 알려줄까?”
“네, 네, 알려주세요. 어떻게 공부해야 돼요?”
“알려주면 그대로 할 거야?”
“네, 네, 뭔데요? 뭐에요?”
“있잖아. 벌써 3년 전 일이네. 석사 3학기 마치고 논문 프로포절을 하잖아. 그때 내가 야심차게 준비한 프로포절을 발표했는데 선생님께 완전히, 그니까 농담이 아니라 정말 처절하게 까인거야.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무참히. 처참히.”
“정말요? 그럴 리가요? 납득이 안 가는데요. 납뜩이!”
“흐흐흐 너 그거 아냐? 왜 그 무협지 같은 거 보면, 주인공이 항상 죽다 살아나잖아. 그치? 그냥 살아나는 게 아니라 온갖 고생을 하면서 정말 겨우겨우 살아나잖아. 그러고 나서는 이전보다 몰라보게 강해져 있고 말야. 근데 이게 완전 뻥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야. 몸이 바뀌거든. 너 니체 알지? 니체가 말야 그런 얘기를 해. 네가 어디 오지에 떨어졌다고 해보자.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까 먹을 게 아무것도 없거든. 배가 고프니까 여기저기 뒤져보겠지. 앗! 그런데 저기 엄청 탐스럽고 맛나게 생긴 버섯이 하나 있는 거야. 먹을 게 이거 밖에 없는 데 이거 먹을 거야?”
“음... 글쎄요. 먹고 죽는 거 아니에요?”
“안 먹어도 굶어 죽잖아.”
“그럼 먹어요.”
“그래 먹어야지. 그런데 먹으니까 배가 너무 아파서 떼굴떼굴 구르는 거야. 열도 나고. 독버섯이니까 당연히 그러겠지. 몇 날 며칠을 그렇게 앓는 거야.”
“그래서요?”
“그러다보면 좀 괜찮아지겠지. 어느 정도는 저항력이 있을 테니까. 그럼 그 다음에는? 뭐 먹어? 버섯 안 먹어?”
“그걸 어떻게 또 먹어요?”
“어허, 안 먹어도 죽는다니까!”
“아니, 뭐 버섯 말고 나무 열매나...”
“됐고. 잘 들어봐. 니체가 뭐라고 하냐면, 이번에는 그냥 먹지 말고 데쳐서 먹으라는 거야. 그럼 또 아프겠지. 그럼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말려서 먹거나, 구워서 먹거나, 쪄서 먹거나, 튀겨 먹거나 등등. 여튼 어떻게든 먹으라는 거야. 그럼 어떻게 되겠어? 물론 죽지 않을 만큼 먹어야지. 배고프다고 막 처먹지 말고. 그럼 어떻게 되겠냐고? 체질이 바뀐다는 거야. 이제는 웬만큼 먹어도 끄떡도 하지 않는 몸으로 바뀌는 거야. 왜 그러겠어? 죽을 고비를 넘기는 그 과정이 체내에 저항력을 만들고 결국 독을 이겨낼 수 있는 체질로 바꿔버린 거지. 그때쯤 되면 이미 버섯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먹어버릴 수 있는 강한 몸이 된 거야. 공부가 딱 그런 거야. 뭐 니체는 초인이니 뭐니 해서 그렇게 말했지만 말야.”
“오호호홋, 이 얘기 어디에 나와요? 한 번 찾아볼게요.”
“나도 몰라, 나도 들었어.”
“누구한테요?”
“아까 내가 석사 논문 프로포절 했을 때 선생님이 엄청 세게 깠다고 했잖아. 선생님이 얘기 해줬어. 박사과정 들어갈 때. 그 뒤로 독버섯만 먹어댔지.”
“아, 독버섯을 먹어야 하는 거군요. 근데 선배 집이 어디세요? 왕십리였나? 맞죠?”
“너 죽을래! 이놈아 지금까지 겁나 중요한 얘기 했잖아.”
술자리는 항상 이런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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