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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대학원 신문사
[170호] 포노사피엔스와 인지기호학 본문
연세대학교 글로벌엘리트학부
문화산업관리전공 교수
박응석
1장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
넷플릭스에 공개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라는 스릴러 드라마에 반복되는 문장이다. 표현이 추상적일수록 해석이 다양해져 사람들은 그 표현에 자기를 투사한다. 그래서 나는 이 표현을 내 연구 분야인 기호학에 대한 이야기로 느꼈다. 물론 덴마크 물리학자 닐스 보어가 “어떠한 사물도 관측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특성이란 것도 없다”고 주장한 것을 기반으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쓰러진 나무는 소리가 나지 않지.”라고 결론을 내리고 마칠 수도 있지만 좀 더 사유의 모험을 떠나보도록 하자.
위에서 말한대로 관찰자가 없으면 소리가 없다고 치자. 그럼 만약 한국, 중국 및 일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쿵’소리가 났겠는가? 일반적으로 중국 사람은 ‘砰’(pēng)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일본 사람은 ‘ドン’(don)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동일한 세계’를 각기 ‘다른 기호’로 해석하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언어사용자 사이에서도 ‘쿵’ 같은 의성어에서 떠올리는 것은 유사하겠지만 ‘어머니’, ‘사랑’, ‘자유’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어휘에서도 개인의 삶에 따라 느껴지는 바가 크게 다를 수 있다. 이렇게 말, 글, 몸짓, 그림 등 형태를 가진 구체적 ‘기호’는 우리의 추상적 경험에 다양한 유형의 질서를 부여한다. 우리는 모두 기호 세계에 살고 있다.
모바일 기기를 통해 정보를 소비하고 소통하는 우리는 ‘포노 사피엔스’다. 집 앞 마트부터 자주 가는 영화관이나 내가 좋아하는 미술관 등 모든 것이 휴대폰 속에 들어있다. 입구의 간판부터 나를 반겨주는 사람과 카드 리더기까지 사람과 사물을 가리지 않고 전부 숫자나 심플한 이미지로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우리 주변의 ‘사물’은 ‘기호’로 대체된다. 철학자 한병철은 “스마트폰은 세계를 탈실재화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스마트폰은 디지털 곰 인형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어린아이의 곰 인형은 낯선 타인과 아이를 중개하지만 때가 되면 그 아이를 떠난다. 하지만 스마트폰은 나와 세계를 중개하면서 동시에 세계를 대체해버리기 때문에 나는 그 기호들 사이에 파묻힌 상태로 모든 사물과 결별한다. 내가 생각하는 탈실재화는 기호화의 강화다.
2장 기호가 세운 세계로
우리는 기호 없이 서로 소통할 수도 없고 우리의 경험을 다른 사람이나 다음 세대에 전달할 방법도 없다. 문명(文明)이란 말 그대로 인식되지 않던 무지의 세계를 글(文)로 밝히는(明) 것이다. 비록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상대방에게 완벽하게 전달되지 않거나 다르게 이해되는 경우가 많더라도 그건 기호의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기호는 작가와 독자의 서로 다른 삶이 가져오는 차이를 하나의 울타리에 담는 화해의 장을 구성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부수적이나 우리의 눈은 그 손가락 없이 달을 향하기 어렵다. 아래에서 인지언어학을 통해 기호가 가진 기본적 특징 몇 가지를 살펴보자. 그럼 기호에 대한 이해가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라는 것에 공감할 것이다.
첫째, 환유. 우리의 주의력은 제한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장면의 한 ‘부분’을 본다. 즉, 한 부분을 ‘선택’한다. 지금 고개를 들어 앞을 보자. 한 번에 눈앞의 모든 사물에 집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지금 카페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고, 커피머신 앞에는 모자를 쓰고 앞치마를 두른 사람이 커피를 내리고 있다. 그 사람을 내 옆에 앉은 친구에게 설명하려면 어떻게 할까? 커피머신 앞에 서 있는 사람. 모자를 쓴 사람. 앞치마를 두른 사람. 사람마다 서로 다른 것이 그 사람을 가리키기 위한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 사람이 내 개념세계에서 ‘커피머신’, ‘모자’ 또는 ‘앞치마’와 연결되어 기호가 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선택된 부분은 내게 현저했거나 내가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일 수 있다. 결론은 우리가 지금 어떤 부분을 말하느냐를 살피면 우리가 어디에 주목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국면성.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언어의 의미는 사용에 있다. 같은 말도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다면적이다. 나는 학교에 가면 ‘교수’고, 집에 돌아오면 ‘남편’이고, 부모님을 만나러 가면 ‘아들’이 된다. 나라는 하나의 개체가 여러 가지 역할을 갖는다. 그 역할은 각각의 상황이 결정한다. 내가 마주한 상황들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 궁금하다면 지금 내가 가진 이름들을 살피고, 앞으로 내가 갖고자 하는 이름들을 떠올리면 된다. 삶의 구조는 그대로 기호의 구조가 되기 때문이다.
셋째, 은유. 우리는 낯설고 새로운 것을 익숙하고 친숙한 정보를 통해 이해한다. 인생은 누군가에게 ‘여행’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전쟁’일 수 있으며, 또 다른 이에게는 ‘연극’일 수도 있다. 그 사람이 무엇을 통해 이해하느냐에 따라 인생에 대한 최종 이해는 달라질 것이며, 그에 따라 그의 행동 패턴도 예측이 가능하다. 그들은 각자 여행자, 싸우는 자와 연기자로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 만나는 것들에 서로 다른 역할을 부여할 것이다. 지금 나는 내 인생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왜 그것을 떠올렸을지 한번 생각해 볼만하다. 나, 우리 그리고 내가 속한 사회가 어떤지 살피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용하는 은유 표현을 거울로 삼아 그 안에 담긴 모습을 살펴보면 된다.
위의 몇 가지 예시만으로도 우리의 체험이 구성한 개념이 기호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을 이해하기 충분했을 것 같다. 반대로 사용된 기호가 우리의 개념을 구성하고 행동을 유도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떻게 말하고 쓰고 표현하는지는 나와 우리 및 타인을 이해하는 토대가 된다.
3장 ‘지금 여기’를 회복하기
변화는 바람과 같다. 피부로 느껴지지만 잘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바람에 흔들리는 꽃과 나뭇가지가 바람을 확인하는 단서가 된다. 기술이 닿는 곳에는 기호라는 흔적이 남는다. 우리는 그 흔적을 통해 우리가 놓인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확인하고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다. 그래서 변화가 심한 지금이 ‘인간’을 깊게 이해할 단서를 풍부하게 구할 수 있는 좋은 시기다.
우리는 항상 자신이 누구인지 깊게 탐구해왔다. 인간이 동물과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하다가 어느 순간 인간은 동물과 큰 차이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이야기하다가 어느 순간 무의식이나 감정을 강조한다. 그중 무엇이 옳으냐 따지기보다 그 고민들이 남긴 것을 살피는 것이 유익하다. 최근에는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인간을 이해하는 새로운 참조물이 되었다. 나는 지금 흐름에서 은유를 ‘인공지능 vs 인간’으로 설정하는 것보다 ‘인공지능 & 인간’으로 설정하는 것이 유용해 보인다.
인지인문학자 김동환은 다른 생명체의 껍데기를 발견해 사용하는 ‘소라게+껍데기’와 껍질이 몸에서 자생하는 ‘거북이+껍데기’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지 묻는다. 보호와 주거를 위해 껍데기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그 기원은 다르지만, 해당 생명체와 껍데기 사이의 기능과 관계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처한 상황을 인간과 AI가 아니라 ‘인간+AI’라며 우리는 모두 사이보그라 주장한다. 나도 이에 깊게 공감한다. 우리는 이미 인공지능이라는 껍데기를 쓴 인간이다. 우리는 그 껍데기를 뒤집어 쓰며 상처를 입기도 하고 편안함을 느끼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잠재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아직 완성품을 보지 못했기에 어떤 껍데기가 좋은 껍데기인지 모른다. 다만 껍데기에 우리 몸을 맞추기보다는 껍데기를 우리 몸에 맞추는 것이 좋지 않을까? 만들어지는 그 과정이 남긴 흔적들을 자세히 살피고 목소리를 내야 하는 이유다.
<참고문헌>
김동환(2024), 인공지능·트랜스휴먼·사이보그, 커뮤니케이션북스
박응석(2020), 은유하는 마음, 박영사
한병철(2021), 전대호 역(2022), 사물의 소멸,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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