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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8호] 간호사를 위한 간호협회는 없다

간호사 세 인

 

<출처: pixabay>

2023년, 꿈에 부푼 소식이 전해졌다.

 

간호법 국회 통과. 임상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오랜 시간 간호사로 일해온 나로서는 흐뭇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현장을 떠나며 가졌던 괜한 죄책감 같은 것도 흐려지는 듯했다.

 

꿈은 오래 가지 않았다.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고, 간호법은 폐기되었다. 간호사는 코로나 때에도, 메르스 때에도 사람들이 근처는커녕 스치기도 싫어하는 환자들의 곁을 묵묵히 지켰다. 무거운 방호복을 입고 땀을 뚝뚝 흘리며 환자에게 처치하고, 밥을 먹이고, 화장실 청소까지 도맡아 했다. 국민은 이러한 간호사들을 날개 없는 천사, 영웅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래서 조금 더 희망이 짙어졌던 걸지도 모르겠다. 고생한 만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까 하는. 현실은 냉혹했다. 간호사의 처우 개선을 골자로 한 간호법은 구석구석의 단어를 꼬투리 잡히며 갖은 직역들의 반대에 휩싸였다. 그런뜻이 아니다, 기존의 법 조항에서 바뀐 것이 없다고 설명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지역 간 갈등이 절정으로 치달으며 한국 간호 역사상 초유의 전면 파업이라도 하는가 싶었는데, 뜻밖에도 간호협회가 내놓은 투쟁방식은 이름도 생소한 ‘준법투쟁’이었다. 병원에서 암암리에 간호사의 일이 아닌데도 해왔던 다른 직역의 일을 거부하자는 것이었다. 효과는 미미했다. 아마도 제 대로 된 준법투쟁이 이루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떠넘겨진 타 직역의 일을 현장의 간호사가 거부할 수 있었다면, 진작에 그 일을 떠맡지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결국, 간호법은 무산되고 가혹한 현실은 바뀌지 않았으며 간호사는 모든 의료 직군의 미움을 받는 이기주의자로 전락하는 슬픈 결말을 맞았다. 학습된 무력감은 더욱 깊어졌다.

 

해가 바뀌어 2024년 겨울의 끝. 정부는 의대 증원 문제를 두고 의사 단체와 첨예한 대립을 하였고, 복지부 차관은 의사 파업으로 생긴 의료 공백을 PA 간호사를 ‘활용’하여 해결하겠다는 발표를 내놓았다. 간호협회는 즉각 이에 동의한 적 없다는 성명서를 내었지만, 며칠 후 손바닥 뒤집듯 정부의 의료 개혁을 “적극 지지” 한다고 외치며 의사의 일이며 의료기사의 일까지 간호사에게 시킬 수 있다는 ‘PA 시범사업’ 을 내놓았다. 의사와 정부 간의 문제에 가만히 있던 간호사를 ‘활용’하겠다는 정부도, 간호사를 보호하겠다더니 순식간에 180도 입장을 바꾸어 위험한 시술을 종용하는 간호협회도 현장의 간호사들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일 것이다.

 

평범한 간호사들은 하루아침에 ‘PA’ 간호사로 차출되어 전공의들이 하던 의사의 일을 대신하게 되었다. 복지부의 지침에는 분명 ‘충분한 교육ᆞ훈련 선행필요’라고 쓰여 있지만, 당장 아수라장인 의료 현장에 충분한 교육을 할 시간도, 훈련을 시킬 인력도 있을 리 만무했다. 해본 적도 없고 배우지도 않은 위험한 시술을 하자니 환자가 위험하고, 하지 못하겠다고 거부하자니 인사고과를 쥐고 있는 병원의 눈치가 보이는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사고가 났을 때 짊어지게 될 소송의 부담도 크다. 정부는 병원이 책임질 것이라고 하는데 병원은 간호사가 ‘선택’한 것이니 책임져 줄 수 없다고 한다. 사고는 한 순간이지만 소송은 길다. 이 사태가 끝난 후 누가 간호사를 보호해 줄 것인가? 설령 간호사가 법적으로 보호받는다고 하더라도, 업무 범위와 직능을 넘어선 의료행위를 하다가 환자에게 생기는 피해는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간호협회는 보건복지부에서 간호사들을 보호해 주겠다는 확실한 약속을 받았다며 의기양양하게 PA 시범사업을 제시했지만, 위험을 지는 것은 협회가 아니라 현장의 간호사와 환자들이다. 애초에 간호사와 정부간의 문제도 아니었다. 합의도 없이 갑자기 소환된 ‘PA간호사 활용’에 즉각 항의했던 것처럼, 간호협회는 간호사가 간호사로 있을 수 있도록 끝까지 지켰어야 했다. 정말로 불가피한 상황이 된다고 하더라도, 협조에 앞서 정치인들의 ‘약속’이 아닌 물릴 수 없는 ‘법안’으로 간 호사를 철저하게 보호하는 것이 우선되었어야 했다. 법 제정도 되지 않은상태에서 병원장이 시키는 의사의 일을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임상의 간호사들이 하도록 방기한 간호협회는 불법을 조장한 국가와공범이다. 그 결과 현장의 간호사들은 기한을 알 수 없는 무급휴가와 위험한 격무에 내던져지고, 선택권도 거부권도 없이 혹사당하며 나날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간호협회의 성명서는 ‘65만 간호인’이라는 문구로 세력을 과시하는데 정작 그중 한 명일 나의 의사는 물은 적도, 들은 적도 없다. 협회 게시판에는 동의한 적도 없는 사안을 전체 간호사의 의견인 양 내건 것에 대한 간호사들의 항의 글이 빗발치지만, 돌아오는 답변 역시 없다. 늘 그랬다. 협회는 간호사를 위한 일이 아닌 특정 이익을 위한 행보를 보이고, 현장 간호사의 분노와 항의는 줄곧 묵살되어왔다. 최근 의대 정원 증원 이슈와 PA 임시사업 관련하여 온라인 게시판이며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도 간호사들이 의견을 활발하게 내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묵묵부답이다. 절대적인 일방향 소통,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거대한 차원의 벽이 있는 듯하다. 지친 간호사들이 환멸을 느끼고 현장을 떠나면 그 자리는 하염없이 대기하던 젊은 신규 간호사들이 부품처럼 끼워 넣어진다. 과중한 업무량에 정책이나 협회의 일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는 어린 간호사들은 같은 역사를 반복한다. 어린 간호사들을 충분히 공급하기 위한 간호대 증원은 요란법석한 의대 증원과 달리 이미 조용히 진행되어 지금은 벌써 2008년의 2배에 가까운 수가 되었다. 대한민국 간호사의 가혹한 현실이 바뀌지 않고 제자리 걸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장에서 삼 교대를 하며 밥도 못 먹고 생리대 갈 시간도 없이 뛰어 다니는 간호사와 웅장한 호텔 연회장에서 높은 사람들과 고상한 이야기를 나누는 간호협회는 ‘같은’ 간호사가 아니다. 나눠먹기식 대의원과 감투 돌려쓰기를 하며 간선제로 회장을 선출하는 간호협회의 실상을 아는 이는 대한민국에 많지 않다. 현장의 간호사는 면허를 유지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매년 협회비와 보수교육비, 간접비를 납부 하지만 간호협회장이 될 수도, 투표를 할 수도 없는 2등 시민이다. 간선제에 참여하는 대의원이 어떤 기준으로 선출되는지조차 모른다. 수상하게도 특정 학교 출신이 유난히 자주 당선되는가 하면, 무려 4차례나 간호협회장을 한 사람도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대한간호협회는 산하에 시도 간호사회, 병원간호사회, 응급간호사회, 중환자간호사회 등 수십 개의 단체를 두고 있지만, 이 역시 취업한 신규간호사에게 당연한 듯 가입비와 회비만 받아 갈 뿐, 어떤 기준으로 선출된 임원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196억 원이 넘는 간호사들의 피땀 어린 예산이지만 협회가 공개하는 사용 내역은 A4지 한 장짜리 공고가 전부다. 협회비가 간호사들을 위해 쓰이고 있다고는, 슬프게도 생각할 수가 없다. 효용성이 의심되고 시간이 아까운 질 낮은 보수교 육을 하며, ‘힐링 프로그램’ 같은 것조차 간호사를 위하는 듯 보이지만 시늉에 불과하다. 실상은 병원마다 머릿수 확보를 종용하는 공문이 내려와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대단한 강사를 섭외 하고 옹골찬 프로그램을 짠들, 삼 교대 사이 얼마 없는 귀중한 휴일을 반납하고 간호협회에서 하는 행사에 억지로 참석한 간호사가 힐링이 될 리 있을까.

 

간호협회의 노골적인 용비어천가에 대한 포상 혹은 굽히지 않는 의사 집단을 향한 공격처럼, 불과 몇 달 전 거부권 행사로 무산되었던 간호법(간호사법)이 3월 28일 국회에서 재발의되었다. 협회는 65만 간 호인이 ‘봄보다 반가운 소식을 기쁜 마음으로 환영한다’라고 밝혔지만, 정작 65만 중 하나인 나는 여전히 금시초문이다. 이날 발의된 간호 법이 어떤 내용인지조차 모른다. 간호사를 위한 법이 맞긴 할까? 간호 법이라는 타이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간호사에게는 1인당 환자 수 제한, 확실한 간호사의 업무 범위 지정으로 부당한 타 직역의 일을 떠맡지 않도록 하는 것, 간호 수가 신설 및 이를 간호인력에게 사용 될 수 있도록 강제하는 조항 등이 필요하다. 단독개원이나 처방권, 간호조무사 학력 등은 현장 간호사들이 원한 적도, 관심 가진 적도 없는데 욕만 먹는 서러운 조항이다. 작년의 법안을 뜯어 고쳤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끼워팔기 식으로 타 직역의 반발을 사는 엉뚱한 조항이 들어가 있지는 않은지 이젠 오히려 걱정된다. 이번 의료 공백에서도 어김없이 ‘활용’ 당하고 있는 간호사들이 작년처럼 또 다시 직역 이기주의자로 몰리며 갖은 직역의 비난을 받고 작년처럼 결과적으로 법까지 무산된다면 그 허탈함과 무기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구시대적인 간선제를 고수하며 간호사들의 목소리를 듣지도, 대변하지도 못하는 간호협회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그들은 누구의 편일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돌아오지 않을 물음이지만, 묻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