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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71호] 알페스 논란의 재해석: 알페스·팬픽에 대한 사회구조의 영향

thxzomarch 2024. 12. 14. 09:00

 “디지털 성폭력의 일종으로 여겨지는 ‘알페스’ 용의자들이 기소유예 처 분에 그쳤다.” 지난 9월 RPS(이하 알페스) 관련자 7명이 최종 기소유예 되자 쓰인 기사의 첫 문장이다. 2021년 1월 하태경 당시 국민의힘 의원 과 이준석 당시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알페스 제작자와 유포자를 처벌 해달라고 수사 의뢰한 것의 결과다. 당시 한 래퍼의 SNS 발언을 계기 로 시작된 알페스 논란은 정치인이 이슈 선점용으로 이를 언급하고 언 론이 무비판적으로 보도하면서 사회·문화적 논쟁거리가 되었다. 하태 경 전 의원은 알페스에 대해 “음란물”, “성 착취물”, “제2의 N번방 사 태”라며 과장된 표현을 사용했고 ‘알페스 처벌법’ 발의로까지 이어졌 다. (제정되진 못했다.)

 

 알페스를 ‘디지털 성폭력’으로 규정하는 것은 한국 대중문화 팬덤 의 역사적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해석일 수 있다. 팬덤의 발달 은 인터넷 기술의 발전, K-POP 산업의 성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 다. 더욱이 알페스를 ‘성 착취물’이나 ‘N번방 사태’와 같은 범주에 넣는 과장된 해석은 한국 여성의 젠더 및 섹슈얼리티 감각에 대해 전혀 이 해하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현실의 성정체성 고정관념과 이분법적 젠더 규범 등에 대한 실험의 장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에 서는 이러한 사회문화적 맥락을 바탕으로 알페스와 팬픽이라는 문화적 실천의 의미를 보다 깊이 있게 분석하고자 한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 주인공이 팬픽을 읽다 수업시간에 들키는 장면 [출처: 유튜브 디글 클래식 :Diggle Classic 갈무리]

 

 

알페스와 팬픽

 먼저, 알페스라는 표현 이전에 ‘팬픽(fanfic)’이 있었다. 알페스는 ‘Real Person Slah’의 준말로 “실존인물 간 연애를 픽션으로 묘사하는 모든 문화적 허용을 총칭하는 것”(퀴어돌로지, p.14)을 뜻한다. 팬픽은 팬(fan)들이 쓰는 허구의 이야기(fiction)라는 뜻의 ‘팬픽션’의 준말이다. 한국에서는 주로 아이돌 그룹을 대상으로 삼은 이야기를 의미한다. 즉, 한국에서의 팬픽 또한 ‘실존인물’을 다루므로 알페스라고 부를 수 있 다. 그러나 팬픽이라는 표현은 팬덤 활동을 강조하는 뉘앙스를 주는 반 면에 알페스는 ‘Real Person’ 즉 ‘실존인물’에 방점을 찍게 만드는 표현 이다. 물론 알페스라고 해서 팬덤 활동의 일환이 아닌 것은 아니다. 알페스는 미국에서 1960~80년대 드라마와 영화 등으로 나온 <스타 트랙(Star Trek)> 시리즈의 등장인물을 소재로 팬들이 팬픽, 팬진(fanzine) 을 만들면서 나온 단어로 알려져 있다.

 

 ‘팬픽’을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검색해보면 2000년 4월 기사가 가 장 먼저 뜬다. 당시 PC통신 내에서 스타와 관련된 온라인 모임이 유 행이었던 모양이다. 스타의 외형을 따라하거나, 좋아하는 스타와 관련 된 정보를 나누거나, 스타를 대상으로 하는 소설인 팬픽을 연재하는 모 임 등이 기사에 소개되었다. 사회에서는 이를 문제시하는 시선도 있었 는데, 2000년 7월 당시 정보통신부가 발표한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에 청소년 유해정보 등급제가 포함돼 팬픽 사이트 회원들이 온라인 시위에 나선 바 있다. 자신들의 콘텐츠가 정부 검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을 우려한 까닭이다. 그러나 언론은 이를 ‘논란’으로 다뤘다. SBS는 2002년 10월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팬 픽 문화를 청소년 동성애 문제로 다루기도 했다.

 

팬픽을 발달시킨 기술적·산업적·성적 요인

 그러나 이것이 퇴폐적이라거나 동성애적 요소를 문제 삼는 일 등 은 보수적 성 규범에 입각한 시선으로, 그런 평가 이전에 이러한 실천 이 나타날 수 있게끔 만든 배경부터 짚을 필요가 있다. 앞서 PC통신 내 문화현상으로 팬픽이 언급되었듯, 90년대 중반 이후 컴퓨터와 인 터넷이 확산되면서 사이버 공간, 사이버 문화가 새롭게 구축되게 된 다. 2000년대 초 초기 팬픽에 대한 연구들은 팬픽을 (1)사이버 공간 내 (2)10대 여학생들의 (3)스타에 대한 (4)팬덤 현상으로 바라보았다. 특히 팬픽이 사이버 공간에서 생산되고 소비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볼 때 익 명성, 개방성, 자율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사이버 문화가 팬픽을 활성 화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도 이어지고 있지만 당 시에는 컴퓨터와 여학생은 덜 친숙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와중 에 사이버 공간과 팬픽이라는 요소가 서로 영향을 주면서, 여학생들이 컴퓨터를 매개로 적극적인 문화생산자가 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아이돌 산업의 발달은 아이돌 그룹 팬픽 문화 발달의 필요조건이 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1990년대 중후반 1세대 아이돌 그룹이 탄 생하고 대중문화의 주요 요소로 자리매김한 것은 팬픽 문화에 중요한 기점이 된다.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 등장하는 팬픽 주인공 인 H.O.T.는 1996년 데뷔이고, 한국 팬픽 문화 형성기의 주축인 신화는 1998년 데뷔이다. god는 1999년, 팬픽 문화 성숙기의 주축 동방신기는 2002년에 데뷔했다. 아이돌 문화에서 동성애 코드는 팬덤 유입을 이끄 는 효과도 있기 때문에 과거에는 직접 기획사에서 팬픽 제작에 앞장서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SM엔터테인먼트가 동방신기·슈퍼주니어 팬픽 공모전을 열거나, 웹툰 회사와 협력하여 팬픽 웹툰을 만든 일이 있다. 현재 팬덤 문화에서는 ‘비게퍼(비즈니스 게이 퍼포먼스)’라는 표현으로 상업성을 위해 일부러 관계성을 드러내는 멤버들을 비꼬기도 한다. 그 러나 팬픽·알페스 등의 창작물과 그것이 드러내는 아이돌 멤버 간 관계 성이 상업성과 아예 연관되지 않을 수는 없다. 팬덤이나 산업 전반에서 도 기획사가 이를 마케팅에 활용한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 여성의 젠더와 섹슈얼리티 감각 또한 팬픽의 생산과 소비를 추동하는 원인이 된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 특히 10대 여성들은 ‘무성 적’ 혹은 ‘탈성화된’ 존재로 규정되어왔다. 이러한 사회적 제약 속에서 팬픽은 여성들이 자신의 성적 욕망과 판타지를 우회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안전한 창구가 된다. 특히 동성 로맨스를 다루는 팬픽은 기존의 가부장적 시선과 이성애 중심의 질서에서 벗어나 여성들만의 독특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 여성들이 실존하는 남성 아이돌 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그것이 현실과는 분리된 판타지임을 인식하는 이중적 감각은 오히려 더 자유로운 욕망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팬들은 실제 아이돌들의 상호작용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캐릭 터의 성격과 관계의 역동성을 구축한다.

 

 또한 팬픽에서 나타나는 성적 묘사는 포르노그래피나 남성 중심적 성인물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육체적 묘사보다는 감 정선과 심리적 교감에 초점을 맞추고, 등장인물 간의 동등한 관계성을 중시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는 한국 여성들이 지향하는 친밀성과 성적 판타지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으로, 단순한 성적 대상화나 착취와는 거 리가 멀다. 더불어 익명성이 보장되는 사이버 공간의 특성은 현실에서 는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여성들의 욕망을 더욱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 게 한다. 이처럼 팬픽은 한국 여성들의 억압된 섹슈얼리티를 해방시키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문화적 실천이 되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 팬픽 공모전에서 당선돼 영화화된 <지구에서 연애중> 포스터 [출처: 왓챠피디아]

 

 알페스 둘러싼 기존 논란은 비맥락적 알페스·팬픽에 대한 맥락적 이해 확고히 해야 한편 그런 점에서 팬픽·알페스는 단순히 성애적 묘사가 포함된다고 해서 ‘성 착취물’이라거나 딥페이크(Deepfake·이 글에서는 ‘불법합성물’ 로 사용)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없다. 첫째, 앞서 언급한 것처럼 팬픽·알 페스는 팬덤 내부의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문화 생산 활동이라는 점에서 타인의 동의 없이 제작되는 불법합성물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둘째, 알페스는 여성 팬들이 자신의 욕망과 판타지를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문 화적 실천이다. 셋째, 팬덤에는 팬픽을 제작-소비-유통하고 공유하는 것에 대한 규범·규율 같은 것들이 있다. 특히 팬들은 스타의 이미지 관 리를 위해 알페스를 비공식적으로 생산하고 공유하는 것을 암묵적 규칙 으로 삼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동방신기 출신 가수 겸 배우 김재중 씨의 유튜브 콘텐츠 <재친구>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재친구>에서 동방 신기의 유명 팬픽 대사가 쓰인 부분이 있었는데, 당사자인 김재중 씨에 게 왜 비공식적 콘텐츠를 공개하느냐는 팬들의 지적이 있었던 것이다.

 

 알페스를 둘러싼 논란은 단순히 법적 규제의 필요성이나 윤리적 판단 의 차원을 넘어, 한국 사회에서 팬덤이 갖는 문화적 의미와 여성의 문화 생 산 활동이 지닌 가치를 재고하는 계기가 될 필요가 있다. 알페스를 디지털 성폭력이나 불법합성물과 동일시하는 시각은 팬덤 문화의 역사성과 복잡성 을 간과한 것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팬덤의 문화적 실천이 가 진 의미를 이해하고, 이를 통해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더 풍부한 논의 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특히 알페스가 보여주는 여성 팬덤의 자율성과 창 의성, 그리고 그들이 구축한 자체적인 윤리 규범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단 순한 팬덤 활동을 넘어 여성들의 문화적 주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따라서 알페스를 성폭력의 프레임으로 재단하기보다는, 디지털 시대 여성 팬덤의 능동적인 문화 실천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확고히 해야할 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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