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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대학원 신문사
[171호] 우리는 대본 위에서 비인간 타자와 함께 춤추는 인간 행위소일 뿐! 본문
이원진(연세대학교 미래융합연구원 연구교수)
#1. 최근 즐겨듣는 영어공부용 유튜브 채널에서 눈에 들어온 표현이 하나 있다. “컴퓨터가 고장 나 애를 먹다.” 영어로는 “The computer is acting on me!” 이 말이 새삼 흥미진 이유는 사물의 행위성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워진 현실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는 평소에는 우리에게 가려져 있던 ‘망치’의 실재를 퍼뜩 다시 지각하게 되는 것은 오직 망치가 망가질 때라고 얘기했다. 그제서야 비로소 망치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우리에게 긴밀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이 익숙해진 것은 뭐니뭐니해도 행위자 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의 창시자인 브루노 라투르 덕분이다. 그러나 그가 비인간 사물과 인간을 나란히 같은 평면 위에 놓기 위해 동일하게 행위자(actor)라고 표현하기도 훨씬 전부터 컴퓨터나 망치 같은 사물이 우리에게 행위(반항, act)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명해진다. 생각해보면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말에서도 “이 전선줄이 여간 말을 안 듣는 게 아니네” 하지 않나. 우리의 경험 언어는 라투르 이전에도 우리는 원래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2. ‘반려감(伴侶感)’. 빅데이터 전문가 송길영 부사장이 운영하는 생활변화관측소가 제시한 2023년의 트렌드였다. 2018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반려OO이라는 단어는 개와 고양이, 식물을 넘어 파충류까지 미치다가 급기야 ‘반려가전’이란 말도 탄생시켰다. 피곤에 지친 우리를 대신해 묵묵하고 한결같이 제 자리에서 할 일을 해주는 로봇청소기, 식기세척기를 써본 사람은 안다. 때로는 이들이 우리 삶에 진정 고마운 반려자라는 것을. 애플 워치, 아이패드 등은 수많은 이들에게 하루도 없이 못사는 ‘반려기기’가 된 지 오래다. 위로를 주거나 스스로 성장(기계의 경우 업데이트)하는 모든 사물에 우리는 이미 반려감을 느끼고 있다. 마케팅 회사들은 동식물을 넘어 딱딱한 물성을 가진 기계에도 이름을 불러줄 때 반응하거나 눈을 깜박거리게 만드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어찌보면 섬뜩할 수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관심사는 동식물을 넘어 벌써 ‘사물’로 가고 있음은 역시 분명하다.
#3. 드라마도 예외는 아니다. 2013년 <별에서 온 그대>(이하 ‘별그대’)에서 다른 행성의 외계인 도민준에서 아마도 처음 시작한 ‘이인(異人)’은 2016년 드라마 <도깨비>와 <시그널>에 이어, 2017~2018년 영화 <신과 함께>, 2020년 웹툰을 개작한 <쌍갑포차>, 2021년 전 세계를 휩쓴 <경이로운 소문>과 <스위트홈>에까지 등장했다. ‘이인’은 통념에 부합하지 않고 손아귀에도 잡히지 않으며 인간과 신의 경계를 뛰어넘는 해방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생사를 뛰어넘는 존재들로 외계인으로, 도깨비로, 형사 또는 주모酒母 귀신으로, 카운터로, 저승차사로, 괴물로 둔갑한다. 이들은 각각 인간이었던 시절 가졌던 소수자로서 억눌렸던 강렬한 ‘욕망’ 때문에 이인이 된 것으로 나온다. 이들은 이인이 되어 권력층을 징벌하고 정의를 바로잡는다. 하늘이 그들에게 힘을 점지한 이유는 그들이 가진 원통함을 풀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들이 하늘의 힘을 빌리거나 일반 사람들과 소통하게 되는 통로는 의외로 다른 사물과의 연대를 통해서다. 그들은 하늘의 힘을 빌어서 땅을 부르고, 융의 땅에서 나오는 힘을 빌린다. (경이로운 소문) 국숫집이나 포차라는 유동성 좋은 서민의 먹거리 메타포와 쌍갑술(마시면 꿈나라로 가는 술)을 빌려 자신의 정의를 실현한다. 검(도깨비)이나 무전기(시그널), 비녀(별그대, 쌍갑포차)라는 주인과 함께 동고동락한 사물들은 그들의 기억과 원한이 아로새겨진 하나의 행위자이며, 그것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대가 만나는 문이 된다. 기인들의 모든 사물은 단순히 장소성이나 환경이 아니라 주인공과 함께 일을 벌이는 적극적인 행위력을 가진 주체다. 특히 도깨비 김신의 검과 별그대 천송이의 비녀는 그 모든 세월을 함께한 물질적 기억이다. 그 사물들 역시 인간만큼이나 해원解冤을 기다리고 있다.
위의 세 가지 에피소드는 모두 사물의 행위성에 대해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적, 생활적, 서사적 사건들이다. 한동안 출간되는 인문사회과학책의 목록만 봐도 이 느낌은 자명하다. 『숲은 생각한다』(2018, 에두아르도 콘), 『매혹하는 식물의 뇌』(2016, 스테파노 만쿠소, 알렉산드라 비올라), 『식물의 사유』(2020, 뤼스 이리가라이),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2020, 호프 자런), 『생동하는 물질』(2020, 제인 베넷) 등에서 보듯 사회과학자들은 비인간인 식물 역시 생각할 수 있는 뇌와 사고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동물을 넘어 식물에게도 표상 능력에 더해 행위 능력이 있다는 주장은 형이상학적 인간중심주의를 강력하게 와해시키고 있다.
주체/객체 또는 사회/개인의 분열
비록 우리에게 이 개념이 익숙하고 오랫동안 사물의 행위를 인정하는 언어를 써왔다 해도, 최근까지 사물의 행위성 관련한 담론과 실천으로 가장 인기를 누린 이는 프랑스 과학사회학자 브루노 라투르(1947-2022)일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학자이기도 하다. (사변적 실재론자 그레이엄 하먼은 약간 질투어린 시선으로 그의 책 서문에서 이를 지적했다.) 또 라투르는 21세기를 지배하고 있는 새로운 철학 사조인 신유물론, 객체지향 존재론, 사변적 실재론, 생태주의를 포괄하고, 이 사조에 영향을 끼친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 질 들뢰즈의 내재성(immanence) 개념과 존재의 일의성(univocity) 개념, 그리고 미셸 셰르의 매개의 존재론 등을 모두 참고한 소위, 근대성 비판 사유의 거대한 저수지라 칭할 만하다. 가장 중요하게 라투르는 꽤 유쾌하다. 그의 글은 유머러스하고 역동적이어서, 또 논쟁적이다. 그는 성서주석학을 공부한 카톨릭 신자이고, 군복무 중이던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에서 인류학과 민족지 연구를 접했다. 그래서 성서, 인류학, 실험과학, 사회학, 만화를 비롯해 다양한 장르와 내러티브 사이를 종횡무진한다. 그는 교수나 철학자가 되지 않았으면 라투르 와인을 판매했을지 모른다.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의 전형적인 와이너리 메종 루이 라투르를 소유한 집안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끔 “독자들이 라투르 와인에 버금가는 즐거움을 얻기 바란다”고 우스소리를 하는 이유다. 그가 사물의 행위성에 대한 이론을 유머러스하게 전개해 전 세계에게 공감을 얻은 것은 이런 왕성한 호기심과 다양한 배경이 펼치는 네트워크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책은 그만큼 난해하기도 하다. 독자들이 이미 행위자 연결망 이론(ANT)에 대해서는 비교적 익숙할 것이므로, 이번 글에서는 라투르의 책 중에서도 가장 난해하기로 악명높은 그의 말년 대작 『존재 양식의 탐구』(2012)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에 대한 보충하는 식으로 설명해보고자 한다. 이 책은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 놓은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1991)에서 검토했던 근대성을 낱낱이 재검토한다. 그래서 『존재 양식의 탐구』 부제는 ‘근대인의 인류학’인데, 서구의 근대 인류학은 서구 바깥의 ‘비근대인’을 대상으로 삼았지만 라투르는 근대인 곧 유럽인을 인류학적 대상으로 삼는다. 라투르는 근대인이 추구해온 기술, 정치, 경제, 종교, 허구, 조직, 도덕, 법, 습관 등의 영역을 가로지르며 이 영역들의 존재 양식(modes of existence)을 검토한다. 이 영역들의 존재 양식이 저마다 고유하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넘어서거나 흡수할 수 없다는 주장을 진행한다.
라투르에 따르면 그 많은 존재 양식(이 책에서 15개) 중에 ‘사회’라는 것은 없다. 엥? 사회가 없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그러나 그의 말을 찬찬히 따라가보면 수긍이 된다. 순수하게 인간적 공동체인 사회는 아예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인간/비인간의 이종접 집합체만 있다. 그래서 그는 사회 대신에 하이브리드한 ‘집합체’(collective)라는 말을 선호한다. 그는 사회를 독립된 하나의 실재의 영역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 이후 사회학은 크게 잘못됐다. 사회학은 사회의 수많은 현상, 분야, 구조에 대한 사회적 설명을 제시하려 하지만, 사회적인 것 그 자체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으며 오히려 설명되어야 한다. 지금의 소위 ‘사회현상’라고 부르는 사태를 보자.
“부의 양극화, 대량실업 사태, 환경파괴의 가속화, 동물권, 식물권의 등장, 이민자, 난민, 성소수자, 그리고 이들 약자에 대한 혐오감의 확산, 디지털 성범죄, GMO 등 식량 문제, 냉동 배아, 센서 장착 로봇, 향정신성 의약품, 오존층 구멍, 테러와 전쟁의 일상화, 팬데믹, 인공지능(AI), 신냉전”
지금 우리가 직면한 이 많은 문제 중에서는 사회학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없다. 우리는 화학적 반응과 정치적 반응이 끊임없이 혼합되는 세계에 살고 있으며, 유전자 변형 생물체(GMO)에 대한 과학적 질문을 비정부기구들의 항의와 함께 다뤄야 한다. 기후 위기 역시 마찬가지다. 불타는 지구와 기후 부정론자들의 끊임없는 로비를 함께 저글링해야 한다. 이 같은 상황은 우리가 무수히 다양한 갈래의 자연적 실천으로 구성된 다자연주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 이를 ‘결합의 사회학’라고 부른다. 1979년 『실험실 생활』에서 라투르는 STS(과학기술사회학)의 명성을 획득하게 되는데, 그 주장은 프랑스가 파스퇴르를 구성하는 것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파스퇴르와 미생물, 그의 실험실이 프랑스를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떠올려 볼 때 오히려 사회적인 것은 이종적 요소들의 연결 속에서만 일어나는 끊임없는 이동(번역)을 추적함으로써만 묘사될 수 있다. 또 그가 사회라는 용어를 싫어하는 이유는 사회가 오직 인간만으로 구성된 공동체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투르는 사회를 집합체로 바꾸고, 인간 시민도 행위자로 바꾼다. 집합체는 언제나 같은 수준의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 즉 기계, 건물, 미생물, 텍스트 등으로 구성된다. 그는 같은 방식으로 인간이 하나의 합리적 개인, 아니 개인 자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주체이고, 사물이 객체라는 인식도 역전된다. 그가 대신 이 책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미셸 셰르가 고안한 단어인 ‘준(準, quasi)객체’와 ‘준주체’다. 여기서 주체로 상정돼 왔던 ‘인식하는 정신’과 객체로 상정돼 왔던 ‘인식되는 대상’이라고 흔히 불리는 것들은 그 연쇄가 고정되고 안정되고, 매여 있는 두 가지 극단이 아니다. 오히려 그 둘 모두가 연결망이 확장되고 강화되면서 유래하는 산물이다. 인식하는 정신과 대상은 신비한 가교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행위자들이 지시하는 연쇄가 확장하며 누적된 결과다. 이 지시의 연쇄는 한쪽에 있는 주체와 객체 사이에 매달린 밧줄이 아니라, 뱀이다. 즉 몸이 더 길고 강해지면서 머리와 꼬리가 점점 더 멀어지는 뱀이다. 뱀이 그리는 궤적, 공백, 틈새의 혼란스러움이 바로 집합체의 본질이다. 바로 이 뱀처럼 길다랗고 구불구불하며 어린왕자의 보아뱀마냥 크기가 점점 커지고 리듬감 있게 움직이는 모든 지점들이 라투르가 생각하는 연결망이자 집합체이다. 앞서 봤던 기후위기 등 하이브리드한 객체의 폭발적 증가로 인해 우리가 사회구조 전체를 다시 재사유할 정치력을 설계하는 게 중요해졌다. 마치 백화점 조향사가 코의 민감성을 향상시켜 향수 냄새의 미묘한 차이를 감지할 수 있도록 향수와 더 잘 연쇄하도록 훈련받듯이, 우리도 준객체들과 연결을 잘 감지하고, 각각의 미묘한 톤으로 반응해 좋은 공동세계를 만들 수 있도록 훈련받아야 한다. 라투르는 이를 다른 곳에서는 ‘사물의 의회’ 또는 ‘객체 지향 민주주의’라고 부르기도 하고, ‘코스모폴리틱스’(지구정치 또는 정치생태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사회와 개인으로 설명하는 대신 다른 묘사를 찾기 위해 이 책에서 재밌는 비유를 드는데, 바로 대본과 캐릭터이다. 폴과 피에르가 리옹 역 시계탑 밑에서 5:30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 폴: “내일 오후 5시 45분에 리옹역 시계탑 아래서 만나자. 오케이?”
- 피에르: “좋아, 내일 보자! 안녕!”
지극히 평범한 이 대화로 폴과 피에르는 하나의 대본을 쓴 작가가 된다. 그러나 이 약속이 그들의 노트나 핸드폰에 기입되자마자, 그들은 그들에게 관여하는 이야기에 붙잡혀 조직되고, 그 이야기가 자신들에게 할당한 역할을 자신들이 차지한 것처럼 이야기의 캐릭터가 된다. 서사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을 붙잡는 것이다. 이야기 자체가 하나의 행위소로 수행적이 된다. 그러나 폴과 피에르는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서로 다른 많은 폴과 피에르가 다른 시공간, 다른 행위소적 역할 속에서 단 하나의 같은 피에르와 폴을 조율하고 있다. 폴은 직전 치과병원에서, 피에르는 여자친구를 만났다가 역으로 달려갔었다. 폴은 결국 상사와의 미팅을 놓쳐 직장을 잃었고, 피에르는 자신을 기다리던 어머니를 화나게 했다. 그들은 대본을 썼지만 또 대본에 의해 씌여지기도 한다. 대본들은 수행되지 않기도 하고, 일관성도 없으며, 관성적으로 움직일 때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주체는 없다. 사회를 이루고 있는 주체적 개인은 그 본래의 뜻처럼 ‘나눠지지 않는 존재(in-dividual)’가 아니라, 오히려 여러 대본 속 무수히 증식하는 캐릭터로 나눠지고 합해지고, 재조직화된다. 매일 수없이 많은 SNS 속 부캐로 또는 단체 톡방에서 부단하게 바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이 은유는 쉽게 이해된다. 위로가 되는 것은 라투르가 이 무수한 대본의 쌓임의 총합을 관장하는 단 하나의 작가나 섭리는 없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 대본에 기입했던 작은 실패들, 작은 상처들은 우리의 역동적 네트워크 속 하나의 대본일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오늘도 중첩적인 ‘우리의 빛나는 대본’의 궤적들 속에서 행위과정의 조정과 이해 당사자들의 분배에 필요한 메아리를 듣고 할당, 분배, 조율할 장치를 갖추는 데 몰두해야 한다.
경제에서 생태로
근대인의 용어 가치관을 이렇게 뒤집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구 근대인이 만들었지만, 현재 암적으로 증식하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라는 거주지에서 ‘생태’라는 거주지로 넘어갈 길을 찾기 위해서다. 놀랍게도, 경제(economy)와 생태(ecology)는 모두 그리스어로 집을 뜻하는 오이코스(oikos)라는 어원을 공유한다. 우리는 경제로 살림해온 지구에서 이제 거주 불능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지구라는 집을 떠날 방법은 없다. 남은 유일한 길은 합리적 이해관계에 따라 계산하는 냉정한 개인이 아니라 복합적 하이브리드 행위소로서 무수한 대본 속에서, 이제 민감하게 집합체의 다른 행위소들와 접속할 태세를 갖추고 함께 춤추며,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생태’ 거주지로 무사히 넘어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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